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소원이 무엇이냐 (막 10:32-45)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 "평생 소원인 누룽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속담일 수도 있고,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속담입니다. 그런데 이 속담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중국의 대단한 부자인 진(陳)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이 분이 길을 가다가 행색이 초라한 한 걸인을 만납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하고 몹시 불편해 보이며 굉장히 힘겨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자가 걸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나에게 말해 보시오. 어떤 소원이든지 내가 들어 주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그때 그 걸인이 눈을 껌벅이며 이 부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 같은 것이 소원이라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누룽지라도 배 터지게 먹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정도 소원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의 그 당시 현재 상황이 그러했고, 그분이 살아온 삶의 수준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 수준의 소원밖에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오셔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무엇이든지 말해 보라" 하시면 어떤 소원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순간을 꿈꿔 왔지만 막상 그런 일이 닥치면 "어떤 소원을 아뢸까? 내가 이야기를 해도 될까? 안 될까?" 망설일 때가 많습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소원과 제자들의 소원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소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것이었고, 제자들의 소원은 자신의 욕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소원을 듣고도 절망하지 않으십니다. 시간이 지나며 성장하고 성숙하며 하나님의 소원을 그들의 소원으로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올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내면을 살피는 은혜의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의 소원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라고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죽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시고 고난받고 돌아가셔야 하는 그 고난의 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가는 이 길의 목적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 33절과 34절을 보시겠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목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목적은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내가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쫓겨난 이후부터 마음속에 소원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소원은 다름 아닌 많은 사람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백성들이 구원받고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그가 가졌던 유일한 한 가지 소망은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을 내가 이루어 드려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원만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3년, 그 이전의 30년, 33년을 사시면서 유일한 한 가지 소망은 하나님의 소원 성취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한 길을 오로지 걸어가신 것입니다.
1-1. 흔들림 없는 발걸음
그 길을 걸어가시면서 시험도 있었습니다. 사탄 마귀가 사십 일 금식하시는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시험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적대하는 무리들이 대적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대적해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다는 그 유일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주님은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시다가 이제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그 길을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는 한 해를 시작하면서 마음속에 선한 뜻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내가 올 한 해는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려야지. 내가 올 한 해는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유혹을 받습니다. 사탄의 시험을 받습니다. 대적하는 무리를 만납니다. 사람 때문에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꺾여 나갑니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 "내가 언제 그런 소원을 품었나?" 할 정도로 그 소원은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갑니다. 다시 새해가 되면 또 결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수십 년 한평생을 신앙생활 해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올 한 해를 시작하시면서 이제부터는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소원을 내가 가지고, 주의 소원을 이루어 가고, 그 소원을 성취시켜 드리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겠다고 결단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제자들의 소원
예수님의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었는데, 제자들의 소원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오늘 말씀 35절을 보십시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 제가 소원이 있는데 말해도 될까요? 들어 주실래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인자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다른 말로 하면 "소원이 무엇이냐? 말해라. 네 소원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설레게 합니다. 소원을 말하라니, 그것도 예수님께서 "네가 어떤 소원이든지 말하면 이루어 주실 것인가" 마음이 설렙니다.
2-1. 소원이 곧 신앙고백
그런데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고 위험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달아 보시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적 질문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백번 신앙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 마음에 있는 소원을 아뢰는 것 또한 신앙고백입니다. 현재의 내 상태를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원은 곧 나 자신입니다. 과거로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 축적되어서 지금 내 마음의 소원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을 끄집어내서 주님께 아뢴다는 것은 "주님, 내 상태가 지금 이렇습니다. 저는 지금 이런 수준에 있습니다"라고 주님께 고백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물어보신다면 우리는 주의 깊게 대답해야 됩니다. 내 신앙의 상태와 수준이 있는 그대로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2-2. 영광의 좌우편
여기 이 두 분의 제자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37절을 보십시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영광 중에 주의 좌우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이런 소원을 아뢴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따라 나섰을 때는 사실 반신반의했습니다. "이분을 믿고 따라가도 될까?" 물음표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뀌어 갔습니다. 의심은 확신으로 되어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분은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완전한 정치적 해방자"인 것을 그들은 마음속에 확신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들판에서 먹거리를 풍성하게 만들어 내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자를 품어 주셨습니다. 이런 지도자는 어디서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책에서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강하고 무서운 자들에게는 호령하시고 그들을 대적하셨습니다. 대단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이 분이라면 우리가 지금 고생하고 있는 로마의 압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완전한 해방자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그 영광의 때가 되면, 로마를 전복시키는 그때가 되면, 주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고 야고보는 좌편에, 요한은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단 한 번도 "나는 너희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겠다. 나는 정치적 해방자가 되겠다. 나는 영광의 보좌에 앉겠다"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가복음 8장과 9장과 10장에 보면 세 번씩이나 주님은 수난 예고를 하셨습니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들리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왜 못 알아들었을까요? 마음속에 자신의 소원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원으로 내면을 가득 채우고 나면 주님의 소원 따위는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원으로 내면이 가득 차고 나면 예수님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귀먹은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소원이 너무 강렬해서, 내가 갖고 있는 소원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소원, 주님의 소원이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3. 열 제자의 분노
이 두 분만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머지 열 제자들도 똑같았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왜 화를 냈을까요? 이들이 화낸 이유가 무엇일까요? "허를 찔렸구나. 선수 당했구나. 내가 먼저 말해야 되는데 이 두 명의 형제가 먼저 말해 버렸구나." 그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똑같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열두 명 전부 다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영광의 자리에 좌우편에 앉기를 바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한심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도대체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 것을 어떻게 들었느냐?" 한심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의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죽음의 십자가 세례입니다. 이것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미련하고 무지해서 자기들 욕심으로 가득 차서 목청껏 대답합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설명해 봐야 자기 욕심으로 가득한 자아가 주의 소원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제물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사십일 이후에 승천하신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들은 하나하나 깨닫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구나."
그리고 나서 그들은 사도의 길을 걸어가며 야고보는 사도 중에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 요한은 오랫동안 이 땅에 거하면서 요한복음,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훌륭한 믿음의 사도가 됩니다.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죽음의 십자가 세례를 그들도 올곧게 받아내었습니다.
3. 성찬 앞에 선 우리
오늘 우리는 성찬을 대하는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대하면서 어떤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까? 각자 가지고 있는 소원이 다 다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올해는 저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내 소원이 너무 강렬해서 아버지의 소원조차는 내 마음에 품지 못하는 마음의 편협함을 가지고 성찬을 받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기대하는 눈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믿음이 깊어가고 믿음의 연륜이 쌓이면서 깨닫게 될 그날을 주께서 기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그 기대가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한 해를 시작할 때는 내 소원으로 마음이 가득했다 하더라도 한 해가 끝나는 그 시점이 되면 주님의 소원을 마음에 깊이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찬을 통해서 주님의 피가 내 혈관을 타고 돌고, 주님의 살이 내 살이 되면, 아버지의 소원도 나의 소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소원을 받아들이고 삶을 통해서 성취시켜 드리고 이루어 가는 성숙하고 성장하고 깊어지는 믿음의 자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는 소원이 있습니다. 간절한 소원이 지나쳐서 하나님의 소원을 인지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 성찬을 대하며 우리 예수님의 피와 주님의 살이 우리의 혈관을 타고 돌고 우리의 몸이 됩니다. 주님, 그저 성찬만으로 받는 자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의 영혼으로 아버지의 소원을 수용하는 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