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 일어나 따르니라 (2:13-17)

일어나 따르니라

마가복음 2:13-17

1. 유목민의 신앙

유현준 교수가 쓴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책을 보면 종교와 건축 간의 상관관계를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와 이집트 종교는 야훼 신앙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종적도 없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책에서는 과도한 신전 건축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대단한 신전, 엄청난 신전을 지어놓고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고, 그 자리에서 공동체의 결집을 과시합니다. 하지만 전쟁 때가 문제입니다. 전쟁이 되면 살아남기 위해서 다 버리고 흩어지지 않습니까? 흩어졌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모입니다. 모여보니 신전이 다 파괴되어 있습니다. 불타 있고 다 무너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실망합니다. 낙심합니다. 내가 믿는 신이 이것밖에 되지 못했던가? 지금 이렇게 불타버린 신전을 우리가 목숨 걸고 세우고 섬겼단 말인가? 그래서 그 종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원래가 유목민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실 때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막을 지었습니다. 성막은 이동용 예배 천막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눈에 보이는 엄청난 하드웨어적인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하게 여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은 정말 보잘것없는데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두 돌판, 십계명의 말씀, 이 말씀은 생명처럼 붙들고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들의 발이 닿는 곳이 바로 하나님 신앙의 확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야훼 신앙이 더 멀리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솔로몬 성전 이후에 그들의 신앙은 급속도로 쇠락기를 겪습니다. 사실 솔로몬 성전 이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다 성막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성막 시절에 그들은 더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더 뜨겁고 더 열정적이었습니다. 다윗 시절이 가장 최고조, 전성기 아닙니까? 그런데 솔로몬 시절에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의 신앙은 쇠락기를 거듭하고 또 거듭합니다. 급기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흡수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인생도 항상 정착하는 것, 무언가 만들고 짓는 것을 좋아합니다. 보다 더 눈에 보이고 더 화려하고 더 괜찮은 곳에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DNA 속에 심어놓은 것은 바로 유목민의 전통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모든 것 다 털고 일어나서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걸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세워놓은 것이 많으면, 만들어 놓은 것이 많으면, 지어놓은 것이 너무 거대하면 우리는 손 털고 일어서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 머물러 있는 자리가 어느 자리인지 잘 살펴보시고,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모든 것 두고 주를 따를 수 있는지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그 무리들을 앉혀놓고 주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은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는 가르치시고, 두 번째는 고치시고, 세 번째는 전도하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가르치시고 그중에서 병든 자는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각 마을로 들어가셔서 주께서는 전도하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무리들을 가르치고 나서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세관으로 가십니다. 그 세관에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14절을 보겠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하면 예수님께서 우연히 길 가다가 길에 있는 사람을 보시고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너 나를 따라와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결코 그렇게 즉흥적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이며 뜻을 가지고 사람을 부르시고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1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제자를 이렇게 부르셨다고 기록됩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어떤 자들을 부르셨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자들입니다. 주께서는 분명히 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 마태를 부르려고 이곳으로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진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2-1. 세리 레위의 부름

여기 이 레위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됩니다. 이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였습니다. 그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부르시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이 마태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나를 따르라"는 말이 "잠깐만 날 보고 너 그냥 그 자리에 있어라" 이 말이 아닙니다. "너는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직업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이제는 세리직 다 때려치고 나를 따라와라. 내 제자가 되라"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것이 마태에게는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세리는 어떤 직업입니까? 눈 한번 딱 감으면 굉장히 괜찮은 직업입니다. 동족들의 피를 빨아서 로마에게 상납하고, 그 남은 것으로 자신의 배를 불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이 되고, 동족들에게는 매국노 소리를 들을지라도 한두 번이지, 열 번이 되고 스무 번, 백 번이 되면 그다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돈이 생깁니다. 그 돈은 엄청난 돈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다 편하게 먹고 살게 할 만큼, 그리고 자손들까지 다 편하게 살게 할 만큼 굉장히 많은 돈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 세리 자리는 낙하산으로 누가 꽂아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전문직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로마법도 공부해야 되고 세법도 공부해야 되고, 머리가 좋아야 되고, 경쟁자들이 많아서 시험을 쳐서 통과해야 됩니다. 그런 자리를 이 마태가 오기까지 얼마나 수고했을까요?

2-2. 카데마이의 상태

이 엄청난 수고를 한 마태에게 주께서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나를 따라오라"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 주님이 마태가 이 자리에서 너무 편하게 주저앉아서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위험하게 살고 있는 마태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다시 14절 말씀을 보시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 "앉아있다"라는 말을 헬라어 원문에 보면 카데마이(κάθημαι)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카데마이라는 단어는 엉덩이를 붙이고 깔고 앉아 퍼질러 있다는 뜻입니다.

앉아있는 것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허리를 약간 낮추고 엉덩이를 뒤로 뺀 모습. 거기서 조금 더 낮아지면 엉거주춤한 모습. 무릎은 꿇었는데 무릎은 굽혔는데 엉덩이는 땅에 붙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러다가 무릎이 아프니까 그냥 땅바닥에 퍼질러 앉는 모습. 땅바닥에 퍼질러 있다가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아있는 모습. 그런 모습을 카데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앉아서 아예 살림을 차리고 눌러앉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 마태는 처음부터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엉거주춤했겠지요. 동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이거 할까 말까?" 가슴이 쿵쾅거리고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두 번 되니까 양심의 화인을 맞습니다. 돈이 생깁니다. 돈의 맛을 알아버렸습니다. 돈의 맛은 그다음 권력을 가져다줍니다. 돈이 모이니까 권력자들이 그 주변에 모입니다. 힘이 생깁니다. 그들이 매국노라고 해서 사람들이 딸을 주지 않으니까 엄청난 돈으로 창기들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고 빠져듭니다. 돈과 권력과 쾌락. 이것에 이제는 완전히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두 다리 뻗고 아예 거기서 헤어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살림 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앉아있다"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전에 고쳐주셨던 나병환자나 중풍병자들은 병든 육체가 문제입니다. 그 병만 고쳐주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영원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냄비 속에 따뜻한 물을 두고 개구리를 넣어놓으면 그 개구리가 물이 데워지면서 자신이 익어가고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곳에서 헤엄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그런 모양대로 여기 레위 마태는 그렇게 탐닉하고 영원히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너 지금 그 자리에 있다가는 죽는다. 너 그렇게 살다가는 영원히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 너 그렇게 살지 말라. 일어나라. 나를 따라와야 너는 살 수 있다. 그렇게 외치고 그를 불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의 삶의 현장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경제생활도 잘하고 인간관계도 잘하고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알고 계십니다. 혹시 나도 처음에는 엉거주춤했는데 그 자리에 이제는 엉덩이 붙이고 눌러앉고 두 다리 펴고 살림 차리고 카데마이 상태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게 우리 영혼이 병들어 가다가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 박차고 일어나야 살 수 있다. 빨리 털고 일어나야 너 살아날 수 있다.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가 다 유목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저 먼 갈대아 우르에서 불렀습니다. 하란으로 왔습니다. 다시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그들은 가며 살았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이 계신 밧단아람으로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요셉도 이집트로 떠났습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면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은 일어나서 떠났습니다. 유목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도 내 영혼 속에도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고 DNA가 우리 속에 꿈틀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 그 자리에 있지 마라. 너 그렇게 살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 "일어나라" 하시면 그 말씀 듣고 일어나 주 앞에 서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카타케이마이의 주님

우리 예수님께서 이제 구체적으로 행동하십니다.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마태에게 친구들, 세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죄인들이 있습니다. 이 죄인들은 다 창기들입니다. 이들과 함께 앉아서 예수께서 식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15절 말씀에도 "앉아있다"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앉아서 식사하신다는 "앉아있다"는 말과 14절에 세리 마태가 앉아있다는 이 말이 과연 같은 말일까요? 우리 글에는 같은 말로 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이 15절의 예수께서 앉아있다는 이 말은 카타케이마이(κατάκειμαι)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의 식사하는 모습을 빗댄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한쪽 손을 땅에 짚고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서 식사합니다.

예수께서 여기 앉아 계신 것은 그들을 일으켜 세워서 다 예수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이 죄악된 자리에 있지 말고 함께 가자 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카타케이마이, 함께 앉아 식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영안이 어두우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질펀하게 한 판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3-1. 바리새인의 정죄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그런 예수님을 보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이들은 아니나 다를까 영안이 어두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죄인들과 함께 동화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파라쉬(פָּרַשׁ)에서 나왔습니다. 파라쉬는 "구별하다, 구분되다"라는 뜻입니다.

역사를 한번 거슬러 올라가서 처음에 바리새인들이 결성되었을 때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유대인들 중에 아주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백성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죄악 가운데 사는 것이 옳지 못하다. 우리라도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뜻을 같이하는 자들 함께 모이자" 해서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파라쉬라고 불렀습니다. 구별된 자, 거룩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율법을 지켰고 말씀을 지켰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살아갔던 자들입니다.

3-2. 분리주의자가 된 자들

그런데 그들도 그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다 보니 그것이 바로 교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서 처음에는 구별된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분리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리들, 죄인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는 가지도 않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정죄하기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 자리에 들어가셔서 카타케이마이, 함께 식사하고 나누시는데, 그러나 그들은 그들과 함께 식사하거나 교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오래도록 스스로 거룩한 자로 여기고 살다 보니 그들은 자기들의 교권에 사로잡혀서 분리주의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구별된 자가 분리주의자가 되는 것,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가면 그들이 교권을 가지게 되고 그들은 분리주의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여기 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도 역시 똑같이 죄악된 자리, 교권의 자리에 앉아 있는 카데마이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엉거주춤했는데 완전히 눌러앉아서 교권을 행사하고 누리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는 죄인들일 뿐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세관에 앉아서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레위 마태나, 그런 자를 정죄하고 있는 교권주의자들이나 똑같이 카데마이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고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여기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건강한 자, 그들이 의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는 건강한 척하고 의인인 척하지만 너희들이야말로 죄인이다. 너희들이야말로 그 교권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카데마이 상태에 있는 자들이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라 하는 말씀입니다.

4. 유목민의 삶을 실천하신 예수님

이제 오늘 우리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신앙생활 수십 년 했습니다. 몇 대째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혹시 우리도 파라쉬, 구별된 자로 살다가 혹시 우리도 분리주의자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헐벗고 죄인들과 함께 나누며 그들과 함께 머무르지 못하고, 분리주의자로 오히려 그들을 원망하고 오히려 그들을 정죄하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은 자들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유목민의 삶을 실천하며 사셨던 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됨을 취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우리 예수님, 이미 유목민의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도 주님이 능력을 행하실 때마다,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놀라운 일을 하실 때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아서 왕 삼으려고 했습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시면 우리는 아무런 걱정이 없겠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피하셨습니다. 홀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 예수님을 찾아내서 또 부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마다 더 낮은 곳으로, 더 멀리,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하늘에 계셨는데 이 땅에 오셔서 더 낮고 더 낮은 곳에 가셔서 지금 여기 세리와 창기들이 있는 이곳에 오셔서 함께 식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 주님은 가장 낮은 곳 어디까지 가셨습니까? 죄인 중에 가장 악한 죄인이 달리는 십자가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목민의 삶을 실천하셨는데,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 지시는 그 자리까지 가신 위대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4-1. 빌립 집사의 순종

이렇게 말하면 "그건 주님이시니까, 예수님이시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겠죠. 그런데 나는 예수님이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성경을 보면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인데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도 유목민의 삶을 잘 실천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중에 한 분이 빌립 집사님입니다.

빌립 집사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에 한 분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초대교회가 최초의 집사를 세우는데 그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 흩어졌습니다. 그때 빌립 집사님은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사마리아.

사마리아가 어떤 곳입니까? 역사적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으로 왕래하지 않습니다. 만약 들어갔다 하더라도 나와서 신발에 묻은 티끌을 떨어버릴 정도로 사마리아를 저주받은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사람들이 가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빌립 집사님은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가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복음을 전합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죽어있는 땅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8장 8절은 사마리아의 놀라운 역사가 이렇게 있다고 기록합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기쁨의 근원은 예수님입니다. 기쁨의 근원은 우리 주님이신데, 빌립 집사님이 그 땅에 가서 주님을 전했기 때문에 그 땅에 기쁨이 가득하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교회가 커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방문했습니다. 직접 그것을 눈으로 보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빌립 집사님은 고생이 끝난 것입니다. "이제 나는 여기에 설립자가 되었으니 이곳에서 목회하고 편하게 살면 되겠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그렇게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에 보면 성령이 빌립 집사를 불러냅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이제 좀 살만하게 되었는데, 이제 여기서 편하게 지낼 만하게 되었는데 주의 사자가 다시 불러냅니다. 불러내는데 어떤 도시로 가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남쪽으로 가라. 보니 그 길은 광야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빌립 집사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토를 달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부르시니 나는 순종하고 일어나 갈 뿐이다 생각하고, 일어나서 주의 말씀대로 행하고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순종했습니다. 한마디도 다른 말은 하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이 우리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4-2. 일어나 따르니라

만약에 레위 마태가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 하시는데 "예수님, 나를 언제 보셨다고 그러십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가던 길 가십시오. 저는 갈 수 없습니다"라고 했더라면 그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의 영혼은 당연히 버림받았을 것이고, 그의 육체도 돈과 권력과 쾌락에 찌들다가 그만 썩어 없어질 한 줌 재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흔적도 없이 역사의 수많은 세리 중의 한 사람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부름에 순종했습니다. "일어나 예수를 따르니라." 일어나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아마 예수를 따르면서 후회도 많았을 것입니다. 배고팠을 때, 물질이 부족했을 때, 고생스러웠을 때, 그는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때 세리로 살았다면 부자로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주님을 따르는 제자였고, 제자의 사명을 완수하고 살아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복음서 중에 가장 첫 번째 복음서 마태복음을 기록한 불멸의 업적을 남긴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첫 번째 복음서를 기록한 위대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카데마이 상태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잘 아시고 내가 내 상태를 가장 잘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레위 마태처럼 우리도 일어나서 주님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엉거주춤하게 머물러 있다가는 우리의 이 생활이, 이 생이 너무 쏜살같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주께서 부르실 때 일어나 따라가서 정말 참된 제자로 승리하며 살아가시는 주의 제자들,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의 제자답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는 머물러 있는 그 자리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고 죽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돈의 맛과 권력과 육체적 유익에 취해서 그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주께서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찾아오셔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앉아 잡수시면서까지, 오해를 받으시면서까지 우리를 부르시려 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떨치고 일어나 주님 따라가는 마태 같은 주의 백성들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는 구별된 자라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분리주의자가 아니었나 반성합니다. 교권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으면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많은 믿는 자들을 비방했던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처럼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지 우리를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래 신앙생활 하면서 교권주의에 물들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또한 카데마이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 하셨사오니 그 자리도 떨치고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매일같이 새로워지는 믿음, 매일같이 새로워지는 신앙, 주 앞에서 보이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