순서가 중요합니다 (막 2:5-1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집단인 소피스트들은 수사학과 논리학을 즐겨 배우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젊은 학생들에게도 수사학과 논리학을 가르쳤는데, 이야기를 통해 논리를 전달하곤 했습니다. 그들이 자주 사용했던 이야기 중에 악어 이야기가 있습니다.
악어가 어느 날 물가에서 노는 아기를 하나 잡았습니다.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입을 크게 벌렸는데, 엄마가 저 멀리서 뛰어왔습니다. 울면서 애원합니다. 제발 내 아기를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악어가 잡아먹으려다 잠깐 멈추고 엄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이 아기를 잡아먹을지 잡아먹지 않을지 맞추면 내가 돌려주겠다." 엄마가 어떻게 말해야 아기를 살릴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엄마는 아기를 돌려받았습니다. 엄마가 울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분명히 내 아기를 잡아먹을 거야."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악어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이 아기를 잡아먹는 순간 엄마가 맞춘 것이 되니까 돌려줘야 하고, 잡아먹지 않으면 엄마가 틀린 것이 되니까 다시 잡아먹어야 하고, 다시 잡아먹으면 엄마가 맞춘 것이 되니까 돌려줘야 하고. 스스로 던진 질문의 순환의 오류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악어가 생각하다가 골치가 아파서 그냥 아기를 돌려주었습니다.
만약에 끔찍한 말이지만 엄마가 말을 반대로 했다면, "너는 절대로 내 아기를 잡아먹지 못할 거야"라고 했다면, 악어는 고민 없이 아기를 잡아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틀렸어"라고 말하고 먹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의 순서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바꾸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데, 순서를 제대로 하면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것이 말입니다.
순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이 순서나 과정이나 절차를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정과 절차보다는 열매와 결과를 얻고자 합니다. 열매만 얻으면,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나 절차는 별다른 생각 없이 무시해도 좋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우리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과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순서를 잘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하고, 생명을 죽이고 살릴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이 순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순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1. 영혼을 먼저 치료하신 예수님
우리 주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가버나움에는 예수님을 간절하게 절실하게 기다리던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분주하게 준비하고 주님 앞에 나갔으나 장애물이 있습니다. 장애물을 극복합니다. 지붕을 뚫어냈습니다. 중풍병자가 밧줄에 달려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첫 번째 하셨던 말씀이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주님의 첫 번째 말씀은 죄 사함의 선포였습니다. 영적인 중풍이 더 심각하니까, 너는 죄 사함을 받고 너의 병이 나아야 한다, 너의 영혼의 병부터 치료받으라고 그 말씀부터 선포하셨습니다. 사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가장 기대했던 것은 몸이 낫는 것입니다. 빨리 육체가 나아서 옛날처럼 다른 사람처럼 건강한 모습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순서와 절차를 지키십니다. 주님이 먼저 말씀하신 것은 영혼의 중풍병을 고치는 것,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 2:11)
그다음 육체를 치료하셨습니다. 이제 일어나 너의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리 급해도 영혼부터 먼저 치료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육체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순서입니다.
2. 마음 밭을 가시는 하나님
우리 주님은 이 순서를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주님은 이것을 여호와 아버지로부터 배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모습을 보면, 사람을 세우시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준비되었다 하는 것은 외양입니다. 모습이 멀쩡하고, 공부를 다 마치고, 물질이 준비되어 있고, 이럴 때 우리는 준비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준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스펙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영혼과 정신이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정말 이 사람을 사용하고 싶은데, 이 사람을 써서 하나님 나라 일에 쓰고 싶은데, 그런데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준비시키십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준비시키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도 잘 아는 방법입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마음을 흔들어 놓으면 우리 인생의 마음이 갈아엎어지고 준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29편 3절에 보면 시편 저자가 자신의 마음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시 129:3)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밭에 엎드려 있습니다. 밭 가는 자들이 밭을 갈다가 등을 갈아버렸습니다. 등에서 피가 납니다. 주변에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내 등이 파이고, 고랑이 파이고, 고생하는 것을 이 사람은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분을 쓰시기 위해서 마음에 고랑을 내고 등에 고랑을 내시는 농사짓는 하나님을 표현한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가르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하나님을 농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농부는 농사짓는 사람 아닙니까? 어디에다 농사짓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느 땅에다 농사지으십니까? 하나님이 농사짓는 땅은 우리 마음 밭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 밭에 농사를 지으십니다.
하나님이 농사를 지으시면서 가장 기대하시는 것은 열매입니다. 농부의 마음이 그런 것처럼, 내가 이 사람의 마음에다 농사를 지어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고 싶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십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농부는 농사를 지을 때 먼저 밭갈이를 먼저 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 가을갈이를 하지 않습니까? 봄갈이를 하지 않습니까? 보통 가을갈이를 하면 12센티미터, 15센티미터 정도로 땅을 뒤집어 놓습니다. 땅을 뒤집어야 땅이 숨을 쉽니다. 봄이 되면 씨를 뿌릴 때 그 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정말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면, 정말 좋은 열매를 맺어서 거두기를 원한다면, 그러면 땅을 가는 것은 절차이고 순서입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준비시키실 때 마음의 밭부터 갈아엎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말을 합니다. 내 마음이 뒤집어졌다, 내 마음이 뒤집어져서 견딜 수 없다, 내 마음이 갈아엎어졌다. 어떤 일 때문에, 사람 때문에, 물질 때문에, 시험 때문에, 고통 때문에 내 마음이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아,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농사 짓고 계시는구나, 마음을 다 갈아엎어서 이제는 씨를 뿌릴 준비를 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이 다 뒤집어지면 거기에 씨를 뿌리시고, 그리고 곡식이 자라게 하시고, 좋은 열매 많은 열매를 하나님이 기대하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음부터 먼저 경작하고 개간하고, 그다음 열매를 찾아가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이 방법을 잘 배워서 예수님도 영혼에 집중하셨습니다. 어디를 보든지 영혼 구원에 집중하시고, 영이 살아야 그다음 육체가 있다고 주님이 생각하신 것입니다.
3. 영혼을 위한 기도
그렇다면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잘 받았던 사도들과 제자들은 어떨까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성경에 가장 많이 언급되고 가장 많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까지 기록했습니다. 이 분이 요한삼서 1장 2절에 보면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요한이 기도할 때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첫 번째 간구한 기도가 영혼입니다. 두 번째 간구한 기도는 범사, 즉 모든 일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간구한 기도가 강건하기를, 육체적 건강입니다. 범사가 잘되는 것도, 육체적으로 건강한 것도, 그 아래에 뿌리에 영혼이 잘될 때 그다음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도할 때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다 헛것이 아니겠습니까? 영혼이 잘되어야 그 위에 범사가 집을 짓고, 그 위에 건강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사람들은 거꾸로 기도합니다. 건강이 최고야, 이렇게 생각하고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범사, 모든 일을 위해서 낱낱이 하나님께 아뢰려고 기도합니다. 영혼은 온데간데없습니다. 내 관심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그렇게 어리석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기도하는 방법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순서를 모르고 순서를 뒤죽박죽 섞어 놓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하나님도 그렇게 가르치셨고 사도들도 영혼을 소중하게 가르쳤습니다.
4. 영혼이 깨끗해진 교회의 에너지
이제 우리 가까이 와서 우리 믿음의 윗세대, 그 윗세대들의 삶을 보면 그분들도 바른 신앙을 가진 분들은 영혼의 문제에 집착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절을 살펴보면, 지난 1919년 3월 1일 그때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던 그 기본에는 교회가 있었고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교회 개신교인은 인구 대비 약 1.5%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민족대표 33인 중에 16명이 우리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자그마치 전체의 약 절반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3·1운동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은 함께 모여서 3·1운동, 독립만세운동을 외쳤습니다. 길거리로 태극기를 흔들며 나아갔습니다. 어떻게 이런 에너지가 가능했을까요? 어떻게 인구 대비 1.5%밖에 되지 않는 교회가 이런 역사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합니다. 그 역사의 시작은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됩니다. 이 땅에 들어와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었던 하디 선교사는 성경공부 모임에서 자신의 죄상을 고백합니다. 그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땅 조선에 선교하러 왔는데 조선인들이 너무 미웠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무지했고, 목매어 가르쳐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항상 술판이고 노름판이고, 그렇게 가르쳐도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 있을까, 복음을 가르쳐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 와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도 그들은 따라 하지 않습니다. 사역의 열매가 없고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디 선교사는 조선인들을 원망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득 안고 있었습니다.
1903년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자신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고백하던 중에 은혜를 받습니다. 고백하던 중에 회개가 일어납니다. 회개하고 통회하고 눈물로 자복했습니다. 함께 있었던 선교사들도 "나도 그랬다,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선교사들이 함께 통회하고 같이 회개했습니다. 원산에서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이 원산에서부터 일어난 일은 평양으로 옵니다. 1906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새벽기도가 시작됩니다. 함께 새벽기도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했습니다. 영혼이 맑아지고 깨끗해집니다. 그래서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평양 대부흥운동은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갔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조선에 있는 모든 교회는 영혼이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 성도들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다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여 영혼이 정결케 되고 나니,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나니, 그것은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개인의 에너지가 되었고 교회의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2년 후 1919년 3월 1일이 되자, 성도들은 그 에너지를 가지고 방방곡곡에서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만세운동을 했습니다.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가지고 있었던 에너지는 이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열매, 3·1운동의 열매만 봅니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그 뿌리에는 우리의 영혼이 정결케 된 교회의 에너지가 함께 녹아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우리 예수님도 사도들도 믿음의 선배들도 역시 영혼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습니다. 지금껏 몇 대에 걸쳐 믿음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계시고, 무엇에 집중하고 계십니까? 지금 우리가 혹시 영혼이 아닌 내 육체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영혼을 놓아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우리는 거꾸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5. 육체에 집착한 서기관들
오늘 이 본문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던 서기관들처럼 우리는 뒤집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과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6-7)
서기관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성경을 베끼고 필사하는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에 있었던 말씀을 하나하나 낱낱이 베껴서 또다시 성경을 만듭니다. 그래서 이 분들은 성경에 대해서 아주 박식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서기관들을 데리고 다닙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서기관, 지금 여기에 해당되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딱 펴서 알려 줍니다. 그 정도로 성경 말씀에 박식하고 능통한 사람입니다. 거의 다 말씀을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의 학식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직접 눈앞에 두고 보고도 그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그런 엉뚱하고 이상한 잘못된 일이 여기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메시아가 나와 있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실 것이라는 메시아 대망 사상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몰랐을까요? 예수님이 자기 눈앞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주님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을까요?
이것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들만의 프레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만의 틀. 그들은 육체에 집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과 46절에 보면 나다나엘의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통해서 그 당시 지식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하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 1:45-46)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하는 장면입니다. 나다나엘은 마음이 선하고 깨끗한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칭찬하신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그가 빌립의 전도를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시아라? 그가 나사렛에서 났다니,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이 말이 무엇입니까? 그 당시 지성인들,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프레임, 틀이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의 출신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어떻게 저 작은 마을에서 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메시아라면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괜찮은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알 만한 곳에서, 그의 출신을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곳에서 태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메시아라면 학벌도 우리가 받아들일 만해야 하고, 메시아라면 출신도, 메시아라면 물질도, 메시아라면 외모도 받아들일 만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빌립이 전도하는 메시아라는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갈릴리 지역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가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메시아라? 나다나엘은 그런 자기들만의 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지식인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육체에 집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외모, 예수님의 육체, 지금 자기의 눈앞에 있는 그 보잘것없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를 읽어 가면 예수님이 가난한 자로 오시는 것, 예수님이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는 것, 예수님이 한 마리 어린 양으로 오시는 것, 이것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예수를 예수로 메시아로 바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6. 다니엘의 모범
오늘 우리도 이런 오류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제대로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습니다. 영혼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래서 하나님이 영혼을 밭갈이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 영혼을 소중하게 생각하셔서 그 순서를 영혼부터 고치시는 우리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도들의 모습도 우리는 배워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 가다 보면 우리는 모델을 만납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모델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기원전 605년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다니엘은 남유다가 망하기 직전에 유다에서 천재적인 소년으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남유다를 침공하면서 괜찮은 아이들을 모았습니다. 기원전 605년에 남유다 포로를 바벨론으로 데려갑니다. 본국인 남유다는 기원전 587년에 망해 버렸습니다.
이제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성장하고 자라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왕실의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성장합니다. 자라서 바벨론의 고급 관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치세는 70년이었습니다. 70년이 지나고 그 당시 그 나라의 주인이 페르시아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라가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다니엘은 페르시아의 중신으로, 고관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대체 다니엘이 얼마나 이리저리 잘 처신했기에 그가 이렇게 나라가 바뀌어도 권력을 유지하는가? 그는 탁월한 정치력과 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니엘을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때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했습니다. 목을 내놓은 일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서 풀무불에 던져지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다니엘 6장에 다니엘은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모함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대가로 사자굴 속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청년, 소년 시절에도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했고, 백 살이 가까운 페르시아 시대에도 여전히 사자굴 속에 들어갈지언정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처럼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보이는 육체, 이 육체를 보전하기 위해서 진미와 포도주도 마음껏 마셔버리고, 이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금 신상에 절해 버리고, 이 한 목숨 살아남기 위해서 왕이 세운 신상에 또 절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면 다니엘은 그토록 오래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 한 분에 집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치세를 길게 오랫도록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7. 영혼을 먼저 섬기라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명확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순서를 영혼 그리고 육체로 정하신 것처럼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섬기고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더 값지고 더 아름답게 보전하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 귀한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도 우리 예수님도 사도들도 우리 믿음의 조상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다음 육체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순서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내 눈이 즐겨하는 것, 이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죄인들입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목숨 걸고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내 영혼도 돌보시고 내 육체도 책임지시고 우리의 삶도 길고 길게 도우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서 결단한 것, 마음에 새긴 것 절대로 변치 않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매 순간 누리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