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 / 산 위에서 (9:1-13)

산 위에서 (막 9:1-13)

조선 시대에 이원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547년에 태어나 1634년까지 87세를 살았던 분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하신 분입니다. 그는 22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까지 네 분의 임금을 모시면서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 어려웠던 시절에 온갖 영화를 다 누렸겠구나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영광의 자리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영의정 자리에 오래 있으면서도 백성들과 함께 지냈던 참으로 훌륭한 재상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 그분은 산속의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때 있었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살던 오두막집 문을 산지기가 벌컥 열어젖히더니 한 아이의 멱살을 잡고 왔습니다. 아이를 그 집으로 밀어 넣으면서 큰 소리를 지릅니다. "이 아이를 내일 내가 포졸을 데리고 올 때까지 여기다가 잡아 두시오. 아이가 도망가면 당신도 온전치 못할 것이오." 그리고 아이에게도 소리를 지릅니다.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여기서 꼼짝 말아라. 내일 포졸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문을 닫고 사라졌습니다.

이원익이 아이에게 묻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 아이가 울면서 대답합니다. "날씨는 너무 춥고 땔감은 떨어지고 어머니는 아프셔서 제가 산에 나무를 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나무 하다가 산지기에게 그만 이렇게 잡힌 것입니다." 그 당시 임진왜란 직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원익이 그 아이가 너무 가여웠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돈을 주고 말합니다. "내려가도 좋다. 원하는 만큼 나무를 해서 집에 가서 군불을 때 드려라." 그리고 보냅니다. 아이가 묻습니다. "나리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 나라의 임금님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안심시키고 보냈습니다.

다음 날 산지기가 포졸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아이가 없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엄포를 놓습니다. "이제 당신이 관아로 끌려가야 되겠다." 그러던 차에 이원익을 모시러 온 가마 행렬이 뒤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렇듯 재상이었지만 항상 백성들과 같은 삶의 현장에 머물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어에도 능통했습니다. 그 당시 배운 사람들은 글은 썼지만 말은 통역관인 역관에게 맡겼습니다. 그들이 직접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천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중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사신들과 직접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임금님의 생각을 직접 사신들에게 전하고 중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경청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광해군 때의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실시한 사람이 되었고, 선조 시절 이순신이 모함을 당했을 때 앞장서서 이순신 구명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파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서인의 거두였던 율곡 이이가 동인이었던 이원익을 중요한 사간원 자리에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백성들에게 당파를 초월해서 존경받았던 그가 서 있었던 자리는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존경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네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냐?"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지금 너는 내가 원하는 자리에 서 있느냐, 아니면 네가 원하는 자리에 서 있느냐?" 오늘 우리에게 이 질문이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나는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리에 서 있는지 우리 자신의 삶의 현장을 돌아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변화산의 영광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를 거니셨습니다. 그리고 엿새가 지났습니다. 사랑을 한다면 십자가를 져야 됨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했으면 십자가 지는 삶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6일이 지났습니다. 6일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 세 명을 데리고 헤르몬 산 꼭대기로 올라가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예수님이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열두 명이나 있는데 왜 하필 이 세 명을 데리고 가셨을까요? 사도행전을 보면 이 세 분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각양각색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훗날 교회 지도자가 되실 분들을 따로 데리고 다닌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여기 이 변화산 사건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이 세 분을 따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의 뜻하신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꼭대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리가 읽은 2절 끝에 보면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형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3절에 보면 빛나고 아름다운 영광의 광채 가운데 계셨습니다. 세상에 빨래하는 사람이 더 이상 희게 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채가 그 가운데 임했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4절에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이미 천국에 가신 엘리야와 모세가 변형되신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산꼭대기입니까, 아니면 천국입니까? 이 자리는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세 명을 데리고 가셔서 헤르몬 산 꼭대기에서 천국의 모형을 잠깐 보여주셨습니다.

장차 너희가 천국에 오면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할 것이다. 너희 모습이 아름답게 변형될 것이고, 영광의 광채가 너희를 뒤덮을 것이고, 먼저 간 믿음의 조상들이 너희들과 함께 행복한 대화를 나눌 것이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이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1. 십자가를 진 분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거리가 생깁니다. 왜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계셨을까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위인이 있었을 텐데 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이셨을까요? 이 세 분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 분의 공통점 첫 번째가 십자가를 지신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모세도 그러하고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우선 모세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120년을 살았습니다. 40년, 40년, 40년으로 나누어 보면 초기 40년은 애굽 왕자로 보낸 40년입니다. 부유했습니다. 부족할 것이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중기 40년은 그가 자신의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살았습니다. 처가살이를 하며 살았습니다. 외로운 40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난이 가득한 세월은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40년, 80세 이후에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영광스럽기보다 고생스러웠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 40년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모세가 짊어지고 갔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모세의 십자가는 다름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나 민수기, 신명기를 통해서 살펴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항상 원망 불평입니다.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먹거리가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낮에는 더워 죽겠다고, 밤이면 추워 죽겠다고 원망했습니다. 심지어는 돌을 들고 모세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백성들을 자신의 십자가로 여기고 사람의 십자가를 지고 40년 동안 그들을 출애굽 시켜 가야만 했습니다.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 뜨거운 사막 길을 건너가면서 사람의 십자가를 온전히 짊어지고 갔던 사람, 그분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엘리야는 어떻습니까? 엘리야가 살았던 시절은 아합과 이세벨의 치세였습니다. 그들은 악한 왕이고 악한 왕비였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을 씨를 말리려 했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을 다 잡아 죽였습니다. 아직까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던 7,000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숨죽여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압제에 맞서서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갈멜 산에서 850대 1의 싸움을 벌였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십자가로 짊어지고 살아갔던 사람이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병든 자와 함께 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죄와 악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돌아가셔야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인 때문에 십자가 지고 이 땅에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예수님이나 다 십자가 지고 사셨던 분들입니다.

1-2. 영광은 나중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십자가는 졌지만 영광은 이 땅에서 누리지 못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지만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가나안 땅에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느보 산 꼭대기에서 저 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이 보이는데 느보 산 꼭대기에서 그는 생명의 끝을 맞이합니다. 심지어 무덤도 없습니다.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죽어서도 어느 누구 하나 그의 무덤에 꽃 한 송이 두지 못할 정도로 그는 이 땅에서 어떤 영광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엘리야는 어땠습니까? 그가 850대 1의 싸움 이후에 아합과 이세벨이 그 앞에 무릎 꿇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강퍅해졌습니다. 영광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역 이후에 그는 엘리사에게 그다음 바톤을 넘겨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불 말과 불 병거에 태워서 하늘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도 역시 무덤이 없습니다. 그도 역시 시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의 무덤에 어느 누구 하나 꽃 한 송이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고생을 했는데 영광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 엘리야였습니다. 예수님도 빈 무덤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육체를 입고 그대로 승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덤에도 시신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고난받으셨는데 영광을 누리지 못하셨습니다.

고난받고 영광을 누리지 못한 분들, 십자가의 고통은 겪었으나 영광을 누리지 못한 분들, 이 분들을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일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너희들이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이끌고 가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하다. 십자가의 고난은 필수적으로 받아야 되는데 그러나 영광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하는 영광을 걱정하지 마라. 이 땅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 땅을 떠나서 천국에 가면 보다시피 몸이 변형되고, 영광의 빛나는 광채가 우리를 둘러쌀 것이고,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대화하는 놀라운 은혜가 너희들에게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고난받아라. 염려하지 말고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 지라. 이 말씀이 우리 주님의 말씀이고 주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여기 세 분이 어떤 인생을 살았습니까? 사도행전 12장 1절과 2절을 보면 야고보의 순교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사도들 중에 첫 번째 순교자가 오늘 이 세 분 중에 한 분 야고보 사도였습니다. 야고보가 먼저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야고보가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의 피를 흘렸을 때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옛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헤르몬 산꼭대기에서 변형되신 모습이 기억났을 것입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우리와 예수님과 대화 나누었던 그 장면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 동역자 야고보가 순교의 피를 흘렸지만 지금 그 천국에서 엘리야와 모세, 예수님과 함께 만나서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칼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도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다가 십자가 지고 살아가다가 나중에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천국에서 그분들과 함께 기쁨과 영광의 잔치를 벌이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런 결심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실제로 베드로도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열심히 하나님의 양떼들을 돌보았습니다. 그 후에 그는 전승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습니다. 요한은 어떻습니까? 요한은 사도들 중에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오래 살았다고 고생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했고, 요한 1, 2, 3서와 서신을 기록했고, 밧모 섬에 유배당해서 요한계시록을 묵시 중에 기록했던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도 역시 십자가 지다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맡아서 십자가 지고 가야 할 이 세 분에게 영광을 먼저 보이시고 열심히 십자가 지고 이 땅에서 고난받고, 이 땅에서 영광을 취하지 않으면 하늘의 놀라운 영광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광받으려고 애쓰지 마라. 사람에게 높아지려고 노력하지 마라. 하늘의 영광이 너희들의 것이다.

2. 우리의 십자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의 삶의 현장을 돌아보셔야 됩니다.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가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냥 나는 십자가는 옆에 밀쳐 두고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처럼 사람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셔야만 됩니다. 십자가 중에 사람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교회학교 교사들 어린아이들을 십자가로 지고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힘이 듭니다. 몹시 무겁습니다. 목사는 강단에서 설교하니까 누구나 다 알아주지만 그러나 교회학교 교사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지고 있는데 영광은 얻지 못합니다. 구역장들 열심히 구역 식구들을 섬기고 돌봐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어렵기만 합니다. 그런데 모세처럼 그 사람 십자가 지고 열심히 걸어가고 달려간다면 영광의 자리가 훗날 우리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엘리야는 시대의 아픔을 짊어지고 우상에게 경배하고 무릎 꿇지 않고 그 십자가 지고 열심히 살아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우상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까? 물질의 우상, 사람의 우상, 수많은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살아간 엘리야처럼 사셨다면, 우리 일생 이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며 온몸으로 그 시대의 아픔을 이겨내며 살아오셨다면 천국에서 영광의 면류관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자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하시다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찢기어 내어주신 그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면 우리도 천국의 영광이 우리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세 가지 십자가가 우리에게 한두 가지씩 다 있어야 됩니다. 십자가 없이 살아가는 것은 신앙생활 거꾸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라 하신 말씀이 우리 마음에 깊은 울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1. 베드로의 실수

예수님께서 이런 의도를 가지고 천국의 영광을 잠깐 보여주셨는데 이에 반응하는 베드로의 말을 한번 들어봅시다. 5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의 말에는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적극적으로 묻어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는 영광의 자리는 탐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지기 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이죠. 우리 아이들 중에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다면 대학을 미리 견학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네가 열심히 공부하면 이 대학이 너의 학교가 될 것이야. 그런데 아이가 집으로 돌아갈 생각하지 않고 "저 이제 여기서 이제부터 여기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닙니까? 돌아가서 공부의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공부해야 이 대학에 올 건데 돌아가지 않고 여기 있겠다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산을 내려가서 사명의 십자가를 감당하고 짊어지고, 영광은 거부하고, 예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이 영광의 자리에 올 것인데 내려가지 않고 나는 영광만 누리겠다고 하는 잘못된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모습이 오늘 내 모습 아닙니까? 영광은 얻고 싶은데, 영광의 자리는 탐이 나는데, 십자가는 지고 싶지 않습니다. 환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다들 내 십자가 지고 따라가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영광은 탐납니다. 오늘 베드로의 이 뻔뻔한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닌지, 오늘 우리의 완악한 모습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2-2. 주께 먼저 물으라

또한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죠. "초막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주를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짓겠습니다." 이 말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을 지으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지 원하시지 않는지 언제 물어봤습니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초막을 짓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열심히 섬기고 봉사한다고 했는데 주님께 물어보셨습니까? 주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이 시대에, 오늘 우리 교회에, 내년에 당장 필요한 이 자리에 주께서 나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린 주님께 묻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수십 년 동안 감당해 놓고 주께서 원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원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모습이고,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신앙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수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주님께 여쭤봐야 됩니다. 주님 나를 어떻게 쓰시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내가 어떤 사명으로 십자가 지고 감당하고 걸어갈까요? 진지하게 물어보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원하는 것을 여쭤봐야 됩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생략했습니다.

3. 산 아래로 내려가자

이런 베드로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절을 보십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네가 원하는 대로 초막 짓지 말고 우선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의 말을 듣고, 주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주께서 진실로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귀를 기울여 들어야 그다음 행동이 결정될 것 아니냐? 정말 주님이 뭘 원하시는지 듣기나 했느냐? 이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우리 주님은 아무 말씀 하지 않고 행동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세 명을 데리고 산을 내려가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산 아래 내려가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산 아래에 십자가가 있다. 산 위에는 영광이 있었지만 산 아래에는 십자가가 있으니 십자가 지러 내려가자. 우리가 여기서 본 엘리야도 십자가 지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 우리가 여기서 본 모세도 사명의 십자가를 감당하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 나도 남아 있는 십자가를 져야 하고 너희들도 교회를 위한 십자가를 져야 하니 이제 내려가자. 십자가 지고 내려가자. 이 말씀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말없이 주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지러 영광의 자리가 아닌 고난의 자리로 내려가자 말씀하십니다. 주님 뒤따라 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뒤따라 가셔서 주께서 우리에게 "너는 이 십자가를 져라, 너는 이 십자가를 져라" 말씀하시면 두말없이 아멘 하시고, 주께서 맡기신 사명의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영광은 거부하시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얻을 모든 영광은 이 사명의 십자가가 끝나는 날 천국에서 우리의 모습이 변형되고, 빛나고 아름다운 광채로 우리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하는 놀라운 자리에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 영광을 사모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여기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영광을 사모하면서 십자가는 거부했습니다. 주님께 묻지도 않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자아실현을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으로 하려고 했던 미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사명의 십자가를 위해서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따라 내려가는 이 의로운 백성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를 위한 십자가, 이 사회를 위한 십자가, 어리고 어린 영혼들을 위한 십자가, 그 사람의 십자가까지 지고 걸어가는 믿음의 백성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원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고, 그런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서 훗날 천국에서 모든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만나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믿음의 백성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