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강 / 호산나 외치는 사람들 (11:7-11)

호산나 외치는 사람들 (막 11:7-11)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한 편에 서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이 연합군을 이루어서 약 4년 동안 싸웠습니다. 결과는 연합군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났다고 해서 전쟁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쟁 배상금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됩니다. 전쟁 당사자들이 함께 모여서 어떻게 전쟁 배상금을 분담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독일에게 부과된 전쟁 배상금은 1,320억 금 마르크였습니다. 그 당시 규모로는 거의 천문학적인 액수였습니다. 그 당시 독일의 1년간 세금 수입이 60억 금 마르크였으니, 단순히 계산해도 약 22년 동안 세금 전부를 고스란히 갖다 바쳐야 해결되는 거대한 금액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쟁 배상금이 매겨지자 그때부터 독일은 절망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끝났구나, 특히 젊은이들은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아무리 열심히 아껴도 그것은 고스란히 전쟁 배상금으로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모두가 낙심한 채로 세월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때 그런 틈바구니를 비집고 일어서서 정권을 잡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합니다. 갚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양을 찾았습니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자본과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던 유대인들 때문에 우리 민족이 이렇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사실 터무니없는 논리였지만 희생양이 필요했던 독일인들, 그리고 영웅이 필요했던 독일인들은 히틀러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망과 낙심, 민족주의와 선동가적 기질을 가진 히틀러가 함께 결합해서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통렬한 자기반성이 없었습니다. 왜 우리가 전쟁에 졌는지, 왜 우리가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되었는지 이런 반성이 없었고 희생양만 찾았기 때문에 그들은 또다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1. 영웅을 찾는 사람들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 시절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은 똑같이 영웅이 필요했습니다. 아주 힘겹고 어려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그들은 자존심이 밑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도대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영웅이 필요했습니다. 영웅을 찾았는데 그 영웅 노릇을 할 수 있는 분이 눈에 보였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에게 선한 손길을 베푸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우리의 영웅이 되실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귀 타고 입성하시면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입성 때 벌어졌던 일과 입성 이후에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민중들의 마음속 깊이 있는 그들의 탐욕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의 삶을 새롭게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나귀를 가져온 두 명의 제자들은 안장을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등에 얹고 예수님을 그 위에 타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길바닥에 자기 겉옷을 깔아 놓습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메시아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0절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들은 다윗의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사실 이때 이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던 이때보다 다윗의 나라는 천 년 전에 있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나라를 그들은 꿈꾸고 있습니다. 다윗의 나라가 영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전장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다윗의 시절에 여러 나라들을 복속시켰습니다. 갈 때마다 승리했습니다. 찬란했던 영광의 나라였습니다. 다윗 왕국의 백성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자부심이 넘쳤습니다. 그렇게 찬란했던, 위대했던 나라로, 천 년 전의 나라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분이 오늘 지금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저 예수님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자존심은 로마인에게 갈갈이 찢겨 있었고 짓밟혀 있었습니다. 식민지 처지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הוֹשִׁיעָה נָּא)!" 호산나의 뜻은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입니다. 이제 우리를 이 지긋지긋한 식민지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1-1. 반성 없는 열망

우리는 이들의 외침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들의 외침이 정당합니까? 아니면 정당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이 이제 우리를 식민지에서 해방해 달라고 자기의 영웅으로 생각한 분에게 외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그 자리에 우리가 있었더라도 우리는 호산나 하고 외쳤을 것입니다. 식민지 생활이 너무 비참하고 치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이들의 무서운 죄성을 보아야 됩니다. 아주 심각한 죄성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반성이 없었습니다. 왜 우리가 식민지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헤매고 있어야 되고, 600여 년 동안 식민지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자신의 삶을 뿌리 깊이부터 반성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식민지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절 이때로부터 약 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586년에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깁니다. 주인만 바뀝니다.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페르시아에서 그리스 제국으로, 그리스에서 로마로 주인만 바뀌었지 그들은 약 600여 년 동안 여전히 식민지였습니다.

1-2. 근본 원인의 망각

최초에 그들이 식민지가 될 때 그들은 국력이 약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에게 무릎 꿇고, 탐욕 때문에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돈 때문에, 물질 문제 때문에 엎드렸습니다. 우상숭배에 엎드리면서 그들은 영적으로 타락했고,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성적으로 음란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선지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선지자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그들을 하나님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고, 깨닫게 하시려고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초의 원인이 되었던 우상숭배, 탐욕의 문제, 물신 숭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600년 동안 그대로 그 문제는 오래된 해묵은 문제로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 있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산나!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해방을 주십시오! 식민지 백성으로 부끄럽습니다!" 이런 말만 외치고 있었습니다. 왜 식민지가 되었는지 모르고, 왜 600년 동안 이런 상황이 지속되어 있는지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 없이 자꾸만 해방만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에 나라가 독립이 된다 해도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나라가 독립을 한다 한들 그들은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여전히 물질이 최고의 우상으로 있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어떻게 해야 됩니까? 또다시 나라를 빼앗아야 됩니다.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들에게 나라의 주권 회복은 먼 나라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가서 죄 문제를 해결해야만 그들의 그다음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 해결임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의 민족 해방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뒤집어진 것입니다. 틀어져 버린 것입니다. 여전히 이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정치적 해방자로 생각하고 "호산나! 구하옵나니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이들의 문제를 보며 우리를 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 나라 국민들에게 가장 소원이 무엇이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경제라고 말할 것입니다. 경제가 심각합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젊은이들은 취업 때문에 문제고, 취업이 되지 않고, 중년은 정리해고의 불안에 떨고, 나이 드신 분들은 노후에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걱정이 앞서고 있습니다. 집값은 계속해서 오르고, 이런 상황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모든 분들이 경제문제를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위기 이후로 경제문제가 온 나라 백성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치인들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정권을 쥐어 보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성공 신화를 쓰신 분을 대통령으로 세우기도 했고, 아버지 시절 위대한 나라를 만들었던 그분의 딸을 대통령으로 세워 보기도 했습니다. 여러 정당들에게 정권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린 여전히 경제문제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만 해결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가 누구든지 정권을 주겠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선거를 앞두고 있는 때에도 여전히 경제문제가 여러 정당의 최우선 가치와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경제문제 이전에 우리의 죄가 도외시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 지경까지 되기까지 만들어 버린 우리의 죄성에 대한 심각한 자기반성은 우리에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경제가 부흥하면 그 많은 돈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 것 같습니까? 더 많이 탐하지 않겠습니까? 더 심각한 죄가 온 세상에 창궐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오늘 이 시대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기를, 조금 하고 많은 것을 가지기를 사람들은 꿈꾸고 있습니다. 이른바 일확천금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 죄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정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땀 흘리고 일한 대로, 네 손이 수고한 대로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대는 그런 정직과 땀의 가치와 노동의 신성함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투자를 말하면서 사실은 투기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것이 돈 버는 가장 빠른 길이 되고 그런 방식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이 죄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이거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이제는 고치고 살겠습니다" 말하지 않고, 경제문제만 말한다는 것이 예수님 시절의 유대인들과 똑같은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 아닙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죄 문제부터 살펴보라. 심각한 죄 문제, 땀의 가치를 노동의 신성함을 인정하지 않는 너희들의 죄 문제를 다시 한번 살펴보라. 그리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라. 여전히 물신을 숭배하고, 여전히 음란하게 살아가고, 여전히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무릎 꿇고 있는 너희 자신, 이것부터 해결해야 그다음이 해결되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시대 많은 교회들의 문제, 교단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세가 주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세가 갈수록 꺾이고 있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가나안 성도'들만 양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단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가, 왜 젊은이들은 교회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말씀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와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지 못하고, 참된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치료하지 못하고, 현실적 문제만 붙들고 있는 우리 교회나 이 나라나 예수님 시절의 유대인들이나 다 같은 입장 아니겠습니까?

우리 자신도 메시아를 현실의 메시아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메시아. 그런데 내 인생의 지금의 문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 나의 죄 문제라는 사실. 이것부터 반성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그다음 실타래가 풀려갈 것입니다.

2. 성전의 본질

예수님께서는 "호산나!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그렇게 외치는 자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죄 문제에는 깜깜하고, 자신의 먹고사는 문제와 나라의 독립 문제만 붙들고 있는 자들. 주님은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2-1. 성전에서 실망하신 예수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그다음 주님의 행보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로 나가시니라"

만약 예수님께서 정치적 선동가였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지지자들을 데리고 광장에서 집회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을 것입니다. 헤롯의 궁전에 들어가서 헤롯을 끌어내고, 빌라도의 관저에 들어가서 빌라도의 관저에 불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를 뒤집어 엎고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정치적 해방의 메시아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성전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 정치적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둘러보셨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보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도대체 성전에 왜 가셨으며 무엇을 둘러보셨을까요? 그 당시는 유월절 절기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가셔서 더 이상 이 성전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유월절 절기 준비로 분주한 모습만 보았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이 좌판을 까는 모습을 봅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이 좌석을 설치하는 모습을 봅니다. 짐승을 파는 사람들이 짐승 우리를 만드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오시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가셨는데 기도할 곳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기도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도무지 시끄러워서 그 자리에 엎드려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할 곳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조용히 묵상할 곳이 없었습니다. 성전이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성전이 돈을 벌기 위해서 눈이 시뻘개진 사람들의 도둑놈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그 성전에서 실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오셨습니다.

성막 시절이나 솔로몬 성전 시절, 포로기 이후의 스룹바벨 성전 시절에 반드시 세 가지가 있어야 됐습니다. 성전 뜰에 들어오면 번제단이 있어야 됩니다. 번제단에는 가지고 나온 제물을 태워 드리는, 예배드리는 번제단입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촛대가 있습니다. 금 촛대입니다. 거기에 불이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성도들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면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 하나님 말씀이 있습니다.

성전은 요약하면 예배드리는 곳이고, 말씀 보는 곳이고, 기도하는 곳입니다. 누가 언제 와도 마음껏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들을 수 있어야 되고, 내 마음과 뜻을 다해서 마음껏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절의 이 성전은 본질을 상실했습니다. 비본질이 본질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돈 버는 장사치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여기를 성전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보시고, 이제는 여기에 희망이 없구나, 이제는 여기에 더 이상 내가 소망을 둘 수 없구나 하시고 나가셨습니다.

오늘 우리 성전이 어떠해야 됩니까? 오늘 이 시대 하나님의 교회에 만약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예수님이 마음껏 하나님께 기도할 공간은 있는지,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는 되는지, 말씀은 풍성하게 전해지고 선포되고 있는지,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드림의 처소를 제공하고 있는지. 성전의 본질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비본질이 본질을 잠식하는 성전이라면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그 성전이 아무리 화려하다 하더라도, 그 성전에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하더라도, 그 성전은 존재가치가 없는 성전입니다.

2-2. 찾아가시는 성전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성전에서 실망하시고 그리고 길을 나섭니다.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로 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나가셔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왜 베다니로 가셨을까요? 베다니는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홀로 오시기 전에 들렀던 곳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를 거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곳에 사람을 보내 나귀를 데려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가셨습니다. 왜 가셨을까요?

가난한 자들이 그곳에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와서 살펴보신즉 도무지 이 유월절 절기에 가난한 베다니 동네 사람들은 이 성전에 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 베다니 사람들에게 돈이 있어야죠. 성전에 짐승을 사고파는 데 베다니 가난한 사람들이 짐승 한 마리 살 돈이 있어야죠. 그런 사람들은 유월절 절기를 즐길 만한 환경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성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올 수 없겠구나 보시고 직접 예수께서 베다니에 내려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성전이 대신, 이 성전 되신 예수님께서 움직여 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21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성전 됨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전 된 자기 육체. 예수께서는 직접 자신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건물이 화려하지만 이제는 썩어 빠져서 더 이상 성전 구실을 하지 못하는 이 성전이 아닌,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난한 자들 그들에게 가셨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베다니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주님이 직접 가셔서 유월절 절기를 함께 즐기자, 그들과 함께 예수께서 그 자리에 임재하신 것입니다.

타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그들의 슬픔을 위로하십니다. 상황이 되지 못해서, 여러 가지 환경 때문에 하나님께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를 지어서 수치심과 부끄러움 때문에도 하나님께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보면 직접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십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부끄러워하는 그들을 찾아가셔서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벨을 죽인 가인을 찾아가십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 낙향해서 물고기 잡고 있는 베드로를 예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 많은 존재들, 죄 때문에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서 직접 나오지 못하는 이들, 주께서 직접 찾아가시고 위로하시고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찾아가시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긍휼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에 보면 선지자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하나님이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냈습니다. 그 과부는 가난했습니다. 먹을거리가 없었습니다. 가루가 조금 있었고, 기름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것 해 먹고 아들과 함께 먹고, 이제는 가난에 굶어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냅니다. 사르밧 땅 과부에게 보냈습니다. 먹고 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먹거리를 해결해 줍니다. 병든 아들도 고쳐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을 찾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 예수가 되어서 이 시대의 상처받고 자기 발로 나오지 못하는 이들, 그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전파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 예수가 되어서, 나도 예수님처럼 내가 가는 그곳에 복음이 전파되고 능력이 나타나고, 내가 긍휼한 마음으로 예수의 심장으로 그들을 찾아가면, 내가 그 작은 예수로 그들을 돕는 예수님의 손길, 발걸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 줍니다. 인생의 많은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해결해 달라고 주님께 외치지만, 그러나 내 내면이 변하지 않고 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외친다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전은 본질이 중요합니다. 본질을 세우는 성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찾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닮아서 흘러넘치는 교회, 찾아가는 작은 예수님 같은 사람으로서의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절기를 보내면서 주님 앞에 나와 엎드리고 예배합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당면한 현실 문제가 너무 심각합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합니다. "호산나!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그러나 그때 우리에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 죄 문제부터 해결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속 깊이 있는 탐욕의 문제, 물신을 숭배하는 문제, 여전히 우상에게 무릎 꿇고 있는 이 문제,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 주님 앞에 나와 소리 지르고 엎드리는 죄를 허락하지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죄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주님께 엎드리는 참으로 외로운 백성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본질을 지켜 나가도록 주께서 도우시고,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어서 이 시대의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자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전파하는 믿음의 선도, 작은 예수 공동체를 대대로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