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강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 (12:18-27)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 (막 12:18-27)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순환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는 것처럼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기에 죽음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 한 가지는 다름 아닌 육체였습니다. 영혼이 거할 수 있는 육체가 꼭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는 미라가 꼭 필요했습니다. 특별히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파라오가 죽을 때에 그들은 미라로 방부 처리를 해서 영원토록 남겨 두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미라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온도와 습도를 잘 맞춰 놓아도 부패가 계속해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조각가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의 건강했을 때 모습을 조각해 두어라." 그리고 그들은 조각가를 이렇게 부릅니다. "영원히 살게 해 주는 사람"이라고.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조각가들을 부르기를 "영원히 살게 해 주는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굉장히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현존하는 피라미드 중에 가장 큰 것이 높이가 146미터나 됩니다. 지금 현대 건물로 약 40층 정도의 높이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높은 건물입니다. 기원전 2500년경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요? 미스터리하고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피라미드 안에 들어가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그 안에는 파라오의 부장품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가지고 있었던 금은보화 모든 것들이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조각상도 미라도 모든 것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둔 파라오의 바람은 한 가지였을 것입니다. "나는 죽어서도 여전히 너희를 다스리는 파라오다." 지금의 삶을 죽음까지 그대로 가져가고 사후 세계까지 가져가고 싶은 그들의 욕망이 피라미드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2천 3백 년이 지나서 동양으로 오면 진시황을 만납니다. 진시황 또한 죽기 싫었습니다. 그도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의 무덤을 설계했습니다. 설계한 사람, 무덤을 만드는 데 동원된 사람 모두 다 짓고 나서 그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도굴에 미리미리 준비하고 미리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시황릉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약 6,000여 개의 병사 모형이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병사의 모형은 사람의 키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6,000여 개의 병사는 각양 다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진시황의 욕망은 "나는 죽어서도 너희들을 다스린다. 나의 호위 무사 6천 명이 나를 호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파라오나 진시황의 욕망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서 사후 세계를 절실하게 고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간절했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이 너무 크고 놀라웠기 때문에 이것을 놓기가 싫었습니다. 죽어서도 나는 여전히 왕이고, 죽어서도 이 삶을 영속적으로 이어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도 천국도 부활도 오해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에 보면 부활을 오해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 바쁘게 살아가는 나머지, 너무 분주하게 살고 있는 나머지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한 가지도 생각하지 못하거나, 혹은 생각했다 하더라도 잘못된 부활과 천국에 대한 관념을 가진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내가 갖고 있는 잘못된 천국과 부활에 대한 생각을 함께 바로잡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사두개인의 정체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을 일으키신 이후에 본격적으로 예수 죽이기가 본격화됩니다. 유대 종교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습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보냅니다. 먼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와서 뜬금없이 세금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히려 날카롭게 반박하고 되물어 보셨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부끄러움만 당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다음 집단이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사두개인은 어떤 집단입니까? 성경을 읽다 보면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나옵니다. 마치 세트처럼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예수님을 반대하기는 한 가지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성은 천양지차입니다.

1-1. 사두개인의 역사적 뿌리

사두개인의 역사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정말 희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두개인들이 이런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사두개인들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왜 부활을 믿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역사에 뿌리를 올라가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들의 뿌리를 올라가고 올라가 보면 대제사장 아론을 만납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세의 형입니다. 아론은 네 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 네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10장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죽습니다.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그러자 그다음 아들인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이 됩니다.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이 되면서 동생 이다말은 성전에 수종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고 도와 가며 성전의 사역을 감당해 나갑니다.

엘르아살도 집안을 이루고 이다말도 집안을 이루어 계열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두 집안이 교대로 대제사장 직을 수행해 나갔습니다. 한 집안이 대제사장이 되면 다른 집안은 성전에 수종드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상호 협력과 견제가 일어납니다. 대제사장이 잘못하면 이다말 계열의 성전 수종드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다말 계열 대제사장이 잘못하면 엘르아살 계열의 집안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건강한 종교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역사는 다윗 때까지 계속됩니다.

1-2. 사독의 등장과 권력 독점

그런데 문제는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왕위가 넘어가는 시점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후계자로 솔로몬을 점찍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과 배다른 형제인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아도니야 편에 요압 장군과 이다말 계열의 당시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가담합니다. 반란은 곧장 진압되었습니다. 반란이 진압된 후 다윗 뒤에 솔로몬이 왕이 됩니다. 왕이 된 솔로몬이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요압을 처형합니다. 이다말 계열의 아비아달 대제사장을 그의 고향인 아나돗에 유배시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쪽 계열만 남습니다. 엘르아살 계열의 사독을 대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두 집안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었던 대제사장 가문의 한쪽 집안이 망해 버림으로써 엘르아살 계열의 사독이 유일한 대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사독은 솔로몬과 결탁했습니다. 그리고 사독은 솔로몬과 함께 권력을 나눕니다. 사독의 후손들이 바로 사두개인이 된 것입니다.

사독은 솔로몬과 함께 영화를 나누면서 솔로몬의 비행과 약점을 모른 척합니다. 솔로몬은 후기에 타락했습니다. 바로의 딸 공주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우상들이 들어옵니다. 이집트의 우상들만 아닙니다. 여러 나라 여러 민족의 공주들을 다 맞아들였습니다. 그들과 정략 결혼을 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이방의 신들로 이스라엘은 가득 차 버렸습니다. 하지만 사독 대제사장은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을 나누어 얻기 때문입니다. 함께 배부르고, 함께 돈을 만지고, 함께 솔로몬의 영화에 동참했습니다. 그가 바로 사독입니다.

1-3. 천 년의 권력 독점

사독 이후에 그들은 영속적으로 대제사장 직을 차지했습니다. 그때부터 대제사장들은 타락해 버렸고, 그때부터 함께 생겨난 사두개파들은 여전히 권력과 돈을 독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림잡아 보아도 기원전 950년경부터 예수님이 오셔서 지금 여기 사두개인들과 예수님이 대화 나누고 있던 그 시간까지 약 천 년의 시간, 길고 긴 천 년의 시간 동안 사두개인들은 한 손에는 정치 권력을, 한 손에는 종교 권력을 가지고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나라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지배 계급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알렉산더 제국, 로마까지 오는 동안 여전히 사두개인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이 있었습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돈으로 정치 권력을 매수하고 사버렸습니다. 예수님 오셨던 그때까지. 이건 마치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가 나라가 해방되고 나서도 여전히 정치와 여러 기관에서 자리를 독점하며 지금까지 부자로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 사두개인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돈 많은 그들, 정치 권력과 결탁한 종교 권력자들인 사두개인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자기들이 누리는 권세가 이렇게 대단하고 이렇게 좋은데 그들이 왜 천국을 소망하겠습니까? 지금 그들은 영화로 배부르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그들이 왜 천국을 소망하겠습니까? 그들은 지금 누리는 삶이 너무 좋아서 죽기 싫었을 것입니다.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천국으로 그대로 영속적으로 가고 싶은 소망을 파라오처럼, 진시황처럼 가지고 있던 자들, 그들이 바로 사두개인들입니다.

2. 첫 번째 오해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 변함없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래도 대제사장인데, 그의 조상이 아론인데, 그들은 왜 부활을 믿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신봉합니다. 아론의 동생인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모세오경을 그들의 생명처럼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이 주장합니다. "모세오경 어디를 살펴봐도 부활을 말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믿지 않는다. 부활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거짓말쟁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2-1. 형사취수 제도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한 구절을 가지고 나와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오늘 말씀 19절을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신명기 25장 5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계대 결혼에 대한 언약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형사취수 제도입니다.

원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율법에 제정하신 법입니다. 어떤 한 남자가 결혼을 했습니다. 후사가 없이 죽었습니다. 후사가 없이 죽으면 그 여인이 어떻게 됩니까? 그 여인 때문에 하나님은 법을 정합니다. 동생이 형수를 취하라. 그리고 아들을 낳아 주라. 그러나 그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 되지 않습니다. 죽은 형의 아들이 됩니다. 그 아들이 자라서 어머니를 봉양합니다. 사회적으로 기댈 데 없는 여성들을 보호하고 돌보기 위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자비의 은혜가 이 말씀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2-2. 비현실적인 질문

이 말씀을 예로 들면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한 가지 극단적인 예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예수님, 어떤 가정에 일곱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첫째 아들이 결혼 후에 후사가 없이 죽습니다. 그럼 둘째가 다시 결혼해야 되지 않습니까? 둘째가 결혼했는데 그도 역시 형수를 취했으나 후사가 없이 죽었습니다. 셋째도 그렇습니다. 넷째, 다섯째, 여섯째, 막내까지 모두가 다 결혼했지만 후사가 없이 다 죽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여인도 죽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부활이 있고 천국이 있다면 천국에서 이 여인은 누구랑 결혼해야 될까요? 누구랑 살아야 됩니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나와서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2-3. 현실의 천국 대입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을 들으면서 두 가지 문제를 발견하셨습니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보신 첫 번째 문제는 사두개인들이 현실을 천국으로, 부활로 그대로 대입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24절과 2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했다. 나중에 부활할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우리 모두가 다 천사 같이 될 것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삶이 너무 영화로웠고 너무 부유하고 정말 살기 좋았기 때문에 이것이 천국으로 그대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혼하고, 먹고 살고, 자식 낳고, 좋은 집에 살고, 돈을 마음껏 쓰고 사는 것. 그러나 주님은 그런 곳이 천국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아무리 부유하고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천국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곳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했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마다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천국은 예수님 한 분만 경험하셨고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무엇과 같다." 인간의 언어로 천국을 설명하는 순간 이미 천국은 천국이 아닌 것이 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에 의해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한정적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경험하지 못한 천국을 사람이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표현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어서 주님은 "천국은 마치 무엇과 같다"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건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 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천국을 환상 가운데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8절과 22장 1절입니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사도 요한은 천국을 "맑은 유리 같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요한이 유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맑은 유리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고, 수정을 보았기 때문에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라고 표현한 것뿐이지, 정말 유리 같은지, 정말 수정 같은지, 그것은 인간의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2-4. 참된 복의 의미

그래서 사두개인들의 삶을 보면 이 땅에서 부자로 사는 것, 엄청나게 많은 물질을 누리고 사는 것, 이것이 복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엄청난 물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부자로 살다 보면 천국에 대한 소망과 희망과 기대가 차츰차츰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적당히 살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과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하나님이 사랑하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야곱을 하나님은 장막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고대광실, 거대한 집에 거하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그대로 살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이곳에서 농사짓고 저곳에서 농사짓고, 여기서 목축하고 저기서 목축하면서 그때그때 이곳저곳 다니며 살게 하셨습니다. 장막 가운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적당히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참된 복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릴까 봐, 인간의 악하고 죄악된 본성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에, 여기 이 타락한 사독의 자손들, 사두개인들처럼 그들이 그렇게 될까 봐 하나님은 물질을 적당하게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천국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기대 없이 소망 없이 살고 있다면, 혹시 우리가 기대한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밥 먹고 사는 것이 걱정 없고, 내가 사는 집이 평화롭고, 우리 자녀들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서 이 땅의 삶이 천국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많이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천국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적당히 살 각오를 하고 살아야 됩니다. 자발적 가난을 실천해야 됩니다. 털어내야 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털어내서 자발적 나눔을 실천하며 나누며 살아야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병원과 미자립 교회를 돕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셨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자립 교회 목사님들과 통화를 했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중에 한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성도들이 한 사람도 안 모이는 때가 있습니다. 노인 성도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내가 지독한 병에 걸리면 격리되고 유리되어서 낫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 어느 자식 하나 내 빈소를 지키지 못할 것인데."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라 하지 않아도 이미 교회가 텅텅 비어 버렸습니다. 교회 임대료도 내지 못합니다. 목사님의 생계는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어찌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데요. 그런 교회들이 한두 교회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며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 교회도 한 해 동안 계획한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역들이 있고 많은 사업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일 년 동안 목표로 하는 재정의 목표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 채우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사용하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사업을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다 나누고 다 퍼 주어도 괜찮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 함께 고통받고 함께 나누고 함께 손잡고 나가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크게 짓고 삐까번쩍하게 눈부시게 멋진 교회를 지어 놓는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믿음에는 절대적인 손해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발적 나눔을 실천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사두개인처럼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나라가 바뀌어도 천 년 이상 동안 그들의 정권을, 그들의 강력한 종교 권력을 붙잡고 있었던 사두개인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장막에 거하는 믿음의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부활 소망을 가지는 길입니다. 그 놀라운 일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활 소망, 천국 소망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두 번째 오해

사두개인들의 오해와 잘못된 것이 또 있습니다. 그들은 자칭 모세오경의 전문가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모세오경을 신봉하고 모세오경을 잘 믿고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 보기에는 엉터리였습니다.

3-1. 동사의 시제

예수님이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26절과 27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여기서 인용하신 말씀은 출애굽기 3장 6절입니다. 출애굽기 3장은 하나님께서 430년간의 길고 긴 침묵을 깨뜨리고 모세를 찾아오셔서 첫마디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미 그때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동사를 현재 시제로 쓰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그 당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습 그대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동사를 현재 시제로 쓰고 계십니다.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 어느 누구도 죽은 사람은 없다. 그들은 지금도 살아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은 자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2. 산 자의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 인간은 함께 사랑하고 살아왔던 사람이 호흡이 끊어지고 맥박이 뛰지 않고 몸이 싸늘하게 식어 가면 죽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실 때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잘 믿고 믿음 생활 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살았다면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땅도 보고 계시고 천국도 볼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한계에 갇혀 있어서 이 땅밖에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여기도 저기도, 이 땅도 천국도 다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죽은 자는 따로 있습니다. 교만하게 하나님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다가 세상을 떠난 자, 저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져 있는 자, 그들이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명색이 사두개인들, 모세오경을 신봉하는 자들, 모세오경의 전문가라고 말하는 자들, 그들 사두개인들이 동사의 시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의 얕은 지식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오경 어디에 부활이 있느냐고 예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적반하장이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간단한 한 가지 말씀을 드시면서 모세의 글에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 있다고 말하지 않느냐, 그런데 이래도 너희가 부활을 믿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4. 부활의 소망

부활이 없는 우리 기독교는 죽은 종교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이렇게 믿음 생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열심히 분투하고 살고 있는 이유는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이 우리의 소망이고 부활이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절망이고 죽음은 낙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영광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우리는 그다음 또 그다음 열매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왜 신앙생활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은 사두개인들처럼 살지 말아야 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고 가지고 살고 있다면 적당히 살아야 됩니다. 나누고 베풀고 털어내고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하며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는 부활을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다는 그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기대합니다. 지금 우리가 낙심과 절망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소망이 우리의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두개인처럼 살지 마시고, 부활의 영광을 가슴 가득히 품고 하나님의 자녀로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