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다 (막 10:1)
우리 조선시대 오백 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는 누구였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결론으로 가면 결국 한 사람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바로 장영실입니다. 장영실은 워낙 유명한 발명가이고 워낙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는 혼천의를 만들었고,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만들었으며, 물의 높낮이를 알 수 있는 수표 또한 만들었습니다. 그분의 발명이 특별히 대단한 이유는 농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별자리를 관측해서 계절의 변화를 관찰하고, 시간을 통해서 정확한 농사짓는 때를 특정하고, 청계천과 한강의 물 높이를 재어서 홍수를 미리 예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놀라운 발명품들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그분의 아버지는 원나라에서 귀화한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관기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그 당시 법대로 어머니가 관기였기 때문에 그도 태어나면서 관노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가까운 동래현에 관노였습니다. 그런데 워낙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출중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잘 만들고 잘 고치고, 그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깨끗해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고,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그 소문을 듣고 그를 데려다가 왕실에서 궁중 기술자로 키웠습니다. 그에게 관직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궁중 기술자로 왕실의 필요를 따라서 일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 어린 세종은 어릴 때부터 장영실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아마 마음에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나중에 왕이 되면 이 사람을 더 높은 관직에 올려서 잘 활용해야 되겠다.' 실제로 그가 왕이 되자 그에게 벼슬을 하사합니다. 정오품 상호군 자리를 내려서 면천을 시켜 주었습니다. 신하들의 반대가 극렬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 극렬한 반대를 뚫고 그를 면천시켜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십 년 동안 장영실은 종횡무진 활약했습니다. 그 당시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과학 기술에 있어서는 뒤쳐지지 않을 만큼 위대한 발명가이고 과학 대국을 이루는 데 초석을 놓은 인물이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종이 인복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런 시절에 유독 대단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글 창제에 기여한 집현전 학사들, 그리고 사군육진을 개척한 김종서와 최윤덕 장군, 남쪽에서 왜구를 토벌한 이종무 장군, 과학기술에는 장영실, 그리고 정치에는 황희와 맹사성 같은 재상들, 이분들이 한 시대에 풍미했기 때문에 아마 세종은 기라성 같은 분들의 도움을 힘입어서 땅 짚고 헤엄치기 하듯이 정치를 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종이 다른 왕들과 차별화되는 것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왕들과 세종의 가장 큰 차이가 있는데, 다른 왕들은 왕과 백성 사이를 철저하게 선을 그어 놓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이 왕을 위해서 충구라면 충, 신이라면 신으로 해야 될 정도로 헌신적으로 왕을 섬겨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름지기 그것이 백성의 태도와 백성의 존재 목적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달랐습니다. 선을 넘어 들어갔습니다. 백성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종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를 애민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한글을 창제해서 그들이 이용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었고,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장영실을 면천시켜서까지라도 그에게 많은 발명을 통해서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려고 했고,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북쪽의 오랑캐들의 침입을 막아 내도록 여러 장군들을 동원해서 사군육진을 개척했습니다. 그렇게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좋은 정치인들을 등용해서 훌륭한 정치를 펼쳐 나갔던 것입니다.
그가 선을 넘지 않았더라면, 백성을 향한 임금의 사랑의 선을 넘어 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런 위대한 인물들이 한 시대에 함께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조선시대 넘쳐나는 인물들이 많았는데 다른 왕들은 선을 넘어서 백성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재를 발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선을 넘으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경계, 가장 두터운 선을 넘어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을 넘어 이 땅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보내고 맞이하면서 나는 과연 내가 정해 놓은 선 안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나도 모르게 금을 긋고 선을 긋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예수님처럼 선을 넘어 가서 위대한 복음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기를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선을 넘어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9장에서는 팔레스타인 북쪽 지역을 다니셨습니다. 헤르몬 산 꼭대기와 가이사랴 빌립보, 그리고 갈릴리 가버나움까지를 다니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북쪽을 지나서 남쪽 유대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라"(막 10:1)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유대 지경은 팔레스타인 남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 요단강 건너편은 요단강 오른쪽 즉 동쪽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강 동쪽 지역으로 가셨는데 이 지역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베뢰아 지역입니다. 베뢰아 지역은 구약 시대에 보면 모압 사람들이 살던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모세가 신명기의 그 설교를 하셨던 것이 바로 이 베뢰아 곧 모압 평지였고,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느보 산이 있는 곳이 이곳 베뢰아 모압 지경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룻의 고향도 역시 모압 이방 땅이었습니다.
예수님 시절 신약 시대에는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곳이었고, 과거 구약 시절부터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라서 예수님 시절에도 이방인들이 그곳에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가난한 자들, 소수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 그곳이 바로 베뢰아 곧 요단 동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자기 집 드나들듯이 자주 다니셨습니다.
그 당시 법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유대인들에게 금기시되는 지역이 있었는데, 첫째는 사마리아이고 둘째는 이방인 거주 지역이고 셋째는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였습니다. 사마리아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그렇습니다.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멸망당했는데 그때 앗시리아의 군대가 그곳을 주둔합니다. 그때부터 혼혈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 지역은 더럽혀진 땅이라 해서 사마리아 땅으로는 동행하지도 않고 가지도 않았습니다. 북쪽 사람들이 남쪽으로 올 때나 남쪽 사람들이 북쪽으로 갈 때나 사마리아는 피해 다녔습니다. 이방인 지역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는 전염의 위험 때문에 두려워서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곳을 자유롭게 다니셨습니다. 사마리아로 다니시고 이방인 거주지역도 자유롭게 다니시고 나병 환자 집단 거주지도 자유롭게 활보하셨습니다.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곳에서 식사하시고 교제하시고 함께 떡을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주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금기시하고 사람들은 그토록 꺼려 했던 곳을 예수님은 자유롭게 다니신 이유가 원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부터 그런 목적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예수님은 원래 지극히 높은 곳에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선을 넘어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분이 인간의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큰 선을 넘어 오셨으니 유대인 지역이면 어떻고 이방인 지역이면 어떻겠습니까? 사마리아도, 나병 환자들이 사는 집단 거주지도 주님은 자유롭게 다니셨습니다. 원래 주님은 선을 넘기로 작정하고 이 땅에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 사람들이 그어 놓은 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을 넘어 다니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그토록 터부시하고 금기시하던 이 선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넘어 다니신 이유는 단 한 가지 사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유롭게 삼 년 동안 선을 넘어 다니셨습니다. 인간들이 그어놓은 선, 그 선을 넘어 가셔야만 구원의 대장정이 완성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선을 넘어 구원을 위해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선을 넘어 가셨습니다.
2-1. 유대인과 이방인
사람들이 그어놓은 선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선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나라도 잃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자존심은 굉장히 대단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 선민이라는 그릇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대했습니다. 이방인들을 마치 짐승처럼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구별이 아무 의미 없다 하시며 주님은 이방인 거주 지역을 자유롭게 다니시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문 것을 에베소서 2장 13절에서 14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
원래 가운데 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두터운 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의 피로, 자신의 육체가 허물어지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이 벽이 온전히 무너지고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바울이 뒤를 이어서 복음의 세계화에 일조합니다. 바울도 이방인 지역만 찾아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시면서 "이 사람 바울은 이방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을 만큼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과 구별을 하나님은 한꺼번에 정리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도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바울이 아니었더라면, 바울의 뒤를 이어서 일어났던 수많은 선교사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이 선을 넘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는 복음이 전파될 수 없었습니다.
백여 년 전 이 땅은 암흑천지였습니다. 가난한 나라, 고요한 은자의 나라, 은둔의 나라,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나라가 이 나라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정신으로, 바울의 복음 전파의 정신으로 일어난 많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선을 넘어서 이 땅에 왔습니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사람들은 붙잡고 말렸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바울을 따라 모두가 선을 넘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학교를 세워서 문맹을 해결했습니다. 병원을 세워서 우리를 고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선을 넘은 사람들의 그 수고 덕분에, 그들의 헌신과 눈물과 피땀 덕분에, 최초의 선을 넘어 오신 예수님의 선 넘어 오신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어찌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2-2. 남자와 여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또 선을 넘어 가신 것은 남자와 여자의 선을 넘어 가셨습니다. 세상의 절반은 남자이고 세상의 절반은 여자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 당시의 지배구조는 남자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숫자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수를 셀 때 성인 남자의 수만 세니까 여성이나 아이들의 수는 숫자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그만큼 여성들은 멸시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들의 고통을 극진히 가슴으로 안아 내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고 여자입니다. 딸은 귀신 들렸습니다. 좋지 않은 조건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딸을 고쳐 주시고 여인의 마음도 만져 주셨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병에 걸렸습니다. 십이 년 동안 사람들은 그녀를 피해 다니고 꺼려했습니다. 그녀는 사회적인 죽임까지 당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의 육체적 병도 고쳐 주시고 모든 사람 앞에서 이 여인이 고침받았다는 것도 알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여인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면서 여인입니다. 결혼에 다섯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나서 물 좀 달라 하시고 말을 건네셨습니다. 선을 넘어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여인을 회복시켜 주시고 복음 사역의 동역자로 그녀를 세워 주셨습니다.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기릅니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의 동역자이고 남성은 여성의 동역자이고 함께 가정을 세우고 사회를 이루어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도 보이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십일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그런 못된 습관이 남아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교단의 최고 의사 의결 기구가 교단 총회인데 교단 총회의 대표들이 모이는 총대가 천오백 명입니다. 전국의 각 노회에서 목사님 장로님들을 파송해서 모인 총대들의 숫자가 천오백 명인데, 지난 총회에서 여성 총대들의 숫자가 천오백 명 중에 자그마치 이십육 명입니다. 퍼센트로 따지면 1.7%밖에 되지 않습니다. 창황스럽지 않습니까?
이런 숫자가 교회 공동체에서 어떻게 여성의 리더십을 이렇게밖에 인정할 수가 없는가, 사실 그건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당회에 여성 장로가 없지 않습니까? 사실 교회 공동체에서 여성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이 헌신하고 수고하지 않는다면 오늘 이 교회가 어떻게 움직여 가겠습니까? 여성의 수고가 교회에서 빠져 버린다면 교회는 교회로서 존재가치가 존재할 수가 없을 만큼 커다란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교회는 인습과 습관에 매여서 남성 중심의 사고로 여성들을 허대하고 보이지 않는 장벽과 선을 그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차별과 그런 허대를 철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의혹의 눈길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남과 여에 구별과 차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3. 의인과 죄인
또 하나 그 당시 예수님 당시에 암묵적인 인간의 선이 있었는데 의인과 죄인의 구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는 의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이렇게 선을 그어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임의로 '우리는 의인이고 너희들은 죄인이다' 선을 그어 놓았습니다. 죄인 중에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그 당시에는 세리와 창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별명이 마태복음 11장 19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마 11:19)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자주 하시니까, 예수님 제자 가운데에도 세리 마태가 있었고,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9장의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시다가도 삭개오를 만나시고 그 눈빛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그의 집에 하루 유하시면서 "너에게 오늘 구원이 임했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리의 친구라 불렀습니다. 또 세리와 함께 다니며 창기들과 함께 식사를 즐겨 하셨기 때문에 창기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
예수님 보실 때는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 서기관들, 율법학자들, 많은 종교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 그분들도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죄인, 회칠한 무덤을 가진 죄인, 그러나 드러난 죄인 세리와 죄인, 그들 역시 하나님 앞에 모두 다 죄인이었습니다. 의인과 죄인의 선의 구분이 필요 없을 만큼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예수님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다' 이런 구별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고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선 긋기를 좋아할까요? 선을 그어놓고 구별해 놓아야 내가 누군가를 지배할 수 있고 우월성을 담보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전히 높은 자리에서 당신을 지배하고 당신은 여전히 낮고 천한 자리에서 나를 섬겨야 된다'는 우월 구조가 사람들에게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지배하라고 가르치고, 세상은 여전히 못 가진 자는 가진 자에 대해서 혁명하고 뒤집어 엎고 세상의 판을 엎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갈등 관계와 투쟁의 연속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렇지 않았습니다. 구별이 없었습니다. 선이 없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도 없었고, 남자와 여자의 차별과 불평등도 존재하지 않았고, 의인과 죄인의 구별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구별에 불과했습니다.
3. 선을 넘는 삶
이제 우리는 어때야 할까요? 이제 우리가 선을 넘어 들어오신 예수님을 경험하며 이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자유롭게 선을 넘는 사람들이 되셔야 됩니다.
우선 가족들 간의 선이 있어서 참 편하다고 생각했던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 자식은 부모에 대해, 일가친척끼리도 이 선은 넘어가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가 보십시오. 먼저 손을 잡아 보시고, 먼저 손 내밀어 보시고, 사랑한다고 말해 보십시오. 서로 교회에서 얼굴만 보고 '아 저분이 우리 교인이구나' 했던 성도들끼리도 인사 건네 보시고 악수를 청해 보십시오. 갑자기 사랑한다고 말해 보십시오.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남모르는 마음의 기쁨이 솟아 올라올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일부러 때마다 설교하고 나니까 나가시면서 어떤 분이 저에게 눈을 똑바로 보고 "목사님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황스러웠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사랑의 선을 넘어 가고 사랑한다 말하고 손잡아 주면서 우리 사회가 따뜻해지지 않겠습니까?
서로 이웃 끼리 목례만 하고 눈인사만 하던 사이가, 사랑의 인사를 건네 보십시오. 선을 넘어가 보십시오. 집을 열고 우리 집에 초대해 보십시오. 식탁 교제를 나누어 보십시오. 멋쩍고 당황스럽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새롭게 샘솟아 올라올 것입니다.
선을 넘는 것은 바로 선교의 본질입니다. 예수님 시절에 예루살렘에만 매몰되어 있었다면 어떻게 세계 선교가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로,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로,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선교의 본질은 선을 넘는 작업입니다. 내가 남모르게 그어 놓았던 나 자신의 선 안에 갇혀 있으면 선교라는 위대한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선을 넘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끝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예루살렘 사역을 하고 있는데 거창한 사역이 아니고 교회 주변 이웃을 섬기는 사역입니다.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사역을 예루살렘 사역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와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이웃들이 교회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질까요? '이 교회 제발 좀 딴 데 갔으면 좋겠다, 이 교회 때문에 못살겠다' 이러면 교회가 예루살렘 사역을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딴 데 가려고 한다면 교회 주변 이웃들이 들어와서 드러눕고 안 된다고, 여기 있어야 된다고 해야, 그래야 교회가 제대로 살아온 것입니다. 먹을 것도 나누고 이유 없이 섬기고 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자꾸만 베풀고 그래야 담장 사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 이 넓은 주차장에 평일에 이웃들이 주차하고 자유롭게 다니고 그래야 이 교회가 예루살렘 사역, 담장을 허물고 선을 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부터 선을 넘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사역은 우리 교회가 하지 않는 사역을 하는 이웃 교회를 돕는 것입니다. 농아인들을 위한 교회, 노숙인들을 위한 교회, 그 외에 다른 여타의 사역을 하는 유대를 위한 사역들, 이 땅에 있는 여러 힘들고 어려운 교회를 돕는 사역들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역은 탈북인들을 위한 사역, 북한 선교를 위한 사역입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직접 북한 땅에 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파송해야 될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기금을 모으는 사역, 이 땅에는 탈북인들을 위해서 그들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고 돕는 사마리아 사역이 있습니다.
땅끝 사역은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사역입니다. 힌두 지역을 위해서 거점 사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그 지역을 단기선교 다녀왔습니다. 이슬람 지역으로 거점을 넓히고, 이제 선교의 끝물이라고 하는 중국을 위해서도 우리는 마음을 열고 기도하며 섬겨야 될 것입니다.
거침없이 선을 넘고, 끊임없이 선을 넘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선들을 철폐하고 나아가야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역사가 완성될 것입니다. 부디 선을 넘어 이 땅에 오신 우리 예수님의 선 넘는 사역을 본받고 기억하고 깨달아 우리도 여전히 좋은 의미에서 복음의 선을 넘어가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늘과 땅의 두텁고 무거운 선을 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서 선을 넘어서 많은 곳으로 전도하러 가신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을 기억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선을 넘어 가셨고, 남자와 여자의 선을 넘어 가시고,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선을 넘어 가시며,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선도 넘어 가시며, 의인과 죄인의 선을 넘어 가신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어느 선에 갇혀 있습니까? 주님 미련하고 완악한 우리를, 우리를 묶고 있는 선을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처럼 선 넘는 자들이 되도록 도우시고, 선을 넘어 가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복음 사역에 헌신하며 동행하는 믿음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