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강 /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17-31)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7-31)

1. 좋은 질문의 힘

지금 세계적인 기업 구글이 진행하고 있는 다소 특별하고 엉뚱한 프로젝트가 하나 있습니다. 이름이 '룬 프로젝트'라는 것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테니스장만 한 크기의 거대한 풍선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풍선 안에 헬륨가스를 주입합니다. 그리고 그 풍선 밑에다가 무선 통신 장비를 잔뜩 탑재합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약 20km 높이 정도로 띄웁니다. 무선 통신 장비를 운영하는 에너지는 태양열을 사용합니다. 지상에 있는 통신 회사와 연결해서 반경 수만 km 이내의 사람들이 무선 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발하고 파격적인 프로젝트를 구글이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엔지니어들이 함께 모여 커피를 마시다가 "우리가 전 세계 어디서나 인터넷을 할 수 없을까?"라는 질문을 누군가가 던졌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맞장구를 칩니다. "산속이나 아프리카 사막이나 우주에서도 마음대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그런데 사막에 광케이블을 매설하고 기지국을 세우는 데는 돈이 엄청나게 드는데 어떻게 할까?" 또 곁에 있던 사람이 "풍선을 만들어서 무선 인터넷 장비를 띄우면 되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럼 우리가 한번 해보자"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상용화가 거의 가까이 왔고 캐나다에 있는 한 통신 업체가 구글과 독점 협약을 맺었습니다. 계속해서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이 내용을 일본인 뇌 과학자인 모기 겐이치로라는 분이 「좋은 질문이 좋은 인생을 만든다」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소개하는 내용은 구글 엔지니어들의 훌륭한 질문의 태도였습니다. 좋은 질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우리로 하여금 가게끔 하고, 인류에 대한 미래도 새롭게 개척하는 위대한 힘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하고 또 질문을 받고 삽니까?

하지만 이 질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좋은 질문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질문도 있습니다. 상대방을 질문 하나로 굉장히 불쾌하고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고, 그 질문 하나로 상대방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너 왜 이제야 오니?"라고 질문하는 것은 지금 불쾌하니까 한번 싸우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질문하지 않고 "많이 늦었구나. 밥은 먹고 다니냐?" 이렇게 질문하면 한결 더 분위기가 부드러워집니다. 또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게 "너 도대체 왜 그래?"라고 질문하면 싸우자는 시비 거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 말고 "너 평소와 좀 다른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아픈 데 있니?"라고 질문하면 그 질문은 훨씬 더 부드러운 질문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의 기술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다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 분위기뿐만 아니라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래까지도 개척하는 힘이 질문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질문해야 할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이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있고 우리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까지도 책임질 수 있는 아주 좋은 질문,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보면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그 앞에서 직접적으로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방향을 바꾸어 돌려서 그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깊은 내면에 잠들어 있었던 약점을 꺼내고 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의 은혜로 덮어 가십니다. 오늘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질문을 주님께 드려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2. 부자 청년의 질문

그분이 예수님께 어떤 질문을 드렸을까요? 10장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서 길을 가는데 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굉장히 좋은 태도입니다. 격식 있고 예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의 내용을 논하기 전에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는 살펴야 됩니다. 그분은 공관복음에 다 등장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나오는 사람입니다. 공관복음서 말씀을 종합해 보면 그분은 젊은 사람입니다. 청년입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부자입니다. 돈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관원이라고 함은 유대인의 대표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물질도 가지고 있고, 재력도 있고, 게다가 젊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 더 있어서 그분은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에 관심이 많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완벽한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가 딸이 있다면 사위 삼고 싶을 만큼 대단히 괜찮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2-1. 행위로 얻는 구원?

하지만 그분이 던진 질문을, 우리가 이 질문의 적합성과 유연성을 살펴봐야 됩니다.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과연 이 질문이 옳은 질문일까요? 영생을 자신의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구원받고 싶은데 제가 어떤 일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즉 구원을 행위 구원으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옳은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받으시고 그분을 따끔하게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너 다시 말해 봐. 이 질문 틀린 질문이야. 그렇게 말하면 안 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번에 질문을 끌고 가면서 그분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게 하고 깊이 있게 살피도록 하십니다. 율법을 가지고 나온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히려 "너희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느냐?"라고 되물어 오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이 계명을 예수님께서 물어보셨는데 이 계명은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을 때 돌판 두 개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과 백성 과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돌판에 대한 내용은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선행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이 선행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두 번째 돌판을 언급하시면서 "너는 두 번째 돌판, 너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며 살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2-2. 율법의 한계

이 질문에 대해서 그분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자신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나이다" 자신감이 묻어 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뿌듯함이 묻어 나지 않습니까? 동시에 그분의 내면 속에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동안 고생하고 애쓰고 마음의 갈등이 있었던 그분의 수고로움도 보이지 않습니까? 율법을 지켜 가기 위해서 그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억누르고 고생하며 고통을 받으며 율법에 매여 살아왔던 그분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청년 시절까지 오기까지 그분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뇌와 고통들이 한꺼번에 다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해야 됩니다. 다 지켰는데, 선행을 위한 율법은 다 지켰는데, 그런데 왜 다시 주님께 나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을 왜 하는 것입니까? 다 지켰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굉장한 약점을 발견합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최선을 다해서 지켰는데 나보다 더 고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보니까 선한 행위의 대단한 고수입니다. 남녀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람 축에도 끼지 않던 어린이까지 가슴에 안고 축복 기도 안수 기도까지 해 주셨습니다. 유대인인데도 불구하고 이방인의 지역도 자유롭게 다니십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약한 자들을 예수께서 찾아다니면서 품어 안으셨습니다. "나는 선한 행위를 하고 이렇게만 살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선한 분이 계시구나."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 무력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존재에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을 그렇게 호칭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저도 선하다고 하고 살았는데 나보다 더 선한 분이 여기 계셨군요. 당신의 선함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은 자신의 실존의 고민과 절망이 함께 담겨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우리는 절망감만 느낄 뿐입니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율법을 행하고 열심히 선행을 하고 살았는데 어디에 가나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평생을 살았는데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런데 더 뛰어난 율법의 행위자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포기하든지 더 열심을 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응답

예수님은 이 청년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를 깊이 보셨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분의 스스로 있는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문제를 끄집어 내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행위 구원을 조장하시는가? "너 있는 물질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면 네게 영생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닌가? 만약 그랬다면 예수께서도 행위 구원을 조장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접근하시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21절 초입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를 보셨다" 했습니다.

3-1. 내면을 보시는 주님

여기 '보셨다'는 말은 '엠블레포(ἐμβλέπω)'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엠블레포는 '내면을 깊이 살피다, 깊이 들여다보다, 제대로 살피다, 속생각을 들여다보다, 꿰뚫어 보다'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셨는데 그때도 "예수께서 보시고 내가 너를 장차 게바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내면을 보시고 그가 장차 큰 사도가 될 만한 자질이 있음을, 그릇이 됨을 보신 것입니다. 그것처럼 똑같이 이 부자 청년의 내면 속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셔도 그분은 행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 문제가 물질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는데, 다른 선행은 다 할 수 있는데, 내가 물질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이것만은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감이 그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아마 그분은 물질 문제가 자신의 인생 문제였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오히려 더 선한 행위에 힘쓰고 애써 왔을지도 모릅니다. 반대급부로 보상심리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처음부터 나가서 "예수님 저의 인생 문제가 물질에 대한 탐욕입니다. 이것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예수님께 드러내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강점을 가지고 말합니다. "나는 선한 행위를 하고 살았습니다. 십계명 두 번째 돌판의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이제 더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3-2. 약점을 드러내라

세상의 방식은 이렇게 해도 됩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면접을 볼 때 사람들이 이렇게 조언합니다. "너의 강점을 어필해라. 네가 잘하는 걸 드러내라. 약점을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마라. 너의 강점으로 약점을 커버하고 덮어 가라. 그래야 회사에서 너를 선택할 것이다. 약점 없는 사람이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면 강점으로 덮어 갈 수 있는지를 연구하라." 이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법은 자신의 약한 것을 주님 앞에 드러내야 됩니다. "나는 물질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렇게 부족하고 약점투성이입니다. 이것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것을 드러내야 그 안에 은혜가 부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자신의 무능과 약점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했는데 병이 낫지 않습니다. 성격도 다혈질입니다. 그를 인도해 주었던 바나바와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졌습니다. 그 정도로 성격이 한 성격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약점이고 그의 무능이었습니다. 이것을 주님의 제단에 올려놓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약점 가운데 임했습니다. 그가 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그는 강한 사람이 되었고, 그 약점으로 하나님은 일하셔서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고 나타난 것입니다.

3-3. 바리새인과 세리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것을 드러내는 자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하지요. 누가복음 18장 10절에서 12절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 있는 저 세리와 격이 다르고 급이 다른 사람입니다." 자신의 강점을 하나님 앞에 어필하고 있습니다. 여기 부자 청년과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불완전하고 모두가 다 무능하고 약한 점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 약점을 주님 앞에 드러내야 됩니다. 그 약점을 가지고 주님께 질문해야 됩니다. "주님 나의 이 약함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저는 여전히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고, 저는 여전히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있고, 저의 인간의 약함 때문에 여러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세리는 하나님께 오히려 자신의 무능을 아뢰었습니다. 18장 13절을 보십시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죄가 너무 많으니까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부끄러워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하나님 제단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은혜가 시작됩니다. 은혜는 덮어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은 자신의 강점으로 자신의 약점을 덮으려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면 하나님의 은혜, 카리스(χάρις)가 그의 약점을 가려줍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 구원 사역의 시작입니다.

4. 부자 청년의 결말

그렇다면 이 부자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성경 그 이후에 부자 청년의 그다음 이야기를 읽어볼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이 부자 청년은 구원받았을까요? 과연 이 부자 청년은 그다음 어떤 전개를 밟았을까요? 거룩한 상상력을 동원해 볼 귀한 실마리가 말씀에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근심하며"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내면의 은밀한 부분을 지적받은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부끄럽고 탐욕스러운 부분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선한 행위를 하며 율법을 지켜 가며 살면서 "이렇게 하면 나의 연약하고 부족하고 물질의 노예가 된 부분도 가리어지겠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을 지적하시고 꼬집어 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근심이 됩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떡하지." 그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4-1. 사랑의 레이더

그런데 그의 마지막 결론은 해피엔딩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를 엠블레포(ἐμβλέπω)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레이더 안에 걸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이 그의 마음에 떨어져서 그를 괴롭게 하고 근심하게 해서 결국 다시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가 그때는 그냥 근심만 하고 돌아갔는데 이제는 답을 찾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질문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에서 "주여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물질의 노예입니다. 저는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나의 이 무능과 이 물질의 탐욕과 노예 된 것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 오히려 모든 것을 맡기며 은혜를 구하며 나왔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의 끈은 영혼에 이어지고 끊어지지 않아서 다시 그를 주님 앞으로 불러내었을 것입니다.

4-2. 부자의 범주

예수님께서는 이 일 이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자의 범주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물질이 많은 사람만 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도 부자들이 많습니다. 물질 부자뿐만이 아니고 다른 부자들이 많습니다.

봉사 부자들이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봉사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강점을 주장하고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가리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봉사 열심히 하는 봉사 부자가 과연 그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기도 많이 하는 기도 부자도 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한다고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그 강점이 자신의 인간의 연약함을 가려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헌금 많이 하는 헌금 부자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성경 많이 알고 성경 지식이 가득한 말씀 부자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영생은 나의 연약함을 주께 드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가 부어져야, 하나님의 놀라운 그 은혜가 우리 인생의 약점을 덮어야 거기에서부터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편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셔야, 은혜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4-3. 구원의 주체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결론이 있습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너의 약점을 내어 놓으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은혜로 너의 약점을 덮어 주실 것이다. 그때 구원이 시작되고 완성된다. 말씀하셨습니다.

5. 기도의 골방

우리는 '기도의 골방은 세상을 이깁니다'라는 주제로 달려왔습니다. 기도의 골방에서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혹시 바리새인처럼, 혹시 여기 부자 청년처럼 우리의 장점만, 강점만 하나님께 아뢰지 않으셨습니까? 기도의 골방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나의 약점을 돌아보고, 나의 무능을 살피고,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서 주님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이 기도의 골방입니다.

한 해만 기도의 골방을 세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영원토록 기도의 골방을 채워 가셔야 될 텐데, 그때까지 내 연약함과 약점을 매일같이 기도의 골방에서 하나님 제단에 올려놓기를 바랍니다. 은혜로 하나님이 가려 주시고 해결하실 것입니다. 그 은혜와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의 강점이 나의 무능과 연약함을 가릴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깨닫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줄 알았는데 나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오직 구원의 주체이신,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우리는 구원의 완성을 이룰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기도의 골방에 다시 들어가서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피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연약한지, 무엇 때문에 자꾸만 죄에 걸려 넘어지는지 나의 내면을 살피고 그 내면을 주께 올려드리는 거룩한 백성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