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강 /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12:13-17)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막 12:13-17)

3월 1일은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가 펼쳐진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일제의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자주 대한민국을 위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그 놀라운 사랑과 수고가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민족대표 33인 중에 16명이나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 믿는 백성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단 삼일운동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펼쳤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계몽운동, 농촌운동, 심지어 무장항일운동까지, 그 가운데 상당수가 모두 신앙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중에 한 분 도산 안창호 선생님도 계십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1878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17세 되던 1895년에 한양으로 올라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운영하던 구세학당에 들어갑니다. 열심히 학업을 배웠습니다. 구세학당은 훗날 경신중고등학교가 됩니다. 그는 신학문을 접하며 열심히 학업을 하던 중에 일생일대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바로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마음속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느끼고 나니 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곧장 결혼하고 더 큰 것을 배우기 위해서 넓은 세상 미국으로 떠납니다. 아무것도 없이 떠난 그가 미국에서 얼마나 많이 고생했을까요. 수없이 고생하고 힘겨운 시간들을 다 보내고 이제 살 만하니, 그는 돌연 다시 조선으로 귀국합니다.

그가 귀국한 이유는 민족 때문이었습니다. 이 나라가 이제 국운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민족의 주권이 일제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땅에 귀국한 이후에 여러 동지들을 모아서 독립운동을 시작합니다.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습니다. 대성학교를 세웠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배웠던 것처럼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으로 이 시대 후학들을 길러서 일제를 극복하는 민족의 일꾼들을 길러 내겠다는 일념이었습니다. 민족정신을 개조하기 위해서 흥사단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저 밑바닥부터 모든 백성들이 함께 잘 사는 나라를 일구어 가겠다는 일념이었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 정신은 민족개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장항일운동으로는 일제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신을 바꾸어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그 민족개조론의 밑바탕에는 복음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민족의 복음화의 정신으로 이 민족의 새로운 생각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일념이었습니다.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가 1932년 상하이에서 체포됩니다. 그 이후에 수차례 투옥과 체포를 거듭하면서 몸이 쇠약해집니다. 1938년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도산 안창호를 비롯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보면서 한 가지 공통된 의문을 가집니다. 그 의문은 이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만 했을까? 사실 도산 안창호는 미국에 이민 간 이후에 그곳에서 자리 잡고 뿌리내리고 살아도 됩니다. 누구 하나 그를 비난할 사람이 없습니다. 고국에 돌아오지 않는다 해서 그분을 손가락질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돌연히 귀국했고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온몸을 다 바친 믿음의 역군이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평균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중간만 하는 사람, 남들에게 욕도 먹지 않을 정도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칭찬도 필요 없습니다. 또 어떤 부류는 평균 이하의 삶을 삽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다. 가족에게나 공동체에게나, 자신은 잘 모르지만 그분의 존재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평균 이하의 삶을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소수이지만 평균 이상, 고귀하고 값지고 거룩한 인생을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같은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모름지기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사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영혼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평균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상의 삶, 더 고귀하고 값진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평균의 인생인가, 평균 이하인가, 하나님의 형상에 합당한 고귀하고 값진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함께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자들

예수님께서 성전정화 사건을 일으킨 이후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촘촘한 그물을 짰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동원합니다. 조직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예수를 죽이기 위한 작업에 돌입합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여기서 그들은 당연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였다"는 말은 이제 예수를 걸어서 넘어뜨리려 했다, 예수를 고소할 조건을 찾으려고 명분을 얻으려 했다는 뜻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들은 여러 조직을 동원하는데,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을 동원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결이 다른 존재들입니다. 평소에는 말도 섞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죽이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하나가 됩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앞의 말은 아무런 의미 없는 말입니다. 칭찬을 잔뜩 늘어놓는데 이건 그냥 별 의미 없이 하는 말입니다. 진짜 이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뒷부분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됩니까? 바치지 않아야 합니까? 갑자기 뜬금없이 세금을 가지고 질문합니다. 아주 의도적인 질문이고 악한 질문입니다.

1-1. 바리새인들의 의도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기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 권력은 악입니다. 그들이 빨리 물러나고 지금 여기 이 가나안 땅, 하나님이 주신 팔레스타인 땅에 하나님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믿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이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반민족주의자로 몰고 갈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소문낼 것입니다. "유대인들이여, 잘 보라. 너희들이 그토록 따라다녔던 이 예수는 알고 보니 로마의 앞잡이였다. 세금을 내라고 하지 않느냐. 우리의 고혈을 짜서 로마에 바치라고 하지 않느냐. 예수를 우리가 어찌 가만히 두고 볼 수 있겠느냐." 이들은 아마 유대인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 예수를 고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목청껏 외쳤을 것입니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질문했습니다.

1-2. 헤롯당의 의도

헤롯당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 당시 로마의 권력은 서열화되어 있습니다. 제일 꼭대기에 로마 황제가 있습니다. 그 아래에 황제가 보낸 총독이 있습니다. 헤롯당은 실질적 지배 권력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을 다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에돔 족속입니다. 로마에 많은 돈을 주고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로마와 공생하고 있는 공생 관계입니다. 당연히 로마에 세금을 내서 로마가 배불러야 그들도 배부르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생각하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들은 예수님을 현행범으로 체포할 것입니다. 로마 권력에 반대하는 자들. 그리고 조금 더 예수님에게 누명을 씌울 것입니다. "이 예수는 유대인들을 등에 업고 로마에 대해서 항거하는 자이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됩니까? 바리새인들에게, 헤롯당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해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이라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1-3. 하나님 없는 자들의 법칙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세상의 법칙을 배웁니다. 세상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절대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절대악도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가져왔던 마음의 소신과 명예나 그들의 마음에 뜨거운 열정은 그들에게는 헌신짝입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이익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가져왔던 소신이나 그 마음의 결정도 다 내팽개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법칙입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절대로 하나 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결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죽이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적대적 공생 관계를 맺고 지금 예수님 앞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1-4.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악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왜 죽이려고 했을까요.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는 악연이 얽혀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형식으로서의 율법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본질로서의 율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본뜻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었습니다.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어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달려왔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제자들이 정결예식을 어겼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자리 잡고 있다가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머쓱해졌습니다. 한방 먹은 것입니다.

안식일 논쟁도 주님과 자주 했습니다. 하루는 안식일 날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미칠 것 같습니다. 손으로 비볐습니다. 후 불고 밀을 입에 털어 넣어서 먹었습니다. 그것을 뒤에서 보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이 달려 나왔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겼습니다. 탈곡을 했습니다. 혼내십시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인자이니라." 통렬하게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보는 사람들은 통쾌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한 번 더 얼굴이 붉어집니다.

몸에서 유출병이 있는 자들을 불결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던 12년을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 예수님은 그녀를 불결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녀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녀를 불러다가 사회적인 격리로부터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는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은 칭송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따르기 시작합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기회가 있으면 내가 반드시 죽이겠다" 이를 갈며 결심했습니다. 때가 왔습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1-5. 헤롯당과 예수님의 악연

헤롯당과 예수님은 어떤 인연이 있습니까? 악연입니다. 대헤롯 아버지 헤롯 시절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 우리가 별을 보고 찾아왔노라." 대헤롯이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왕인데 이 땅의 왕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동방박사들이 떠나고 난 이후에 그는 명령을 내립니다. "만 2세 미만의 영아들을 모두 다 죽여라." 영아살해 명령이었습니다.

아들 헤롯이 분봉왕이 됩니다. 팔레스타인을 삼등분으로 나누어 통치합니다. 갈릴리를 다스리고 있었던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서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천륜을 어긴 파렴치한 짓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책망했습니다. 왕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책망합니다. 세례 요한이 잡혀가서 참수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세례 요한을 칭송합니다. "여자가 낳은 이 중에 이보다 더 큰 이가 없다." 세례 요한을 칭송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헤롯의 이름을 떨먹였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한배를 탄 분이었습니다. 헤롯당이 예수를 좋게 볼 리가 없습니다. "기회가 되면, 때가 되면 내가 너를 반드시 죽이겠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1-6. 바리새인과 헤롯당 같은 사람들

우리는 믿음 생활 감당하면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같은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만납니다. 나는 예수 잘 믿는다고 기도하고 살아가는데, 나는 이 말씀을 한 글자도 어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살고 있는데, 그런데 내 인생에는 고난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내 주변에 나를 치고 삼키려고 하는 사람들, 나를 힘겹게 하는 바리새인 같은 인간들, 헤롯당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괴롭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때 어떻게 하십니까? 적당히 타협해야 됩니까? 아니면 주저앉아 포기하셔야 됩니까?

타협도 포기도 정답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야 될 길은 해왔던 대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발자국이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나를 따르라고.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길이다. 너 혼자 가라고 등 떠밀지 않는다. 내가 먼저 걸어간 길이다. 너희들은 내 발자국 보고 나만 따라오면 된다. 그 길은 진리의 길이다. 그 진리의 끝에 생명 되신 예수께서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우리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온갖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께서 가신 그 길을 걸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은혜가 있습니다. 플러스 알파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 길은 외롭지 않은 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역자를 보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동역자로 세례 요한이 있었습니다. 광야 길을 전전하던 다윗의 동역자로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아론을 동역자로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돕는 손길 갈렙을 파송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외롭다고 느끼고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십자가 지고 걸어가다 보면 그 길을 걸어오는 또 다른 분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는 금방 알아봅니다. 왜냐하면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걷는 분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예수님 따르는 이 길을, 오로지 한 길 가는 그 길을 걸어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순절을 걸어가면서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 우리도 마다하지 않고 십자가 지고 걸어가야 됩니다. 내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예수의 십자가 나도 지고 걸어가겠습니다. 아름다운 결단을 함께 행하는 하나님 아버지 자녀 될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답

이렇게 덤벼드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질문 앞에 우리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15절과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데나리온(δηνάριον) 하나를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그 당시 데나리온은 로마인들 그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로마의 공식 은전이었습니다. 그 로마의 공식 은전에는 황제의 형상과 황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2종류의 데나리온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형상과 그 이름이 새겨진 은전, 또 하나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형상과 그 이름이 새겨진 은전이었습니다. 어떤 것이든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황제 형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이 돈이 사용되는 모든 곳은 내가 다스린다. 내가 황제인데 로마 본토든지 식민지든지 이 돈이 유통되는 모든 곳은 나의 영역이고 내가 왕이다. 너희들은 이 돈을 쓰면서 세금을 열심히 내라. 그러면 내가 너희들을 다스리고 도와줄 것이다. 생명을 보존해 줄 것이다. 가정을 지켜 주고 재산을 보존하고 너희들의 영토와 자녀들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돌봐 줄 것이다. 이것이 유형과 무형의 약속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세금을 내고 왕은 그들을 다스리고 돌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법칙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물어보시고, "가이사의 것입니다" 대답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이 돈 같은 것은 가이사에게 드려라. 어떤 의미입니까?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들은 지금까지 세금을 내고 살지 않았느냐. 만약 너희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강력하게 조세 정책에 반응하고 살았다면 잡혀가지 않았겠느냐. 어찌 여기 건강하고 멀쩡하게 살아 있겠느냐. 너희들 지금까지 세금 냈던 것처럼 앞으로도 가서 하던 일 계속 하라. 애국자도 아니면서 왜 나에게 와서 세금을 내야 되냐, 내지 말아야 되느냐 나에게 묻고 시험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들 위선적으로 이중적으로 살지 말고 지금까지 세금 냈던 것처럼 가서 그대로 행하라. 그 말씀이었습니다.

헤롯당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 헤롯당이여, 권력에 기생해서 권력의 종으로 살고 있는 너희들이여, 너희들은 세금은 안 내더라도 로마 배불리면 너희들도 배부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지금까지 그렇게 세금 걷어서 살고 있지 않았느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라. 지금까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이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원래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에게 와서 이런 유치한 질문 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정말 주님께서 하고 싶었던 말씀은 그다음에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우린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속 권력에 세금을 내는 것처럼 하나님께도 헌금을 많이 드려야 된다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우린 이미 지난주에 말씀을 통해서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의 농부에게 바라시는 것은 많은 돈이 아니라는 걸 배웠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에게 잡수실 것도 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방점은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 질문입니다. 로마인들이 사용하고 너희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 데나리온 은전에 황제 형상이 그려져 있고 황제의 이름이 있어서 황제에게 재물을 바친다면,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 헤롯당이여, 너희 영혼에는 누구의 형상이 그려져 있느냐?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느냐?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 우리 영혼에 누구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까?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겨 놓으셨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 어떤 의미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나라는 한 존재를 만드실 때, 삼위 하나님의 합작품으로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새겨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내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시면 우리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보신 사랑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 속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희생하시고 사랑하시고 죽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이 우리 영혼에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영혼 속에는 성령님의 위로하심과 성령의 동행하심과 성령의 함께하시는 사랑이 우리 영혼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이건 우리 정체성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3-1. 권력의 개로 살지 말라

바리새인과 헤롯당, 그들은 권력의 개로 살았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바리새인들, 헤롯당, "우리가 가서 그대로 시험하겠습니다." 그들은 자처하고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나, 그들은 황제 형상이 새겨져 있는 은전 하나를 들고 와서 예수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유치한 짓거리 하지 마라. 은전에 누가 새겨져 있든 지금까지 너희들 하던 대로 하라. 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너희 영혼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는 걸 깨달아라. 하나님의 형상답게 제발 그렇게 고귀하고 품위 있는 인생을 살아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2.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라

저는 목회자입니다. 욕 안 먹을 만큼 평균만 감당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저의 영혼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교회를 돌보고 성도를 섬겨야 됩니다.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희생하신 사랑으로 먼저 희생하고 십자가 져야 됩니다. 누가 요청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그랬던 것처럼 위로자가 되어 주고 성도들을 함께 보듬고 같은 길을 걸어가야 됩니다.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여러분 각자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헛되이 그냥 흘려보내겠습니까? 평생 동안 하나님의 형상 한번 감당하지 못하고 살다가 나중에 하나님 만나면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새겨 놓았는데 권력의 개로 살다 왔구나. 황제 형상을 따라 돈만 밝히다 왔구나."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3-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삶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참으로 존귀하고 고귀하고 값진 존재들입니다. 한 단계 더 뛰어난, 도산 안창호 같은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보다 값진 인생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평생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분들은 천막 만드는 일로 먹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로마 식민지 치하에 태어났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평신도입니다. 바울을 만나고 바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인생이 바뀌어졌습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에베소 교회 개척을 자처합니다. 아무것도 없이 에베소를 개척해 갑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수고로 교회가 개척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마로 갑니다. 로마를 개척했습니다. 누가 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요. 평신도로 중간만 해도 누가 아무렇게 해도 뭐라 칭찬할 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의 영혼에 새겨진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걸음 더, 한 걸음 더, 더 더 전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백성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정체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대충 살 수 없습니다.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안창호 선생님처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예수께서 요청하시고 요구하시는 그 십자가의 길을 자청해서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의 영혼에 새겨진 이 형상과 이 글은 누구의 것이냐?" 하나님, 우리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질문 앞에, 예수님의 질문 앞에 엎드려 회개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기억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물질의 세계, 황제의 형상에만 눈이 멀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처럼 우리도 썩어 없어질 물질에 목숨을 걸고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에 걸맞는 믿음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사순절을 걸어가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을 걸어 나가오니 하나님 아버지 은혜 내려 주시고 함께 동행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