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막 11:15-18)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왕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한 명이 헨리 5세입니다. 헨리 5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이전의 영국과 이후의 영국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영국은 미미한 섬나라에 불과했으나, 그 이후에는 유럽 대륙에 군림하는 제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헨리 4세는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아들의 성격이 소심하고 유약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그 당시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나서 헨리 5세는 1413년 왕이 됩니다.
실제로 그가 왕이 되고 난 이후에 전쟁을 그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전쟁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측근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전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걱정은 현실이 됩니다. 프랑스에서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암살 음모가 우여곡절 끝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 사건 이후로 헨리 5세는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내가 먼저 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당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그의 내면을 휘감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결단합니다. 영국군을 총집결시켜서 프랑스와 전쟁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바라던 바였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 정규군의 병력이 영국 병력의 약 5배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약 5배가 넘는 프랑스 정규군을 영국군이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실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헨리 5세는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전쟁 포로로 사로잡은 사람들을 전부 다 교수형에 처해버립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말립니다. 지배국의 왕은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다음 통치가 수월합니다, 왕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5세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였고, 실제로 실행했습니다. 그 이후에 인근 주변을 다 불태웁니다.
주변이 경악합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많은 사람이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전쟁에 불이 없는 것은 소시지를 겨자 없이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불을 질렀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폭군의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적국 프랑스에서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평화를 사랑했던 그가 왜 이런 폭군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 겁을 내는 것, 이 두려움은 나중에 자라서 큰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그 당시 유대 종교 권력가들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유대 종교 권력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파생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의 실체와 근원을 밝혀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직면하고, 이 두려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들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오늘 우리 마음의 두려움을 치료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주님은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을 따라 살고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을 따라 살지 않는 성전을 향한 예고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오셨습니다.
1. 성전 정화 사건
마치 계획이라도 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성전 안에서 당신이 하시고자 했던 일을 속전속결로 해치우십니다. 15절과 16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성전 안에 장사치들이 잔뜩 있었습니다. 매매하는 자들, 짐승을 파는 자들입니다. 유월절 예배에 쓰일 짐승을 파는 자들이 성전 안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성전 안에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전 안에 사람의 얼굴이 들어간 돈을 통용할 수 없게 되자, 그 성전 안에는 옛날 유대인의 화폐를 당시 로마 화폐로 바꾸는 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을 주님이 둘러엎으셨습니다. 새장도 잔뜩 있습니다.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새장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당신의 있는 힘껏 성전에 있어야 하지 않을 것들을 하나하나 완전히 정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무서운 모습이고 예수님의 격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시선은 유대 종교 권력가들의 시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성전을 훼방하는 모습으로 봅니다. 난동꾼으로 보았습니다. 유월절 잔치를 완전히 망치는 예수님의 망령된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시선도 있습니다. 두 번째 시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건 아닌데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과연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성전에 사고파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성전에 돈 바꾸는 사람들, 짐승 파는 사람들이 있는 이 성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속 시원한 눈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시선을 가진 사람들의 속마음을 한번 되새겨 봐야 됩니다. 그들이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것이 잘못된 것을 알았더라면 왜 행동하지 못했을까요? 왜 그들은 가만히 있었을까요? 지금까지 이 성전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그들은 가만히 있고 행동하지 못하는, 고민하는 지성이 되었을까요? 아마 두 가지 부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득권 집단이 있었다면 그들도 역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이익을 나누고 살았을 것입니다. 자기도 받아먹은 것이 있으니, 자기도 그들과 함께 한통속이니 감히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도 뒤가 구리니 앞에 나서서 소신껏 발언할 수 없는 사람들도 한 부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힘이 없고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목소리 높이면 나에게도 피해가 가고, 나와 함께하는 가족이나 공동체 모두가 손해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랬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성전은 이 악한 일을 감당하며 진행하면서 여기까지 흘러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런 일을 행하시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1. 잃을 것 없는 주님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셨을까요? 우리 주님은 잃을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십자가를 앞두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얼마 지나지 않으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고 매 맞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제 곧 죽음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 아무것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가장 겁나고 무서운 것이 죽음인데,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주님, 아무것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잃을 것이 하나도 없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우리 주님은 하나님 한 분의 명령을 듣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한 분이 계신데, 그 한 분은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내가 보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나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 가려고 애를 쓰고 노력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면 거룩한 분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관계도 신경 쓰이고, 기득권도 신경 쓰이고,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신경 써야 합니다. 얼마나 복잡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부디 우리는 위에 계신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생활이 단순해집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할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위해서 이것은 틀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말할 수 있는 정직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1-2.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
우리 믿음의 선배들 중에는 위로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개혁을 이루어간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중에 한 분만 예로 든다면 일사각오를 가지고 살아갔던 주기철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순교자입니다. 그분은 일사각오의 신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다 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한 번 죽는데 한 번 죽을 때 잘 죽어야 되겠다, 늙어서 병들어서 죽는 것도 죽는 것인데 중간에 죽을 것 같으면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그렇게 죽어야 가치 있는 죽음이 아니겠는가 하고 그분은 그렇게 마음먹고 다짐하며 살았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되었습니다. 일제는 신사에 무릎 꿇고 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상 앞에 절하는 일을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일제의 총과 칼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모진 고문도 견뎌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한겨울 그 추운 독방에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그는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하십니까?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면 나중에 심판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때를 상상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께서 너 왜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죄짓다 왔느냐, 우상에게 절하다 왔느냐 그렇게 물어보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우리가 한 번 사는 인생 하나님 한 분 두려워하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저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 하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언약의 백성,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성전 정화의 의미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성전을 정화하신 후에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십니다.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께서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속된 말로 하면 난장판입니다. 성전의 상을 다 뒤집어엎고 매매하는 자들을 다 내쫓으셨습니다. 성전이 다 먼지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한가운데 서서 가르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느냐, 어찌하여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느냐. 사실 흥분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을 때 차분하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이 성전을 뒤집어 놓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주님에게는 여전히 성전이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곳을 청소한다고 하면 희망이 있기 때문에 청소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를 깨끗하게 손대어 청소하고 나면 그다음 여기서 깨끗하게 살고 누리고 여기서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꿈꿀 수 있다고 여기고 청소하는 것입니다. 가전제품이 고장났습니다.
그 가전제품을 고칠 가능성이 있을 때 그때 장갑을 끼고 손에 기름을 묻히고 내가 직접 연장을 들고 고치는 것입니다. 돈을 들여서 AS 센터에 보내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거나 가능성이 없으면 청소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들이지 않고, 노력을 들이지 않고, 애쓰거나 힘쓰지 않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는 성전에 여전히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고쳐서 쓰시려고 예수님께서, 그리고 그 성전에서 말씀을 선포하신 이유는 제대로 가르쳐서 정말 이 성전이 기도하는 곳임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손을 대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깊은 의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2-1.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
불행하게도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기원전 8세기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여전히 희망이 있음을 표현하시려고 선지자들을 집중적으로 보내셨습니다. 호세아, 요나, 아모스를 순서대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을 시켜서 말씀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않습니다.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남유다가 망하기 직전에 하나님은 여전히 남유다에 희망을 보셨습니다. 그곳에 믿음의 대가들인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위대했던 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 순서대로 와서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을 거스르지 말고 이 말씀 듣고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라고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돌이키지 않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성전이 불탔습니다.
성전이 다 하루아침에 내려앉았습니다. 예수께서 여기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는 희망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여기에 희망이 있구나, 예수님의 꿈이 여기에 있구나. 주님은 이곳에서 성전을 뒤집어 놓으시면서 제발 제대로 살아라, 제발 바르게 살아라 말씀하셨습니다.
2-2. 교회를 향한 희망
오늘 우리 교회를 보는 주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이 땅의 교회들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희망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언론은 교회를 주목합니다. 교회가 이러면 안 됩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며 여러 가지 지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기 싫어합니다. 언론을 가지고 여러 가지 말을 합니다. 언론이 친교회적이지 않다, 반기독교적이다 하며 언론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물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살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서 있으면 칭찬 듣지 왜 비난받겠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세상의 탐욕대로 흘러가기 때문에 비난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여전히 이 교회는, 이 시대의 교회는 주님의 희망이고 사람들의 희망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그마한 잘못을 범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 세상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온갖 죄 가운데 살아도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불만을 가집니다. 왜 하나님은 내 인생에만 이렇게 관심이 많고 개입하실까? 나는 작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가만히 두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살인한 가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너에게 표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는 가인에게 하나님이 희망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어쩌면 그때가 마지막 경고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돌이키지 않으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중한 병을 우리가 앓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 종교 지도자들의 두려움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당시 유대 종교 권력가들은 예수님의 그 귀한 마음, 이제 너희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내가 선물하고 싶다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질주합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이러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셔서 사람들에게 놀라운 메시아의 능력을 행하실 때부터 그들의 눈은 예수를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보내서 그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과연 그에게서 잘못된 것이 있는지 찾아내라고 했습니다. 미션을 가지고 예수를 따라다닌 많은 바리새인, 서기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예수님은 걸려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성전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종교 권력가들은 옳다구나, 이제 걸려들었구나, 그렇지 않아도 보기 싫었는데 이제 한 건 크게 하는구나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제재하지 않습니다.
성전을 정화하고 뒤집어 놓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하는지 보기 위해서, 어디까지 부수고 파괴하는지 보기 위해서 가만히 둡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를 잡아 죽일 명분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 뒤집어 놓고 설교하실 때까지 그들은 예수의 몸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성전을 훼방하고 유월절 잔치를 파괴한 죄, 성전의 기물을 파쇄한 죄, 그리고 게다가 명예를 훼손한 죄까지 더해졌습니다.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하는 순간 유대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을 강도로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회의를 소집합니다. 그 회의는 이미 결론이 나 있는 회의였습니다. 예수를 죽이겠다는 결론을 이미 내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죽이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방법이 문제라는 뜻입니다.
3-1. 백성에 대한 두려움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이 방법을 회의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마음속 깊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 번째 두려움은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두 번째 두려움은 예수님 자체를 두려워했습니다. 백성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백성들이 모두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혹세무민하고 살았는데 백성들의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글을 몰랐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종교 권력가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유린하고 다녔습니다. 돈을 많이 가져와야 하나님 기뻐하신다, 재물을 많이 바쳐야 하나님께서 너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반대로 가르치십니다. 과부의 두 렙돈이 귀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계속 전파되면 여론은 좋아지지 않을 것이고, 여론은 예수의 편이 될 것이고, 지금까지 혹세무민하고 살았던 자신의 종교 권력이 위협을 받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18절 말씀에 보면 대제사장들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한 분이 세워지면 종신직입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은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던 그 당시에는 대제사장이 여럿 있었습니다. 1년에 한 명씩 대제사장이 세워졌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 종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로마와 헤롯에게 가서 돈을 주고 대제사장 직을 샀기 때문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직을 샀기 때문에 이 돈을 뽑아먹을 수 있는 대단한 이벤트가 1년에 세 번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유월절 같은 유대인의 명절에 판을 깔아주고 뒷돈을 받습니다. 그 돈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이제 민중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면, 백성들이 영원히 깨어나기 시작하면 이제 지금까지 누렸던 종교 권력과 엄청난 이권에 개입할 수 없게 되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향유했던 많은 권력들, 그 엄청난 돈의 권력을 이제는 더 이상 놓아야 되는 시기가 다가오는구나, 더 이상 심각해지기 전에 예수를 죽여 없애자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3-2.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
두 번째 두려움은 예수님 그 말씀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도 어려서부터 말씀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양심이 화석화되어 있었지만 잠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자신의 양심이 찔림을 받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찔림을 받아서 견딜 수 없습니다. 두 갈래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는 탐욕의 마음과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오는 진리의 마음이 충돌합니다. 이 마음이 충돌할 때 그들이 정말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예수의 말씀을 따라갔어야 옳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선택을 해버렸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패착이었습니다.
4.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실 수 있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단순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두려움은 하나님이 준 마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면 두려움은 누가 준 것입니까? 사탄이 준 것입니다. 내가 이 권력을 놓으면 죽을 것 같은 그 마음은 사탄이 준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놓으면 굶어 죽을 것 같은 이 마음, 이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결코 아닙니다. 놓아보십시오. 죽지 않습니다. 관계를 단절해 보십시오.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우리가 물질의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4-1. 바울의 고백
놀라운 축복이 우리 인생에 부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인생과 부어짐을 경험했던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빌립보서 4장 18절 말씀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곳은 감옥입니다. 로마 감옥에서 영치금을 조금 가지고 온 에바브로디도 편에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풍족하다. 이 놀라운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위로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한 바울이 고백할 수 있는 위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굶어 죽을까 두렵고, 어떻게 살까 두렵고, 관계가 끊어질까 두렵고,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것이 겁이 납니다. 하지만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시면 그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겁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지키시고 책임지시고, 심판 날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며 안아주시고 손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기 원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관계를 두려워하고, 물질을 놓으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는 예수님처럼 세상에 거칠 것이 없고 겁날 것이 없는 믿음의 백성으로 용기 내어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