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으라 (막 11:19-25)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에 대한 탐구를 과학이라고 합니다. 과학적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때로는 절대적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가끔씩 뒤집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고대 세계 감각적 사고에서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바다를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망망대해 바다에 배를 띄우고 그 배를 타고 끝까지 가다 보면 언젠가는 낭떠러지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 낭떠러지 끝에 떨어지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에서 배 타고 멀리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1543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집어지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을 발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그 책을 발간합니다. 물론 그가 젊어서 지동설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 가톨릭 세계관에서 그 책을 내었다가는 목숨이 온전치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묵혀 두고 기다리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 책을 출간합니다. 하지만 그 책의 영향력은 미미했습니다. 사람들이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609년에 천재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정당했음을 실험으로 입증합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1632년 결국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을 받습니다. 법정에 서서 가톨릭, 그들의 종교 권력에 의해서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게 됩니다. 하지만 지동설이 천동설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이미 입증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그들의 지평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빛에 대한 이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거치면서 빛은 입자라고 믿었습니다. 작은 알갱이가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빛은 파동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닐스 보어 같은 과학자들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닐스 보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빛은 입자와 파동으로 되어 있다. 두 가지가 상호보완적이다.” 상보성의 원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상보성의 원리는 현대물리학, 양자물리학의 뿌리가 되고 근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여겼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바뀌어지는 것을 보면서 당혹감을 느끼고 굉장히 힘겨워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고대 시대 사람들은 손가락 열 개를 가지고 수를 셌습니다. 그런데 종이가 발명되고 필기구가 발명되고 나서는 종이에 수를 쓰면서 계산을 합니다. 조금 더 지나면서 주판으로 계산을 합니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며 간단한 전자계산기가 발명됩니다. 조금 더 현대화되면서 컴퓨터로 계산을 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는 컴퓨터가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살면서 내가 지금까지 절대 가치로 믿었던 것들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급속도로 변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어디에 내 지평을 잡아야 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사람들은 모두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믿음의 뿌리
신앙의 영역으로 옮겨 오면, 우리는 다 신앙인들인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 불변의 가치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은 하루아침에도 열두 번도 더 바뀝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존재 근거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야말로 영원토록 불변하신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시고 장차 오실 우리 예수님을 보내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존재 지평이 무너지고 바뀌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 한 분은 변함없음을 고백하는 은혜의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1. 무화과나무의 저주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을 일으키시고 성전 밖으로 나가십니다. 하룻밤을 모처에서 유하시고, 그리고 날이 밝자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베드로와 제자들, 예수님과 함께 들어오시다가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발견합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님께서 며칠 전에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하나도 없었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뿌리부터 완전히 말라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소서, 예수님 당신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이렇게 말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호들갑 떨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가 곧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이렇게 보기에는 멀쩡한데 속이 곪아 있고 썩어 있으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곧 말라 비틀어지고 파괴될 것을 예수님이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산 제적 예언입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후 70년이 되면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들어와서 성전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모두 파괴하는 사건이 곧 닥쳐오게 됩니다. 지금도 성지에 가면 파괴된 성전이 그대로 있습니다. 성전은 다 무너져 내리고 서쪽 성전 벽만 남아 있습니다. 이른바 통곡의 벽입니다. 그렇게 통곡의 벽 하나만 남아 있고 성전이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처럼 성전이 온전히 다 파괴되고 다 쓰러져 버리고 없을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1-2. 유대인에게 성전의 의미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태어나자마자 난지 8일 만에 나와서 성전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철이 들고 나서부터 1년에 세 번씩 성전에 와서 유월절 그리고 그 외에 여러 명절에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예배 드립니다. 예수님도 어린 시절 성전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나라를 잃고 성전이 파괴되고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70년 동안 포로 생활이 끝나고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성전을 재건한 일이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함께 한 마음이 되어서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가장 먼저 학사 에스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나라가 망한 이후에 흩어져 살아갔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 성전에 올라와서 순례하는 것이 그들의 삶에 가장 훌륭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성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기뻐하고 그들의 삶의 존재 근원이고 존재 지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이제는 가나갔습니다. 타락한 성전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 종교 권력자들이 그곳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짐승을 사고팔고 돈을 바꾸고 거기에서 뒷돈을 받아서 누리고 있었지만, 하지만 그들은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성전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처럼 이 성전이 파괴되고 나면, 그러면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성전이 다 사라지고 없는데.
1-3. 오늘날 교회의 현실
오늘 이 질문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고민과 굉장히 닿아 있습니다. 한국교회 선교 130년의 역사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옛날에 초기 선교사님들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할 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척박했습니다. 미개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전 세계 지구상에서 우리보다 더 가난한 나라가 없었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병원이 들어왔습니다.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개화되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방방곡곡에 들불처럼 퍼져 갔습니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날로 날로 번창해 갔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교회의 부흥의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이제 교회가 방방곡곡에 넘쳐납니다. 신학교가 호황을 누립니다. 목회자가 양산되었습니다. 어떤 동네들은 교회가 커피숍보다도 많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작용도 생겼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권력자들이 몰려들면서 돈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명자로서의 목회자가 아니라 직업인으로서의 종교인들이 교회를 목회하기 시작합니다.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류는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 내가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른 교회에 내가 왜 있어야 되는가? 교회를 떠납니다. 이른바 가나안 성도들이 곳곳에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부류입니다. 나는 교회를 떠날 수 없다. 내가 어릴 때부터 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이 교회를 내가 어떻게 떠날 것인가? 나는 절대로 교회를 떠날 수 없다. 죽더라도 교회와 함께 죽어야 되겠다. 이 두 부류가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부류의 성도들 모두가 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떠났으면 행복해야 되는데, 박차고 나갔으면 마음이 기뻐야 되는데 불행합니다. 마음 한구석이 항상 아리고 쓰립니다. 기쁘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성도도 기쁘지 않습니다. 여기에 남아서 교회를 지키며 어떻게든 개혁해 보려고 하는데 힘에 겹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길을 잃었습니다. 두 부류 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떠났으면 행복하고 남아도 행복해야 되는데, 두 부류 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1-4. 믿음의 뿌리를 점검하라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믿음의 뿌리까지 들어갑니다. 내 믿음의 뿌리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가?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가?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가? 착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교회 생활을 잘하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성도들이 많이 모이고 예배당이 넓어져 가고 교회에 땅이 넓어져 가면, 그러면 나도 덩달아서 믿음이 높아지고 기뻐지고 하나님이 내 믿음도 귀하게 여기시고 기쁘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착시 현상입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아지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하고, 내 믿음이 더 깊어지고 내가 하나님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건 착각일 뿐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불일 듯 일어났는데, 성도들은 모두가 '나도 교회가 성장하는 것만큼 내 믿음도 성장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지금 이 마당에 와서 교회가 흔들리고 있는 이 마당에 와서 살펴보니 이제 그것이 진실이 다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어야 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유대인들, 썩어 빠진 성전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제 이 성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나면 그때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이 질문을 하시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한 가지 방향을 주십니다. 그 방향은 절대 불변의 방향입니다. 22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어라! 너무나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어라. 그런데 이 말이 주는 의미가 굉장히 깊이가 있습니다. 성전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라. 썩어 빠진 성전에 너희의 믿음의 뿌리를 두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너희의 뿌리를 두라 하는 그 말씀입니다. 너희들 종교 권력자들이 성전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돈을 바꾸고 짐승을 사고파는 이 성전에 너희의 믿음의 뿌리를 두고 상처받았다고 말하지 마라. 사람은 원래가 타락한 존재들이다. 성전에 뿌리 두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라 말씀하셨습니다.
1-5. 교회가 아닌 하나님께
이 자리, 이 땅에 우리 교회가 세워지고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수십 년 동안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비교적 최근에 교회에 몸을 담은 분도 계십니다. 모두가 다 저마다의 감동과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교회에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두고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회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교회가 아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에 우리의 믿음의 뿌리가 내려져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살길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친구들끼리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 교회 믿냐?" 그런데 그 말은 문법적으로 틀린 말입니다. "너 교회 다니냐?"라고 해야 옳은 말입니다. "너 예수 믿느냐? 하나님 믿느냐?"라고 해야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어린아이의 말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존재의 근원과 가치를 질문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너 교회 믿느냐?" 깊이 있게 생각해 봐야 됩니다. 과연 내가 교회를 믿었는지, 하나님을 믿었는지. 교회를 믿었다면 오늘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점검하고 빨리 돌이켜야 됩니다. 교회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교회를 믿어야 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1-6. 시냇가에 심은 나무
시편 150편은 굉장히 긴 시편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저자도 여러 명이고 문체도 다양하고 저작된 시기도 굉장히 각양각색입니다. 그런데 시편 150편 전체를 압축한 하나의 대표적인 시편이 있는데 주제 시편이 시편 1편입니다. 시편 1편을 살피면 시편 전체의 주제를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복 있는 사람 아닙니까?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이 시냇가, 맑은 물이 흘러가는 이 시냇가가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면 자명한 사실입니다. 건물로서의 교회가 시냇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그곳이 우리가 뿌리 내려야 할 시냇가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에 있는 교회들은 성도들의 발목을 잡아 두고 있습니다. 개교회주의가 얼마나 심한지요. 그런데 우리가 나중에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교회 명찰을 붙이고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 천국 교회 백성들입니다. "전 어떤 교회의 신앙인입니다."라고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출신과 신분을 밝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고 예수님이 좌정하고 계시고 천사들이 노래하는 그 천국에서 우리는 예수님 잘 믿다가 천국 와서 천국 백성으로 그곳에서 기뻐하며 찬양하고 예배 드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내가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가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자의 반대 개념이 무엇입니까? 박복한 자가 아닙니다. 악인입니다. 복 있는 자에 반대는 악인인데, 악인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습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뿌리가 없는 자, 바람에 나는 겨. 우리 삶의 지평을 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교회가 나를 실망시키면 나는 뿌리 없는 존재가 되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 교회만이 우리 존재 지평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가 내 건강을, 내 자식을,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재물을, 내가 함께 한 모든 인간관계를 내 삶의 존재 근원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너지면, 그것이 사라지면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때 나는 어떻게 됩니까? 보이는 것을 존재 지평으로 삼고 사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귀중한 능력의 말씀이요, 은혜의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을 믿는 자의 특징
하나님을 믿는 자의 세 가지 특징을 이어서 말씀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1.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하나님을 믿는 자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관계 가운데 신뢰하는 자입니다. 모세를 보시면,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시기는 80세가 넘어섰습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아서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킵니다. 그가 능력이 있을 때, 힘이 있을 때, 물질이 있을 때, 권력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찾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 하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 그를 불렀습니다. 그가 바로 앞에 갔습니다. 세상 최고의 권력자 바로 앞에 가서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전합니다. 열 가지 재앙을 그 앞에서 행했습니다. 홍해 앞에 서서 바다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모세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마른 막대기 같은 모세를 들어 쓰셔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홍해 앞에서 얼마나 갑갑하고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본 바로의 군대를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 하나님께서 오늘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향하여 지팡이를 내밀었을 때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바다의 땅이 마른 땅이 되어서 이스라엘 200만 군대가 다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모세는 그때 성전도 없었던 시절이고 성막도 없었던 시절입니다. 성전에 가서 기도해서 이루어낸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일대일의 관계 가운데서, 깊은 믿음 가운데서만 일어난 역사였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오늘 우리 인생 가운데도 함께 만들어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2. 기도 응답의 역사
24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을 믿는 자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기도 응답의 역사를 매일 경험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가지 동사가 나오는데, 기도하다, 구하다, 믿다라는 세 가지 동사는 다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받다'라는 동사는 단순 과거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나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구하고 오늘도 지금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 믿고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미 응답은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기도에 어제 이미 응답이 이루어졌다고 하나님이 확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성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런 놀라운 축복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기도하는데, 기도하려고 마음먹었던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들어주셨고 함께 하시고 책임진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확증은 이 본문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 10장 12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다니엘이 삼칠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삼칠일은 21일입니다. 21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특별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나는 21일째 되던 날에 하나님의 천사가 다니엘에게 와서 말씀합니다. 이 놀라운 그 응답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아, 네가 기도하기로 결심했던 그 첫 날부터 이미 너의 기도가 응답되었다." 21일 동안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이 아니고, 기도하려고 마음먹었던 그 순간부터 내 기도가 이미 응답받았다 약속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의 확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니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바벨론 시기를 다 지나고 페르시아 시절에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그 나라 그 땅, 바벨론과 페르시아 시절에 관리로 살았습니다. 성전을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고 마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했을 때 기도 응답의 역사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우리의 존재 지평이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어야 됨을 입증하고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3. 용서받고 용서하는 자
25절을 보십시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용서받고 용서하는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전 시절의 용서는 빌려내다 남반에 유대인들 중에 단 한 분, 대제사장만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다 모아서 일 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모든 이 나라 백성들의 죄를 다 내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러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사해주셨습니다. 용서를 빌 수 있는 날은 일 년에 단 한 번, 그것도 내가 할 수 없고 대제사장이 나를 대신해서 용서를 빌어 줘야 됩니다. 이것이 성전 시절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다 무너지고 나면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직접 나오라. 내가 너의 기도를 들을 테니 네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나에게 회개하면 하루에 열두 번이라도 너를 사해주마"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성전 시절에 있지 못했던 하나님의 용서와 사죄의 축복이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더 크게, 더 깊게, 더 넓게, 더 놀랍게 부어진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성전은 우리의 삶에 믿음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뿐이지 교회는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어야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특징은 하나님과 깊은 믿음의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고, 기도하는 건 다 받은 줄로 믿고, 용서하고 용서받는 자, 그런 자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앞으로 우리 인생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한 분 붙잡고 걸어가시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교회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타락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에 여러 가지 부조리와 문제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하여 주옵소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는 것처럼, 주여 우리 인생에도 많은 열매 맺는 무화과나무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주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어떤 말씀이든 주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신뢰하는 자 되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기도한 것 이미 응답 받으며 나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며, 주님 안에서 용서받고 우리에게 죄 지은 자 용서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