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강 / 산 아래에서 (9:14-29)

산 아래에서 (막 9:14-29)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왕은 누구일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기원전 356년에 태어나 기원전 323년까지 33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토는 당대 어느 누구보다 훨씬 넓었고, 그는 그 광대한 땅을 지배했던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마게도냐의 필립보스 왕이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아들이 열세 살 되었을 때 당대 최고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에게 영웅들의 서사시인 일리아드를 읽어 주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일리아드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읽고 또 읽으며 탐독했고, 훗날 전쟁 때에도 항상 일리아드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잠자리에 들 때도 머리맡에 두고 읽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에게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정치학이었습니다. 그가 정치학을 가르칠 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한 가지 예를 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피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피리가 있는데 가장 좋은 피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 사람들은 공평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피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 그것이 바로 정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이 알렉산더의 가슴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평생 그는 이 말을 지침으로 삼고 자신의 철학으로 삼아 살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했습니다. 이 세상 영토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가장 위대하고 뛰어나고 지성이 있고 용맹스러운 자가 누구인가? 내가 뛰어나기 때문에 나는 이 넓은 땅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를 복속시키는 이소스 전투에서 당시 대제국이었던 페르시아를 격파했습니다. 그리고 인도까지 나아갔습니다. 돌아와서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다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제는 그가 죽은 후였습니다. 그의 사후에 평소 그의 지론대로 '강한 자가 권력을 가진다'는 원칙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과 장군들이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오랫동안 싸웠습니다. 이합집산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가 셀레우코스 왕국과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 마게도냐 왕국으로 그의 거대한 제국이 삼분되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위대한 영웅이 죽은 후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나라도 그렇고 기업도, 가정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는 위대한 영웅이고 위대한 거인이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 이후에 일어나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이 우리 인간 군상의 모습들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잠시 산 위에 올라가셨는데 산 아래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이 땅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산 아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길인지 함께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헤르몬 산 꼭대기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변형되신 예수님께서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천국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모습에 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산을 내려가기 싫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십자가 지기 싫어하는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산을 내려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없이 행동으로 산을 내려가십니다. 제자들을 앞장 세우시고 우리는 십자가 지러 내려가야 한다고 하시며 산을 내려오셨습니다.

1. 말씀의 권위 상실

문제는 산 아래 세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꼭대기에 가 계셨을 때 산 아래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요? 14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산 아래에는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변론하다"라는 말은 적대감을 가지고 토론하다는 뜻입니다.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산 아래에 계셨을 때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떡하니 버티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선생님은 왜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한마디로 그들의 도발을 정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장로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왜 유대인의 전통,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느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를 더럽게 할 수 없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한마디가 그들의 도발을 단번에 잠재우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때였습니다. 서기관들이 와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말로 윽박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들의 말을 당해내는 재간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당시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 가장 권위 있는 능력의 말씀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도발에 한마디로 대응하지 못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빙빙 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는 소모적인 논쟁이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산 위에 올라가시고 난 이후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종교 권력자들입니다. 나이도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연소하고 나이도 어리고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작부터 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명예나 물질이 권위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를 가지고, 그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제자들은 권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고 그 당시로서는 배우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계셨고, 이 말씀이 예수님의 중심을 잡고 있으니, 말씀을 선포하실 때마다 어떤 사람의 도발에도 예수님은 기죽지 않으시고 말씀대로 살아가고 말씀대로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도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과 수많은 소모적인 논쟁이 교회 안팎을 휩싸고 있는데, 말씀이 없으면 이리저리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큰소리를 내면 우리는 이 말이 옳은가 보다 하고 그쪽으로 생각합니다. 물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주장을 하면 말씀이 없으면 그 사람 말에 끌려가게 됩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주장하면 말씀이 없으면 그 경험을 따라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연약한 산 아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3절과 24절 말씀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식하고 어리석은 변론을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주의 종은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는 자입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차근차근 가르쳐야 합니다.

그 당시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원래가 소심하고 마음이 약하고 나이도 어렸습니다.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끌려 다녔습니다. 오죽했으면 디모데가 위장병이 났겠습니까? 그때 바울이 전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디더라도 차근차근 가르쳐라.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되고 뼈대를 이루게 되면 교회는 소모적인 논쟁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이 시대 교회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넘쳐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까? 그것은 말씀이 뼈대를 이루고 중심을 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산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권력과 사람들의 경험과 세속적 욕망에 휩싸여 흘러가는데, 그런데 거기서 우리의 중심축을 잡아주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산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2. 기도의 부재

산 아래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 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8절 말씀입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나이다.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산 아래 세상, 귀신이 사람을 제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한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그 아버지가 데리고 온 아들은 귀신 들린 아들이었습니다.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고, 넘어지면서 거품을 물고 오랫동안 병들어 힘들어하던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들을 데리고 나왔는데 제자들이 고치지를 못했습니다. 산 아래 세상, 귀신의 능력이 사람을 제압하고 제어하고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진단하셨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예수님은 이 세대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 없는 모습의 구체적인 현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29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믿음이 없는 세대란 곧 기도하지 않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나왔을 때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경험으로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전에 둘씩 짝 지어서 파송하셨을 때 그때 권능을 가졌었습니다. 병든 자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았습니다. 그 경험으로 지금 해보려고 하니 잘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능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치 오늘 이 세대가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하지 않는 세대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학력이 낮았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 없었습니다. 학력이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무능과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교회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를 잘 키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키울 수 있을까요?"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한 세대 전 우리 부모님들은 이 관문 저 관문이 있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항상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길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학력이 높아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대학을 다닙니다. 자녀들의 학력이 높아졌습니다. 사람들은 다 외국어 한두 가지씩은 거의 다 하고 있습니다. 해외 여행도 많이 다녀 왔습니다. 물건을 구매하는 것도 해외 직구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자신만의 플랜이 있습니다. 플랜 A, 플랜 B, 플랜 C가 다 나와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이렇게 해결하겠다고 이미 마음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험이 우리의 기도의 자리를 대신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렇게 많이 배우고 물질적으로도 풍요한데 우리의 마음은 자꾸만 공허해집니다. 황폐해집니다.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그 마음을 위로하고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다른 것을 탐닉합니다. 술에 빠져 갑니다. 음란과 정욕의 노예가 됩니다. 일반인들도 마약에 손을 뻗칩니다. 우리 자녀들, 오늘 이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다 중독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귀신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시대, 음란과 중독과 술과 여러 가지 세상의 것들이 더러운 귀신이 되어서 사람을 제어하는 시대, 믿음이 없는 세대, 기도하지 않는 세대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악한 세대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대를 보시면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세대여, 기도하지 않고 있구나."

2-1. 기도의 본질

기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내 마음의 소원을 아뢰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실 기도를 제대로 하면 나를 발견합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허물 많고 죄가 많은지, 난 얼마나 무력한 죄인인지 발견합니다.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나 자신의 연약과 무력을 발견합니다.

사도 바울이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장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3년간 기도했습니다. 기도한 이후에 그는 자신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만물의 찌꺼기 같은 존재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만물의 찌꺼기 같은 존재다."

2-2. 기도의 능력

찌꺼기 같은 존재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워 주셨구나.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기도하니 그의 마음은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성령이 마음을 지배하시고 성령께서 마음에 들어오시면 이제는 내 경험과 내 능력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일하십니다.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응답받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 속에서 실라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분명히 두 사람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삼각주가 생겼습니다. 바울 한 사람, 실라 두 사람이 기도했는데 성령께서 함께하셨습니다. 기도의 삼각주가 이루어지니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감옥에서 수갑이 풀어졌습니다. 발을 묶고 있던 차꼬가 열렸습니다. 옥터가 흔들리더니 그대들을 제한하고 있던 옥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기도하면 우리를 붙들고 있는 중독의 힘에서 우리가 해방될 것입니다. 어떤 중독이 나를 붙들고 나를 제어하고, 더러운 귀신이 나로 하여금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고 사리판단 분별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끌고 다닌다 하더라도, 믿음이 있는 세대가 간절하게 엎드려 기도하면 우리는 중독에서부터 자유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뇌이어 계십니까? 우리 자녀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무엇 때문에 중독되어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기도하셔야 됩니다. 산 아래 이 세상, 예수께서 육체로 계시지 않는 이 세상,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주님께 간구하며 엎드려 기도해서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기도하시면 성령께서 우리의 죄짐을 벗겨 주시고, 기도하면 우리를 붙들고 있는 어떤 악령의 세력에서부터도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산 아래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기도라는 사실, 이 사실을 분명히 붙들고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3. 믿음의 회복

예수께서 계시지 않았던 산 아래에 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22절 말씀입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 아버지의 말투와 뉘앙스를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느낌입니까?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도와 주옵소서." 이 말은 하실 수 있거든 하시고, 못하시거든 안 하셔도 됩니다라는 뜻입니다. 간절함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17절 18절에 보면 이 아버지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호칭부터가 이미 간절함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살펴본 야이로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어찌하든지 딸을 살리고자 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어릴 때부터 이 아들은 불에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고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들을 고치기 위해서 안 해본 것이 있겠습니까?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가고 좋다는 약은 다 먹어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고침 받기 위해서 나왔는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산 위에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아들을 보였는데 제자들이 아들을 데리고 아무리 자신의 경험으로 노력해 봐야 꼼짝없이 아들은 그대로였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패배와 절망, 낙심이 냉소로까지 번져갔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려왔을 때 주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하시고 못하시거든 안 하셔도 됩니다."

사람들은 여러 번 실패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낙담합니다. 패배감과 절망감에 빠집니다. 문제는 이 패배와 절망감이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번져갑니다. 다른 것으로 번져갑니다.

3-1. 패배의 확산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만나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병자인 채로 있었습니다. 그에게 예수께서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당연히 낫고 싶겠지요. 38년 동안 병자였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그는 사실 낫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패배감과 낙심과 절망으로 자신을 혐오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가, 이제는 시간이 지나고 지날수록 주변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 불평과 원망은 분노가 되어서 마음에 쌓일 것입니다. 그 분노는 언젠가는 폭발합니다. 자신도 죽이고 상대방도 괴롭게 됩니다.

이런 일이 오늘 이 사회의 문제 아닙니까? 사람들은 여러 번 실패하고 넘어지다 보면 처음에는 패배와 무력감에 시달리다가, 조금 더 지나면 원망합니다. 부모를 원망합니다. "나를 이렇게 낳았다고, 가난한 집에서 내가 자라서 이렇게 됐다고." 사회를 원망합니다. "이 사회 구조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나라를 원망합니다. 세상을 원망합니다. 분노가 마음에 쌓여 갑니다. 그러다가 폭발합니다. 온 사회가 그 폭발한 분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사회가 이런 사회 병리적 문제에 사로잡혀 빠져 있습니다.

3-2. 믿음의 선언

예수님께서 이 병든 아버지를 보시고 얼마나 긍휼히 여기셨는지,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지. 문제는 이 아들의 보이는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내면이 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할 수 있거든 고쳐 주십시오. 못하시거든 하지 마십시오." 이런 패배적인 말에 우리도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벼락같은 말씀으로, 추상같은 어조로 정신이 번쩍 들게 말씀하십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너, 그런 패배의식에서 일어나라. 몇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세상과 사회를 원망한다면 너는 믿음 없는 자임에 틀림없다. 네 아들의 병이 문제가 아니라 너의 병이 깊은 것이 문제다. 너의 병의 문제를 고치고 도전해야 된다."

다행히도 이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다행스럽게 이 아버지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이 문제입니다. 나부터 고쳐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 없음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에게 믿음을 더해 주시고, 아들의 병도 고쳐 주셨습니다.

결론: 산 아래 세상의 승리

여러분, 실패했다고 하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넘어져서 무릎이 깨어졌다고, 이제 낙심하고 절망해서 여전히 일어설 수 없다고 죽은 척하고 넘어져 있다면, 다시 한번 용기 내고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함이 없느니라."

우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산 아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다시 한번 힘내고 도전하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산 아래 세상은 절대적 말씀의 권위가 사라진 세상입니다. 한 손으로는 말씀을 붙잡고, "믿음 없는 세대, 기도하지 않는 세대"라 말씀하셨으니 한 손으로는 기도를 붙잡고, 여러 번 실패해도 다시 한번 엎드리고 도전하고 나아가서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