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자가 되려면 (막 9:30-37)
장기려 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그분은 1911년 평안도 용천에서 출생하셨고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본 유학을 가서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일본에 남아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대형 병원에 취업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행보는 달랐습니다. 평양으로 귀국합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이 세운 기홀병원에서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환자들을 돌보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는데 둘째 아들 하나만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옵니다. 이제 삼팔선이 가로막히고 휴전선이 생기고 나서 더 이상 돌아갈 수가 없게 되어 부산에 정착하게 됩니다. 1951년 부산의 어느 한 교회의 창고를 빌려서 무료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판자 하나 깔아두고 그 위에서 환자를 돌보고 수술을 했지만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환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자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서 큰 천막 세 개를 빌렸습니다. 큰 천막 세 개를 빌려서 하나는 진료실, 하나는 수술실, 하나는 입원실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의 이름을 복음병원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병원이 지금의 고신대 복음병원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분은 환자들이 돈이 없어서 진료 못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열심히 정성껏 진료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사회가 발전하면서 더 이상 무료 진료를 할 수 없게 되자 1968년에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이 마음껏 진료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것입니다.
그분을 나타내는 수많은 일화들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부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농번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퇴원을 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퇴원할 길이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장기려 박사에게 부탁을 합니다. "박사님, 제가 어떻게 하면 퇴원할 수 있을까요? 저는 퇴원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만약 여기서 병원을 나가지 못하면 올해 농사는 망치고 맙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때 박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환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밤중에 병원 뒷문을 열어둘 테니 그냥 가시면 됩니다." 그분은 굉장히 낭만적인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환자들을 정성껏 간호하고 돈이 없는 분들을 마음 다해 진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그분에게 차비까지 주어서 돌아가게 하셨다는 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평생 동안 변변한 집 한 칸 없었습니다. 병원 옥상에다가 자그마한 거처를 마련하고 거기를 사택으로 삼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분은 평생 동안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었지만 그분이 남긴 훌륭한 섬김의 자리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슴속을 적시는 아름다운 분으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하게 되었는가 돌아보면 그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넘치게 받았던 분입니다.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것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 전하고 나누는 것이 무엇 그리 대단한가"였습니다. 그분은 부산 산정현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부산 산정현교회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후신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 정신과 이승훈 장로님, 조만식 장로님의 나라 사랑 정신이 살아 있는 교회를 섬겼던 훌륭한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평생 동안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대로 전하는 일에, 배운 대로 행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던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장기려 박사님을 비롯해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 섬김의 원형을 발견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섬김의 원형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섬기셨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예수님 닮아서 세상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섬김의 자리에 서 있기를 원합니다.
1. 섬김의 시작
우선 예수님의 섬김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오랫동안 사셨습니다. 원래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님께서 호적하러 베들레헴에 가셨다가 그만 그곳에서 아이를 출산합니다. 그곳에서 태어나셨지만 성장하기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30년 동안 그곳에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3년 중에 대부분도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갈릴리는 호수를 중심으로 둘러싼 마을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호수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어부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를 기준으로 유대인들의 공동체와 이방인들의 공동체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그냥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그곳은 가난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병자들도 많았습니다. 제때 치료받지 못해서 치료 시기를 놓친 병자들, 각색 병자들, 나병환자들, 중풍병자들,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주님은 그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곳에는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귀신 들림을 다 만져 주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갈릴리와 대척점에 서 있는 한 도시가 있는데 유대 땅 예루살렘입니다. 그곳은 돈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정치 권력, 종교 권력, 일 년에 세 번씩 순례자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곳에 계시지 않고 갈릴리에서 사셨을까요? 예수님이 갈릴리에 사셨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 많이 있는 자들은 예수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돈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고 권력이 그들의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못 가진 자,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30년 이상을 사실 때는 그들은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고 돌아가신 뒤에 부활하시고 나서는 하나님께서 그 복된 생명자를 이 땅에 보내 주셨구나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렇게 임재하셨구나 그걸 깨닫고 그들은 그때부터 감격과 은혜 가운데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섬김의 시작은 거창한 사역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삶으로써 섬김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잘 사는 것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교회들은 선교사님을 많은 나라에 파송합니다. 선교사로서 해야 될 가장 첫 번째 일은 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가장 우선되는 것이지 사역은 그다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들은 여러 선교사들에게 사역을 요구합니다. 교회에서 선교비를 이만큼 보내니 많은 사역을 만들어 내라, 사역 보고를 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사역보다 더 앞선 것은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훌륭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선교사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삶을 통해 보여주어야 마음이 열리고 그다음에 복음 전파가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우리의 일터와 가정과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섬김의 첫째입니다. 거창한 일을 하지 않아도 내가 예수 믿는 자로서 제대로 살기만 해도 이것이 섬기는 일임을 분명히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2. 섬김의 절정
두 번째, 우리 예수님의 섬김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 일은 주님 한 분 밖에 하실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죄 없는 예수님의 피가 흘러야 죄 지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가 구속받고 사망에서 나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죄 없는 분이 돌아가셔야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죽음의 고통에서 신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 가운데 최고의 섬김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위대한 섬김이 오늘 우리를 구원하게 했고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천국 백성이 되어서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목숨을 내어 놓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자아를 죽이는 생활은 하셔야 됩니다. 내 성격과 내 성질과 나의 기질과 내 욕망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을 통해서 내가 죽으면 죽을수록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드러나는 생활, 예수님이 나타나는 생활을 하셔야 우리도 예수 닮은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2-1. 섬김의 방향
여기까지 보면 우리는 한 가지 방향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방향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셨습니다. 먼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도 그 당시 로마의 권력 가운데 오시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나라에 오셨습니다. 식민지 팔레스타인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식민지 중에도 사람들과 돈이 모이는 예루살렘에 오시지 않고 가난한 자들이 있는 갈릴리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식민지로, 식민지의 수도 아닌 가장 가난한 자들이 사는 곳으로, 그것도 부족해서 예수님은 죽음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셔서 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방향은 전부 높고 높은 곳에서 가장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2-2. 제자들의 서열 다툼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곳에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높아지려고 더 높이 뛰려고 도약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서로 다툽니다. 더 높은 곳을 지향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도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면 오늘 말씀 33절과 34절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제자들은 서로 서열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크냐고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 세 명을 예수님이 따로 데리고 헤르몬 산꼭대기에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려가셨습니다. 선택받은 세 사람은 선민의식이 있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아홉 사람은 패배감과 박탈감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봐라, 예수님이 우리를 택해 있지 않느냐, 우리가 더 높다." "그렇지 않다." 서로 길 가면서 누가 크냐 하고 다투었습니다. 그들끼리 서열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서열 다툼, 낯설지 않습니까? 오늘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사회는 당연히 서열화되어 있습니다. 연봉이 곧 그 사람의 가치입니다. 그 사람의 직급이 그 사람의 가치를 나타냅니다. 후배가 선배보다 먼저 승급하면 선배는 고민합니다. 내가 옷을 벗어야 하나, 그만두라는 뜻인가. 세상은 그렇게 뒷덜미를 잡아서 끌어내리고 짓밟고 올라가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언젠가는 도태되는 사회화된 세상 가운데 우리가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물어뜯고 그리고 물리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 가운데 우리가 지금 모두 간신히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공동체에서 자기들끼리 누가 크냐 하고 다투고 있습니다. 이들은 장소만 옮겼을 뿐 그 당시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자들이 다투는 그 다툼의 한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장소만 옮겼을 뿐 그 당시 로마에서 권력자들이 다투는 그 다툼의 현장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교회 공동체는 적어도 이 공동체 안에서는 서열이 존재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이 교회 공동체를 보면 과연 서열이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믿는 친구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넌 언제 장로 따냐, 넌 언제 권사 따냐." 직분을 마치 계급처럼 생각합니다. 근데 이렇게 만든 것이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문제입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직분이 마치 계급과 서열처럼 그들에게 비쳐지는 것입니다.
장로가 되기 위해서 금품을 살포하시는 분들, 전화를 돌려서 나를 뽑아 달라고 말씀하시는 분들, 그 무엇이 대단한 것이라고 그렇게 직분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분들, 그런 공동체가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가 되었다면 이건 세상과 다름없는 곳이 된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장로나 목사나 권사나 안수집사나, 교회 조직은 큰 머슴입니다. 가장 많이 섬기는 모습, 가장 낮은 모습, 자신의 일을 뒤로 하고 자신의 직업을 뒤로 하고 자신의 삶의 자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우선으로 섬기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성도들이 불러서 심부름 시켜도 "네, 알겠습니다. 제가 그 심부름 하겠습니다" 결단하고 그렇게 섬긴 자들, 그들이 바로 직분자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군림하는 자가 직분자가 아니고 남의 위에 높이 서서 그 자리에서 명령하는 자가 직분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 예수님처럼 더 낮게 더 낮게 내려가서 섬기는 자, 그 자가 바로 직분자입니다. 머슴 중에 가장 큰 머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 하고 자리 다툼을 하고 있다면 이건 교회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3. 말석의 자리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끝자리에 서라, 누구든지 끝자리에 서는 자가 가장 위대한 자이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말석의 자리를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말석 경험과 말석 체험을 한 자라야 하나님이 때가 되면 그를 들어 올려서 가장 높은 자리에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우리가 성경을 눈여겨 살펴보면 말석 체험을 한 자들을 하나님이 때가 되면 들어서 하나님 가장 기뻐하시는 훌륭한 자리에 세우심을 알 수 있습니다.
3-1. 모세의 말석 체험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 초기 40년 인생은 이집트 왕자였습니다. 탑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왕가 계승 서열에 손가락에 들 만큼의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왕자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를 뽑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하는 영도자로 그를 세우지 않습니다. 최고의 영광의 자리, 나이도 40대 가장 젊은 나이에 그를 세우지 않습니다.
그가 미디안 광야로 도피했습니다. 장인의 양을 칩니다. 염소를 먹이고 소를 돌봅니다. 짐승의 오물로 온몸이 뒤집어씌어 줍니다. 40년 동안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1~2년 처가살이가 아니라 40년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석양의 말석으로 내려갑니다. 가장 높은 탑의 자리에 있다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그 40년의 세월이 채워지고 나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제 됐다. 40년의 가장 밑바닥 세월을 경험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는 영도자로 삼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그가 40 언저리에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리더로 세웠다면 아마 일주일도 못 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결별했을 것입니다.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석의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은 그들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가 40년 동안 밑바닥 세월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수 있는 영도자가 된 것입니다. 말석 체험은 이래서 중요합니다.
3-2. 다윗의 말석 체험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골리앗을 죽인 이후에 승승장구했습니다. 사울의 군대 장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그를 기름 부어서 왕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그를 다시 광야로 내몰아가십니다. 광야에서 아둘람 굴에서 400명을 만납니다. 그 400명이 불어서 600명이 됩니다. 그들은 억울한 자, 원통한 자, 빚이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원통한 백성들을 모아서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과 중고가 어떤 것인지를 십수 년 동안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그를 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만약 그가 승승장구할 때 군대 장관의 자리에서 왕이 되었다면 그는 똑같이 사울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말석 자리를 경험했기에 그때 하나님은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의 정치하시는 분들에게서 정치적 감수성이 없다는 걸 발견합니다. 말이나 행동이, 어떻게 저렇게 국민들이 원하는 것과 반대로 말하고 행동할까?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말석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고통받는 자리에서 함께 섬겨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국민들의 마음과 진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 왔다가 가는 것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높은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자리를 경험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섬김의 목적
예수님께서 그다음 한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6절과 37절을 보십시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어린아이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자기중심적이고 막무가내입니다. 그런 어린아이를 내가 영접하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맞춰야 됩니다. 그들의 언어로 말해야 됩니다. 같이 놀아줘야 됩니다. 몸에 얼룩이 묻을 것을 걱정하면 곤란합니다. 그냥 뒹굴어야 됩니다. 그래야 어린아이를 마음껏 영접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알고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영접하셨습니까? 갈릴리에 들어가서 사시면서 눈높이를 낮추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가난해 주셨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설교를 편하게 쉽게 하셨습니다. 어려운 말로 알아듣지 못하게 말씀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배우지 못한 자도 충분히 알아듣도록 쉽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버린 자들,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뒹굴었습니다.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을 섬긴 방법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섬기고 있습니까?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과 함께 교통하고 함께 뒹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섬기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나의 의를 나타내려 함이 아닙니다. 그 섬김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했고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마치 율법이 없는 자처럼 그들을 섬겼고 약한 자들에게는 가장 약한 자에게서 그들을 섬겼다."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의 섬김의 한 가지 목적,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그 위대한 섬김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아름답고 위대한 섬김이 그리스도를 전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귀한 섬김으로 아름답게 열매 맺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처럼 섬기기를 원합니다. 갈릴리에 가서 살아가셨고 갈릴리에서 그들과 함께 뒹구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물로 씻기셨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섬겼던 예수님의 섬김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 논쟁하며 끝없이 높아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말석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가장 낮은 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