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강 / 어린 아이와 같이 (10:13-16)

어린 아이와 같이 (막 10:13-16)

철학자 니체는 자신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 실존의 단계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낙타의 단계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는 우리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지 않습니까? 강인한 인내력과 정신력이 필요합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횡단해야만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살고 있고, 먹고살기 위해서 인생의 수많은 짐들을 감내하고 견디며 지금도 사막을 횡단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존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사자 같은 존재가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짐들을 다 던져 버리고 스스로 먹거리를 찾아 나서는 사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수동적으로 내가 짐을 지고 걸어가면 누군가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기를 기대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스스로 먹거리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 자율적 이성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사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자로 사는 실존은 공동체를 해칠 만한 위험이 따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단계로 어린아이와 같은 단계를 말합니다. 세상 천진하고 평화스럽고 걱정 없고 염려 없는 어린아이의 단계가 실존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단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니체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이 실존의 세 단계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낙타의 단계에서 사자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생각의 전환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수동적으로 살다가 능동적으로 살겠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지 않고 스스로 사자처럼 자유분방하게 살겠다는 결단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자로 사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어린아이의 단계로 도약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령의 신적 도움이 없으면 갑자기 우리 마음속에 내적 평화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거대한 짐을 지고 살아가다가 갑자기 짐이 벗겨지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는데, 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와서 이 세상의 수많은 짐들이 다 벗겨지고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사자처럼 먹고살기 위해서 주변을 어지럽히고 힘들게 했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신적 평화가 우리 인생에 가득 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찾아온 사람들은 이전 사람들과는 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왔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사람들은 자신의 집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왔습니다. 몸이 아픈 아이는 예수님이 만져 주시고 안수하심으로 몸이 회복되기를, 지혜가 좀 부족한 아이는 예수님이 안수해 주시면 지혜가 풍성해지기를, 인생의 큰 꿈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예수님께서 기도해 주시면서 인생의 꿈이 풍성해지기를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내가 가서 머리 들이밀고 기도받기보다는 우리 집 아이를 데리고 가서 예수님께 기도받고 싶지 않겠습니까? 부모의 심정은 다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좀 이전과 다른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13절 후반을 보시면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꾸짖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보면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말은 금했다, 가로막았다, 벽을 세웠다는 뜻입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가로막았다는 뜻입니다. 금하고 벽을 세우고 안 됩니다, 못 갑니다 하고 했다는 뜻입니다.

1. 복음의 걸림돌

제자들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우리는 한두 가지 정도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이 어린아이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사회적 관념입니다. 사람들은 그 당시에 여자나 어린아이는 숫자로 세지도 않았습니다. 성인 남자들만 셌습니다. 즉 어린아이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이 제자들의 가슴 속에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며 아이들을 막은 것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을 많이 다니셨습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셨고, 남쪽에서 강을 건너 요단 동편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려고 덫을 친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논쟁하시면서 많이 피곤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피곤하시니까 지금은 안 된다고 가로막은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제자들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그 다음 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대해 분노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의 모습이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의 직무가 무엇입니까? 제자라고 하는 것은 모름지기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의 연결 통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 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제자들은 나가서 전도해 오지는 못할망정, 나가서 데려오지는 못할망정, 자기 발로 걸어온 사람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을 넘어 이 땅에 오셨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이 땅으로,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남자에게서 여자로, 의인에게서 죄인으로, 가진 자에서 못 가진 자로, 그렇게 예수님은 오셨는데 이들은 오히려 선을 그어 놓고 벽을 높이 쌓아 두고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 금하고 금지하고 오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스럽다고 비난하지만 2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도 역시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새 가족들을 면담해 보면 이런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연세가 아주 연로하신데 어릴 때는 신앙생활을 하고 젊을 때는 교회에 나갔는데, 한 20년 30년 신앙을 쉬다가 다시 교회에 나왔습니다. 20년 30년 방황하시다가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여쭤봅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쉬셨습니까? 그분들이 이런 말씀을 간혹 하십니다. 젊었을 때 교회에서 못 볼 것도 많이 봐서 마음에 상처를 심하게 받아서 쉬었습니다. 부모님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상처도 받고 돈도 떼이고 그래서 교회라고는 꼴도 보기 싫어서 수십 년 동안 쉬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오히려 상처받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나왔는데 오히려 복음의 걸림돌을 만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목회자가 반듯하게 목회하지 않는다면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목회자로 인해서 시험 들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목회자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혹시 도덕적인 문제를 저지른다면 교회 안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그런 목회자들 때문에 오히려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예가 한둘이 아닙니다.

교회 중직자라고 함은 모름지기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일까요? 교회 중직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를 이어 주는 다리 놓는 역할을 하셔야 됩니다. 분명히 우리가 기억해야 될 나의 정체성은 나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나로 인해서 복음이 회향할 수도 있고 나로 인해서 복음의 걸림돌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생각을 하고 살지 않으면 우리는 자칫하면 복음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도들인데 삶의 현장에서,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 가로막는 장벽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어때야 할까요? 마을마다 교회가 서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내가 이 교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도록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교회는 낮아져야 됩니다. 교회가 손에 잡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질서와 법을 준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 법이 있고 사회 질서가 있는데 교회가 높은 사람을 이용해서 법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미꾸라지처럼 산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가 될 것입니다. 교회일수록 사회 질서와 법을 준수하고 이 사회의 근간이 되는 질서를 지켜 주는 교회가 여러 사람들에게 존중과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혹시 우리가 잘못하면 혹시 내가 하나님과 세상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항상 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장벽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 주님께서 가만히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복음을 가로막는 장벽을 우리 주님이 부수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것은 불행하고 비참한 일입니다. 부디 우리가 내가 지금 복음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가, 회향꾼이 되고 있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회향꾼이 아니라 복음의 디딤돌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결단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어린아이의 수용성

우리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보고 화가 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노하시어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이런 자는 당연히 어린아이들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왜 어린아이들에게 이토록 좋은 평가, 높은 평가를 하셨을까요?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받든다는 단어는 데코마이(δέχομαι)라는 헬라어를 쓰고 있습니다. 데코마이(δέχομαι)는 영어 성경에 보면 리시브(receiv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받아들이다, 영접하다, 수용하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높이 평가하신 이유는 수용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수용성이 높기 때문에 그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의 수용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어린아이는 어디에 수용성이 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2-1. 연약함의 인정

첫째, 어린아이들이 가지는 수용성은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높습니다. 젖먹이 아이들은 많이 웁니다. 배가 고파도 울고 기저귀를 제때 갈아 주지 않아도 웁니다. 등에 먼지 하나만 있어도 불편하다고 웁니다. 부모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어보면 무엇 때문에 우는지 금방 압니다.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하니까 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엄마 나 배고파요, 젖 주세요, 말하지 못하니까 우는 것이지요. 스스로 일어나서 밥을 해 먹을 수 없으니까 우는 것입니다. 아이의 울음은 자신의 연약함의 표현입니다. 저는 이렇게 연약합니다, 혼자 일어서서 먹을 수 없으니까 알아서 먹거리를 주십시오 하며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어른들은 잘 울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존심 때문입니다. 내가 부족한데 나 여기까지밖에 하지 못합니다, 이건 더 이상 못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내가 모르는데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며 삽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어린아이로 오셨듯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성령의 능력이 부어지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가 강하게 되는 그 첫 시작은 내 부족과 연약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어린아기로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늘을 보좌다 가지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마리아와 요셉에게 기대고 의지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모습은 나도 이렇게 어린아이로, 어렸을 때 부모를 의지하고 사는 것처럼 너희도 다 위치하고 있는 것 그대로 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나에게 나오라, 너의 약함을 수용하라 하시는 우리 주님의 명령이고 주님의 돌보심이고 주님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렘브란트가 1627년에 그린 「이집트로의 피신」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시면 그 그림에 아기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이집트로 피신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그림의 배경은 마태복음 2장입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동방박사 세 사람이 하늘에 왕의 별을 보고 헤롯을 찾아갑니다. 왕이 나셨습니다, 어디에서 나셨습니까? 헤롯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내가 왕인데. 헤롯은 짐짓 모른 체하면서 말합니다. 가서 왕을 찾거든 나에게도 말해 달라, 내가 가서 왕께 경배하겠다.

동방박사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길을 떠납니다. 왕을 찾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고 경배했습니다. 꿈에 천사가 현몽합니다. 돌아가지 말라, 다른 길로 가라. 동방박사들이 다른 길로 떠났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자 헤롯은 그들에게 속은 줄 알고 2세 미만의 영아를 살해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 명령이 있고 나서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영아 살해 명령 때문에 아들 예수님을 품에 안고 길을 떠나서 이집트로 피신하는 것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십시오. 아기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안겨 있습니다. 이제 금방 아기를 낳은 산모가 아이를 품에 안고 꼭 껴안고 밤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짐승의 등에 타고 아버지 요셉은 불안한 눈빛으로 좌우를 둘러보며 짐승을 몰고 가고 있습니다. 하늘 보좌를 다 가지시고 온 세상의 권세를 다 가지신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연약하고 연약한 여인의 품에 안겨서 이집트로 피신하는 이 그림이, 이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나도 연약하니 너의 연약함을 인정하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약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부족한 것을 부족한 대로 그대로 내어 놓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부디 어린아이처럼 약함에 대한 수용성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사모하시면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시는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실 줄로 믿습니다.

2-2. 말씀의 영접

둘째, 어린아이들의 수용성은 말씀에 대한 수용입니다. 세상에 보면 강해 보이는 사람도 있고 아주 약해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진짜 강한지, 그분이 정말 약한지는 평소에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닥치면 금방 표시가 납니다. 말씀으로 내면을 다져 놓은 분은 겉보기에 약해 보여도 강하고 단단합니다. 고난을 넉넉히 이깁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있어도 이겨 내고 견딜 힘이 생깁니다. 내적 근육이 생깁니다. 하지만 말씀에 수용성이 평소에 없었던 분들은 겉보기에 강해 보여도 고난을 견뎌 내지 못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말씀을 깊이 수용하는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6절을 보십시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 예수님의 부모님이 유월절 명절에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명절 잔치를 다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없어졌습니다. 놀라서 뒤돌아가 봤더니 성전에서 랍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나누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수용성이 컸기 때문에 십자가 고난을 넉넉히 지켜 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수용성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에베소서 6장 17절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기 가지라는 단어가 데코마이(δέχομαι),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 말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도 취사선택을 많이 합니다. 경험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옛날 2000년 전에는 그 말씀이 통했을지 몰라도 지금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면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우리에게 누구나 다 있습니다. 두고 적을 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수용성을 어린아이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너희들이 판단해서 취사선택하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된다, 어린아이처럼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정말 주님이시거든 나로 명하사 물 위를 걷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걸어라. 베드로가 그 순간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갔습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그 순간 판단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당신은 예수님이시고 나는 육체를 가진 인간인데 내가 과연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 깜깜한 밤인데 내렸다가 물에 빠져 버리면 누가 나를 건져 주나? 과연 단지 깜깜한 밤에 배에서 내릴 수 있을까? 이런 순간적인 판단과 취사선택의 자리에 서 있었더라면 그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한다는 것, 말씀에 대한 수용성이라는 것,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취사선택으로 버릴 말씀과 취할 말씀을 구별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곧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2-3. 사람에 대한 포용

셋째, 어린아이의 수용성은 사람에 대한 수용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을 무척 좋아합니다. 생전 처음 만난 아이라도 금방 친해집니다. 부모가 집에 가자고 하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 가서도 그 아이 얘기를 계속합니다. 아이들은 너무 사람 친화적이어서 우리가 오히려 걱정해야 될 정도로, 누가 네게 과자 준다 해도 사탕 준다 해도 따라가지 마라 해야 될 정도로 어린아이들은 사람 친화적입니다.

어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속에 사람에 대한 단위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내 사람, 경계선에 있는 사람, 경계 밖에 있는 사람. 누구를 만나 보면 이 사람이 나와 가까이해야 될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이미 경계가 정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나의 것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폭이 커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속에는 모든 사람이 다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조차도요. 예수님은 자신을 판 가롯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원수들을 다 포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다 포괄하는 사랑의 십자가였습니다.

다윗 또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까지를 포괄하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까지도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자고 한 그릇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람에 대한 수용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폭을 넓히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시면서 제자들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그리스도와 백성들 사이를 가로막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어린아이처럼 연약함을 수용하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영접하고 사람에 대한 폭을 넓혀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지혜로운 백성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 예배 드립니다.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의 회향꾼이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하며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를 가로막는 짓을 너무나 많이 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고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다리 놓는 사람들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어린아이처럼 연약함을 인정하게 도우시고 말씀을 판단하지 않고 취사선택하지 않고 그대로 영접하도록 도우시며 사람을 받아들이는 넉넉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는 지혜로운 백성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