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자의 호소 (막 10:46-52)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그 도입부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흥남부두 철수 장면이 도입부인데,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모티브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사성을 가진 사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1950년 12월에 약 일주일 정도 진행된 흥남부두 철수 작전을 통해서 약 10만여 명의 민간인이 피난선을 타고 자유를 찾아서 남쪽으로 남하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마지막 배가 빅토리호였는데, 그 배는 원래 화물선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물을 싣지 않고 사람을 실었습니다. 무려 만 4천여 명의 피난민이 한 배에 올라타게 됩니다. 그 배가 출항해서 거제도까지 오는 동안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는 기적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10만여 명의 민간인이 안전하게 철수 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장진호 전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있는 호수 이름입니다. 1950년 12월 개마고원 장진호는 무척 추웠습니다. 영하 27도를 넘나드는 혹한의 추위가 있었습니다. 그 추위도 추위지만 갑자기 참전한 중공군의 위세에 밀려서 UN군과 국군은 저지선을 목숨으로 지켜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걸고 저지선을 지켜내었기에 퇴로를 확보할 수 있었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흥남부두 철수 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UN군 약 만 7천여 명이 전사합니다. 그들의 전사와 또 그들의 업적을 기념하고 기리면서 지금도 미국에 가면 워싱턴 전쟁기념공원에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유는 자유를 향한 절박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명예요, 소중한 가치입니다. 자유를 잃어본 자만이 절박한 자유의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절박하게 자유를 향한 갈망과 몸부림 덕분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민족에게 자유 대한민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보면 절박함과 간절함이 자신의 삶을 바꾼 한 명의 믿음의 선배를 만납니다. 그분은 바로 맹인 거지 바디매오였습니다. 이분의 삶을 보면서 과연 오늘 나는 이분만큼 절박한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간절함과 절박함이 혹시 상실되어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간절함을 다시 끄집어내고 회복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기회를 붙잡는 절박함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는데, 그 당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되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가 여리고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면 만나는 첫 번째 성이 여리고였고, 여리고를 지나 약 36킬로미터 정도 서쪽으로 가면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여리고는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오가는 사람들로 그 도시는 항상 시끌벅적했습니다.
오늘 말씀 4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셔야 될 것이 "이르렀더니 나가실 때에"라는 구절입니다. 한 호흡에 읽을 수 있습니다. "이르렀더니 나가실 때에." 이 말은 우리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머무를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저기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우리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도시를 거쳐 가는 여리고에는 단 한 시간도 지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길을 빨리 지나가서 얼른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주님의 일행은 여리고에 도착하자마자 지나간 것입니다. 이르렀더니 이제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 짧은 찰나에, 그 짧은 순간에 주님을 불렀던 한 믿음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소경 바디매오였습니다. 46절 하반절부터 47절을 읽겠습니다.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분은 맹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짧은 시간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것을 어떻게 알고 주님을 목청껏 불렀을까요? 그것은 그분의 마음속에 항상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은 맹인이어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주님을 따라서 이 도시 저 도시로 주님을 따라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젠가 한 번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겠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려면 우리 동네를 지나가셔야 되는데, 그때 내가 주님을 목청껏 불러서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되겠다. 이 간절함과 절박함으로 항상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갑자기 동네가 시끄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우리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청껏 외쳤습니다.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은 기회를 그는 꽉 붙잡고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기회가 한두 번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몇 번 오지 않는 기회를 붙잡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마치 물처럼 기회를 흘려보내는 사람입니다. 세월을 흘려보냅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기 때문에 내일도 우리에게 당연히 보장된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내일, 1년 뒤, 10년 뒤가 과연 우리에게 보장된 미래인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10년 뒤를 보장하셨는가? 우리에게 보장된 시간의 미래가 어디까지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시간을 약속하시고 시간의 미래를 보장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우리가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 습관과 관성에 의해서 내일도 여전히 시간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 착각과 어리석음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찾아온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시간은 결코 우리 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도 우리에게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그때 이것을 붙잡아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운 자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 주셨을 때 열심히 성경 공부하고 열심히 말씀 읽고 훈련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달란트 주셨을 때 그 주신 건강과 달란트 가지고 주님 사역과 일에 열심히 다 노력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정성껏 예배드려야 됩니다. 마음 다해 주님 섬기며 예배드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시간이 과연 똑같이 우리에게 그다음도 그다음도 주어질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시간을 그냥 헛되이 보내버린 어리석은 사람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노아 시대를 보시면 노아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모두가 다 방주로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 아닙니까?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나무를 베고 수선스럽게 방주를 지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방주로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우리가 먹고 마시고 쉬고 즐기는 낙이 영원할 줄로 믿었던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홍수 심판을 예정하시고 방주를 준비해 두셨는데, 그 기회를 발로 차버린 미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롯의 사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고 롯의 사위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기회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생명을 헛되이 보내버린 미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기회를 주셨는데, 그 기회를 꼭 붙들고 놓치지 않는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절박한 자가 기회를 잡습니다. 그 기회를 잡으면 그 기회가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꿉니다. 여기 여리고성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눈 뜨고 있었지만 눈뜬장님들이었습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여기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영적인 눈이 열려서 단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붙잡았던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믿음과 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불쌍함을 아뢰는 기도
이분이 예수님께 어떻게 외쳤을까요? 47절을 한 번 더 보시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경에 나오는 기도 중에 가장 짧은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기도에 기승전결이 없습니다. 밑도 끝도 없습니다. 기도가 투박합니다. 단순합니다. 거칩니다. 미사여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과연 이 기도를 기도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 기도는 기도의 본질과 목적에 가장 부합한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왜 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를 자랑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도는 내 부족과 연약을 저 높고 높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는 과정입니다. 내가 미련하고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여, 저는 이것이 부족합니다. 저는 이것이 연약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로 나의 부족을 가득 채워주십시오. 이것이 기도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분의 기도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분은 불쌍한 사람 아닙니까? 맹인이었습니다. 걸인입니다. 지금도 구걸하고 살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해서 배우지 못했고, 배우지 못해서 직업이 없고, 가지지 못해서 구걸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주님께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고백 안에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평생의 눈물과 고통과 수고가 이 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십니까? 어떤 분은 저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 전혀 불쌍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우리 모두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과 소원과 마음속에 극단적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남편, 아내에게도 내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불쌍한 존재들 아닙니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노력하고 앞서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숨 막히는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나의 일터가 내일도 그대로 영원하리라는 보장을 누가 합니까? 우리가 내년에도 이 일자리에서 생업을 위해서 우리 자녀들을 먹이고 살릴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해 주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인생은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깊은 기도는 주님 앞에 나의 불쌍함과 연약함을 아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여, 나의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고 살펴 주십시오.
작곡가 바흐는 이 본문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가 라틴어로 된 미사곡을 작곡했는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퀴리에 엘레이손(Κύριε ἐλέησον)"이라는 고백만 10분 이상 찬양하고 있습니다. 찾아서 한번 들어보십시오. 똑같은 가사가 "퀴리에 엘레이손" 10분 이상 반복되는데,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 은혜로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고백은 전 세계인의 공통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이의 불쌍함, 연약함을 하나님께 아뢸 수밖에 없는 이 간절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기도의 위기를 돌파하라
그런데 이분이 이렇게 간절하게 아뢰고 고백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48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사람들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게 해를 가하려고 합니다. 목소리를 높여서 꾸짖습니다. 잠잠하라.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그 당시 예수님의 위상은 하늘 꼭대기에 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굉장히 사람들에게 신망을 받고 존중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우리를 압제하는 로마를 전복시키고 우리를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그랬기 때문에 지금 그 길을, 해방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령관 예수의 앞길을 가로막는 맹인 거지를 사람들은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잠잠하라 꾸짖었습니다. 조금만 더 하면 때려 죽일 기세입니다.
지금 이 기세 앞에서 맹인 거지는 할 수 있는 선택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는 포기하고 하던 동냥을 그냥 계속하든지, 또 한 가지는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한 번 더 외치든지. 둘 중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우리도 기도하다 보면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엎드리는데,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걸고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된 것이 없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나에게 핀잔 줍니다. 너 그 시간에 밖에 나가서 돈이나 더 벌어오라고, 그게 더 남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비웃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때 둘 중 하나의 선택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포기하든지 끊임없이 기도하든지.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선택은 한 번 더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48절과 49절을 보시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그가 소리 높여 한 번 더 외쳤습니다. 동냥그릇 차일 각오를 하고, 사람들에게 몰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메시아의 길을 한 번 더 가로막고 소리 질러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분은 절박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기도하고 외친 것입니다. 과연 이 절박함이 오늘 나에게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갓난아기를 눕혀놓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로 마룻바닥에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철야하는 것은 예사로 했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가진 것이 없었으니까, 배운 것이 없었으니까, 의지할 피붙이 일가친척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하나님 한 분밖에 기댈 분이 없으니까 그분께 구하고 강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분들이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런 간절함, 절박함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대가 변했다고. 이제는 그렇게 기도하는 시대가 아니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그대로 계시고 하나님의 역사도 여전히 지금도 진행 중인데, 변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변한 것은 사람이 변했습니다. 너무 많이 가졌고 너무 많이 배워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무릎 꿇고 기도하면 다리에 쥐가 내려 견딜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기도가 계속 똑같은 말만 반복되는 공중에 뜬 기도가 우리 기도의 전부 다입니다. 공허하고 헛된 기도만 우리 입술에 맴돌 뿐입니다. 절박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간절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기 이분의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주님의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예수님이 머물러 섰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그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어 세웠습니다. 놀라운 기도입니다. 미사여구가 없어도, 화려하지 않아도, 길지 않아도 간절하고 절박하게 소리 높여 기도하는 이 기도가 주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던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교훈이 되기를 원합니다.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절박하게 매달리시고 주님의 은총을 사모하십시오. 주님께서 길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 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주님 앞에 가서 뭐라 말해야 될지, 절박하게 기도하는 우리에게 이런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4. 겉옷을 내버리는 결단
맹인은 주님 앞에 나갈 때 아주 특별한 자세로 주님 앞에 나갔습니다. 50절을 보십시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앞도 보이지 않는데 막 달려갑니다. 넘어지고 무릎팍이 깨어지지만 달려갑니다.
이 겉옷은 그분에게 인생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맹인에게 겉옷은 어떤 의미일까요? 추울 때 덮고 자는 이불이 되기도 하고, 동냥할 때 동냥 그릇 위에 펴는 담요가 되기도 하고, 길을 걸어갈 때는 입고 다니는 외투가 되기도 합니다. 동냥하는 걸인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입니다. 이것을 벗어 던졌습니다.
4-1. 배수의 진을 치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 번째 의미는 배수의 진을 친 것입니다. 퇴로를 차단한 것입니다. 그것을 곱게 개켜두고 동료에게 맡겨두고 갔다가 일이 잘 되지 않으면 다시 와서 찾아갈 테니 꼭 부탁한다고 그러지 않고 그냥 던지고 갔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다시는 이 자리에 내가 서지 않겠다. 겉옷을 벗어던졌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는 예수님께 부담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4-2. 부르심의 책임을 믿다
두 번째, 겉옷을 벗어던진 행위는 주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 정도의 눈치 정도는 있어야 됩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사실은 부르심의 책임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켰습니다. 자신 없으면 출애굽시켰겠습니까? 출애굽시켰다는 것은 가나안 땅에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함께 표현된 것입니다. 20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을 출애굽시켜서 하나님이 그들을 다 광야에서 굶어 죽게 하실 것 같으면 왜 출애굽시켰겠습니까? 신발이 없어도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옷이 없어도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시고, 농사짓지 않아도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서 배부르게 먹게 하시고, 물이 없으면 반석에서 물을 내어서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에 보면 안식일에는 너희 처소에 불도 피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굶어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불 피우지 말고, 밥 먹는다고 애쓰지 말고 예배해라. 거기에 집중하면 너희 산업을 내가 축복하겠다. 걱정하지 말라. 먹고 사는 것 걱정하지 말라. 안식일에 불 피워서 먹고 사는 것 걱정하지 말고 예배에 집중하라. 그러면 책임지겠다. 하나님의 책임성이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을 부르셨다는 사실은 책임지겠다는 의지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임지지 않을 것 같으면 왜 부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주신 것은 그에 합당한 권능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서 둘씩 둘씩 짝지어 나가게 하실 때 귀신을 내쫓는 권능과 그리고 역사하는 능력, 그들에게 사람을 살리는 능력도 함께 주어서 내보내십니다. 보내실 때는 주님의 책임과 가호가 함께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직분 주셨으면 직분 감당할 능력도 주시고,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으면 가정을 이끌어 나갈 힘도 주시고, 자녀를 주셨다면 자녀를 기를 만한 능력과 물질도 함께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업장이라면 그 사업장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할 줄로 믿습니다. 다른 대책 세우느라 겉옷을 다른 데 챙겨두는 어리석은 자들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절박함과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시면 우리 주님께서 능력으로 도우실 것입니다.
찾아온 기회 절박하게 붙들고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간절하게 기도하시고, 기도의 위기가 와도 주눅 들지 않고 미끄러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겉옷을 내버리고 모든 것 주님께 맡기고 던지고 달려가는 절박한 하나님의 백성 되어서, 눈 뜬 소경 바디매오처럼 우리 인생에도 새로운 역사와 도전과 은총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 인생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박하지 않아서 기회를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소경 바디매오를 통해서 우리의 절박하지 않음과 우리의 믿음 없음을 다시 한 번 살핍니다. 기도의 위기가 찾아올 때 한 번 더 소리 내어 외치는 절박한 자의 호소를 들으시는 우리 주님을 믿고 다시 한번 외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 없는 사람으로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의 삶이 절박하게 호소하고 기도하고 애써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차지하는 믿음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나를 부르실 때 겉옷을 내던지고 달려가는 하나님의 자녀, 믿음의 백성으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