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타신 예수님 (막 11:1-6)
프랑스의 황제였던 나폴레옹은 1769년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스무 살이 되던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납니다. 혁명 이후의 프랑스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이 혼란했던 시기를 나폴레옹은 잘 이용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실력으로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고 제압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자리인 제1집정관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이었지만 내용상으로는 완전한 1인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해 갔습니다.
그의 1인 독재를 지원해 주는 여러 그룹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그룹이 예술가 집단이었습니다. 그 예술가들을 나폴레옹은 잘 대접했고, 예술가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선전하고 선동하는 일에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자크 루이 다비드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1802년에 나폴레옹을 그린 이 모습이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나폴레옹을 기억하는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백마를 탔습니다. 그리고 힘찬 군주의 모습을 보입니다. 붉은 망토를 둘러쓰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본 나폴레옹은 마음에 아주 들었습니다. 다섯 점을 더 주문해서 유럽 각지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의 역사적 배경은 1800년입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를 원정하러 갔는데 제2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전쟁에는 실패했습니다. 지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고 돌아왔던 그 패배의 모습은 이 그림에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고 돌아온 이후에 반성이나 잘못된 참회의 모습은 없고 오히려 강력한 군주의 모습만 그려 놓았습니다.
나폴레옹 사후에 들라로슈는 이 그림을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재구성합니다. 고증을 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은 이런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노새를 탔습니다. 초라한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고 있습니다. 분위기도 음산합니다. 전쟁에서 지고 돌아올 것 같은 불길하고 불안한 느낌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그림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이라고 하면 앞에 보았던 그림, 그것이 나폴레옹의 힘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고 1807년 나폴레옹의 대관식 그림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워 주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점이 문제입니다. 사실 황제의 대관식에서 하이라이트는 교황이 황제 머리에 손을 얹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 기도해 주는 장면, 그 시간이 하이라이트입니다. 하지만 그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황제가 교황 앞에 무릎 꿇는 것을 그림으로 남기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오히려 황제가 스스로 황후의 관을 들고 조세핀에게 관을 씌워 주는 이 모습이 왕의 권위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라 해서 이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그는 프랑스 군대 100만 명을 전쟁으로 몰아내어서 죽음으로 몰아냈던 사람입니다. 나중에 실패한 이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 가서 말년을 쓸쓸히 맞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의 강력한 힘과 능력을 기억합니다. 아마 군주는 이런 것을 기대하고 소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폴레옹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의 군주는 자신의 이미지가 후세에 길이 기억되기를 바라고 소망합니다. 그래서 사실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그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 그분은 왕 중의 왕이시고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신데 그분은 자신의 모습을 억지로 꾸미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나귀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나귀 타신 예수님이 과연 오늘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과연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1. 가난한 자의 동역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또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전부의 기대를 다 걸고 있었습니다. 개인의 기대와 나라와 민족의 모든 명운을 그분에게 다 걸었습니다. 그분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면 온 세상을 뒤집고 우리에게 해방을 남겨 주실 유일한 분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것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시다가 한 곳에서 멈추십니다. 사람들은 급한데, 얼른 가서 예수님이 로마를 치시기를 원하는데, 주님은 가다가 한 마을에 발걸음을 멈춥니다.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수님께서 벳바게와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두 명의 제자들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용은 그것입니다. 건너편 마을에 가면 나귀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는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 새끼인데 그 나귀를 풀어서 데려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내용은 우리에게 낯선 내용이고, 왜 이렇게 하셨을까? 우리는 오늘 이 질문에 몇 가지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1-1. 벳바게와 베다니
첫 번째 질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벳바게와 베다니에 사람을 보내셨을까요? 벳바게와 베다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원래 대도시가 있으면 그 대도시 주변에는 대도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공동체가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대도시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 그 도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군집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예루살렘 주변의 벳바게와 베다니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나병 환자의 집단 거주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끔 방문하셨던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도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의 집도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예루살렘에 가시면서 그 가난한 자들의 동네에 들르십니다. 그곳에 가셔서 주님께서 나귀 한 마리를 요청하십니다. 나귀는 그곳에 흔한 동물입니다. 그들이 농사짓기 위해서, 먹고살기 위해서 항상 가지고 있는 아주 연약한 동물이고 모든 가정에 다 있는 동물이었습니다. 그 동물을 주님께서 요구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주님은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서 나귀를 요구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입니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도 주님의 사역에 동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1-2. 물질이 아닌 마음
예수님 시절이나 오늘 우리 시절이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돈이 있어야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입니다. 예수님 시절도 그랬습니다. 성전에 올라갈 때 재물을 잔뜩 가지고 가야 대접받습니다. 짐승을 많이 가지고 가야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았습니다. 황금 함에 금덩이라도 갖다 놓아야 사람들에게 인정받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신앙생활 할 때는 물질이 있어야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 시절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과 함께 동역했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가난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고,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은 사회에서 유리되고 방황하고 손에 가진 것 없는 사람들, 그분들이 모두가 다 주님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자들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부자들의 관심은 딴 데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었고 로마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권력의 주변에 있을까? 어떻게 하면 권력자들과 손을 잡아서 나의 물질을 더 불릴까? 어떻게 하면 권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들의 관심은 딴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항상 가난하고 힘든 자들과 함께 동행해 가시다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탈 것 한 가지가 필요했는데, 그때 가장 가난한 자들의 마을에서 그 나귀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교회에서,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이 교회 공동체에서 만약 우리 성도들이 물질이 있어야만 교회를 다닐 수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교회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 구조가 타락한 것입니다. 그 구조를 바꾸어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원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가르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5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때도 유효하고 오늘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너희 있는 것 중에 가장 평범한 것 한 마리 가져오라"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주님의 탈 것을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나의 재능 중에 가장 연약한 것으로도 주님은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문제이지 물질의 많음과 적음이 결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겸손하신 왕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습니다. 사실 세상의 군왕들은 나귀를 타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 백마, 준마, 명마를 탑니다. 삼국지에도 보면 적토마가 대단히 훌륭한 말로 등장합니다. 여포가 탔고 나중에는 관우가 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백마, 준마, 명마,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말을 타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스가랴 9장 9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왕과 겸손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적어도 예수님 전까지는 말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어떤 왕도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군림하는 존재였습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존재가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왕을 위해 존재하는 한갓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릅니다. 왕이신데 겸손합니다. 왕이신데 명마를 타지 않습니다. 왕이신데 겸손해서 나귀를 타시고, 나귀 중에 가장 연약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이었습니다. 가지고 누릴 만한데 가지지 않습니다. 누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대접받아야 마땅한데 그분은 대접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대접받을 것을 남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내려놓음이 그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겸손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겸손을 닮는다는 것은 내가 충분히 대접받고 가질 만한 자격이 됨에도 불구하고 사양하고 내려놓고 나누는 것, 이것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반대로 살아갑니다. 나는 가질 만한 자격이 되지 않는데 가지려고 합니다. 누릴 만한 자격이 되지 않는데 억지로 누리려고 애를 씁니다. 거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거기에서 그런 척하는 일이 생겨납니다. 위선이 생깁니다.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거짓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본모습은 사라지고 거짓과 위선의 가면과 껍데기만 존재하게 됩니다. 불쌍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고, 오히려 예수님처럼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영적 순결의 요구
또한 이 말씀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의문을 풀어야 되는 것은 왜 나귀 새끼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히 한 번도 사람을 태워 보지 않고, 짐을 한 번도 실어 보지 않은 나귀 새끼, 왜냐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나귀 새끼는 주님이 가시기에 부담스럽고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태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타시다가 떨어지실 수도 있습니다. 놀라서 버둥거리면 주님이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 번도 사람을 태워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귀가 우리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 마음속에 한 분, 주님만 모시기로 결정한 삶,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 아닌 다른 주인을 모시지 않기로 결단한 사람, 이 한 분만이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수없이 많은 주인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주님을 모시기 전에 세상의 물질도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고, 다른 사람도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고, 내가 줄을 대고 싶은 사람도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주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두 주인을 모시고 있다면, 오늘은 이 주인을 태워 다니고 내일은 저 주인을 태우고 다니고, 신앙생활할 때는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고 세상에 나가서는 다른 주인을 태워 다니면, 주님은 그런 사람은 나를 모실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실 만한 자격이 되는 단 한 사람, 그 사람은 영적으로 정결하고 영적으로 순결한 사람입니다. 이 한 사람이 주님을 모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명마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폼 나는 명마나 백마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백마나 명마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한 가지 유일한 관심이 있다면 정결하냐, 청결하지 못하냐, 네가 주님 한 사람을 모시기 위해서 이토록 그동안 너의 영혼을 비우고 정결하고 깨끗하게 준비했느냐, 이 한 가지만 우리 주님은 관심이 있으십니다.
주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내가 명마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타고난 게 뛰어나지 않아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백마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순결하고 마음이 깨끗해서 오직 주인 한 분, 주님 한 분만 모실 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주님은 나를 쓰실 것입니다. 그 주님의 쓰심과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순종을 요구하시는 주님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사실 이 명령은 두 명의 제자들에게 굉장히 부담스러운 명령입니다. 이렇게 가서 남의 집에 매여 있는 나귀를 풀어 오다가 도둑으로 몰리면 어떻게 합니까? 이해되지 않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어보려고 해도 물을 만한 분위기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 몰려 있습니다. 자신은 의심이 가득합니다.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입니다. 평소에 예수님 같으면 이런 명령을 내릴 분이 아닌데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나와 두 명에게 주님은 이 명령을 내리실까? 이런 의문을 가득 안고, 의심을 가득 안고 두 명의 제자는 길을 나섭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주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데 이렇게 비합리적인 명령을 내리실 때는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순종의 여부를 보시려고 그것뿐입니다.
4-1. 잘못된 믿음의 순서
믿음 생활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머리로 이해되어야 되고, 두 번째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게 이해가 되어야 나는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머리가 이해되지 않으면, 내 마음으로 열려서 수용되지 않으면 나는 어떤 말씀도 순종하고 수용할 수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 말씀 한 절 한 절 읽어 보면 내 머리로 100퍼센트 이해되고 나의 좁은 소견의 가슴으로 받아들여서 순종하고 따를 수 있을 만한 말씀이 몇 구절이나 됩니까? 우리가 그런 자세로 신앙생활 한다면 평생 세상 떠날 때까지 한 말씀도 따르지 못하고 한 말씀도 순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그런 논리를 가져오는 것은 세상의 권세 잡은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4-2. 순종 후에 깨달음
말씀이 먼저 있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의 말씀이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일단 한번 행동해 봅니다. 일단 따라가 봅니다. 순종해 봅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깨닫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이 이해를 시켜 주시는구나. 모든 주님의 섭리하심과 모든 주님의 위대하심을 이미 내 순종으로 인해서 열매 맺고 결정되어집니다. 그제서야 머리로 이해되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아 주님 그런 분이셨군요 하게 됩니다. 딱 한 번만 그 경험을 하고 나면 그다음은 우리가 그 패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최측근인 두 분에게도 그것을 가르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 의심을 가지고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제자들은 길을 나섰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가 보니 진짜 있습니다. 나귀 새끼가 있을 거라 했더니 진짜 있었습니다. 제자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어라, 진짜 나귀가 있네. 그러면서 주변을 살폈을 것입니다. 빨리 풀어 가자. 사람들 보기 전에, 괜히 사람 만나면 성가시고 번거로우니 빨리 풀어 가자. 얼른 나귀를 풀고 있는데 곁에 있던 사람이 목소리를 높입니다.
5절입니다.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놀랐을 것입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됩니까? 당황합니다. 거짓말할까? 나 길을 잘못 들었다고 얼버무릴까? 아니면 그냥 도망가 버릴까?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감싸고 돕니다.
그때 그들에게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사실 이 말씀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누가 주가 쓰시겠다 하면 보내겠습니까? 그 주가 누군데 이렇게 물으면 그다음 어떻게 대답해야 됩니까? 비합리적인 줄 알면서도 지금 대답할 말이 그 말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두 명의 제자는 그렇게 대답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합리적인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행하니 허락했습니다. 가져가라고. 나귀를 끌고 돌아오면서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원하셨고, 우리는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런데 가서 실제로 해 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구나. 그러면서 그들은 벅찬 감격을 가지고 주님 앞에 달려왔을 것입니다.
4-3. 믿음 생활의 패턴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나면 제자들만 남아야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육체로서의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만 남아 있습니다. 이 말씀은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때로는 나와 맞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순종하고 따라가 보면 그 이후에 주의 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 생활의 패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이 말씀을 하셨고 이렇게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처음 만난 사건이 나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물고기 한 마리 못 잡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말씀이 있으니 내가 순종해 보겠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처음부터 주님은 그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처음부터 일관되게 끝까지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이해되어야, 가슴이 뜨거워져야 믿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의 인본주의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이 순서를 바꿔 놓은 것입니다. 다시 순서를 제자리로 돌려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따라가 보면 그다음 이해되고 마음이 열립니다. 놀라운 역사가 우리 인생의 창고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
나귀 타신 예수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동역자로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 세상의 모든 왕 중의 왕이시지만 그러나 겸손함을 보이신 왕이십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 영적 순결을 요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의 음성에 따라가고 순종하시는 아버지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복된 성일 허락하여 주시고 주 예전에 나오게 하시며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백마나 명마를 타지만 주님께서는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운 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평범한 것을 얻어 가시고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도 주님의 동역자 되어서 나의 가지지 못한 것을 걸림돌로 삼지 않도록 도우시고 주님의 위대한 동역자로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겸손하신 주님 본받아 우리도 겸손한 삶을 살도록 도우시고 영적 순결을 요구하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의 내면을 정결하고 순결하게 만들어 주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주의 동역자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때론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도 주의 말씀이라 순종하고 닮아가고 따라가는 믿음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