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막 12:28-34)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살아 있을 때 수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로 인해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감동받았습니다. 그중에 '두 노인'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러시아의 어느 시골에 살고 있는 칠십이 넘은 두 노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같은 마을에서 자라고 성장하고 함께 살았습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서로를 의지하고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 한 사람인 예핌이라는 노인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기까지 했습니다. 술도 담배도 입에 절대 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직했고 틀림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 엘리세이라는 노인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 좋은 사람입니다. 친구도 좋아하고 화통하고 호탕합니다. 그는 술도 즐기고 가끔씩 담배도 태우는 어른이었습니다. 그는 벌꿀을 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두 친구에게는 젊은 시절부터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성지순례를 같이 가자, 성지를 가면 우리 믿음이 더 뜨거워지고 깊어질 것이다 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나이가 어느덧 칠십이 넘었습니다. 이제 더 늙으면 우리가 걷지도 못할 텐데 얼른 가자 하고 의기투합하고 각자 백 루블씩의 돈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떠납니다.
얼마나 갔을까요. 길을 가다가 엘리세이가 목이 마르다고 합니다. 예핌에게 말합니다. "여보게, 자네는 여기서 잠깐 기다리게. 내가 저 마을에 들어가서 목을 축이고 물을 얻어다가 가지고 나올 테니 잠깐 기다리게." 그리고 그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예핌은 친구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하고 있다가 나무 아래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맙니다.
그런데 엘리세이가 들어간 마을에서 그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합니다. 어느 한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 삼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내외, 손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삼대가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흉년과 돌림병과 기근으로 그들이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엘리세이가 깜짝 놀라서 물을 구해 그들의 목을 축여 주고 가지고 있는 음식물을 먹여 줍니다. 그렇게 해서 꼬박 사흘 동안 그들을 간호해서 극진히 보살펴 줍니다. 이제 원기를 찾아갑니다.
한편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던 예핌은 잠깐 잠이 들고 깨보니 밤이었습니다. "아, 친구가 내가 지금 자고 있는 걸 모르고 지나쳐 갔구나." 그도 서둘러서 길을 떠났습니다. 재촉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길이 엇갈려 버린 것입니다.
엘리세이는 사흘 동안 극진히 식구들을 보살펴서 이제 그들이 다 살게 되자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날이 밝으면 빨리 길을 재촉해서 떠나야지. 내 친구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겠다. 떠나야 되겠다." 그리고 잠을 청합니다. 그런데 아들 내외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아들 내외가 이렇게 걱정합니다. "우리가 저 천사 같은 어르신의 도움으로 지금 생명을 부지했는데 이제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구려." "그러게요. 길 건너 저 부잣집에 저당 잡힌 우리 밭을 찾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걱정입니다."
엘리세이가 그 부부의 말을 듣고 가슴이 저려 옵니다. 마치 자기 일처럼 마음이 심히 괴로웠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젊은 부부를 앞장 세우고 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값을 치르고 저당 잡힌 밭을 찾아옵니다. 오는 길에 소도 샀습니다. 짐승도 사 주었습니다. 그리고 걱정 없이 농사 지어서 먹고 살라고 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밤중에 홀로 이 길을 따라서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주머니에 이십구 루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고 묻자 엘리세이가 말합니다. "가다가 돈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더 이상 길을 갈 수가 없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꿀벌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한편 예핌은 친구가 먼저 간 줄 알고 열심히 뒤쫓아 갑니다. 열심히 가도 가도 친구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성지에 도착했습니다.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성지에 가는 곳마다 저 멀리 가장 좋은 자리에, 앞자리에 친구가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열심히 설명을 듣고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핌이 생각했습니다. "이 노인네가 얼마나 걸음이 빠른지 나보다 먼저 왔구나." 그리고 앞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세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곳곳에 가도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는 의심스러웠습니다. 미심쩍었습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그리고 성지순례를 다 마쳤습니다.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엘리세이와 헤어졌던 그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마을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예핌의 손을 잡고 이끕니다. "할아버지, 우리 집에 와서 쉬었다 가세요."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집에 들어가 보니 삼대가 화목하게 살고 있습니다. 극진히 섬겨 주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까지.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의아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생면부지의 나를 어찌하면 이렇게 잘 돌봐 주고 섬겨 주는 것입니까?"
삼대가 앞다투어서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그 어른이 우리를 살려 주었고 밭과 수레와 짐승까지 사 주셔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이렇게 살게 되었는데 우리가 어르신을 열심히 돌보고 섬기겠습니다. 계시고 싶은 대로 이 자리에 머물다 가십시오."
그리고 삼대가 극진히 섬깁니다. 예핌은 생각했습니다. 그 노인이 자기 친구 엘리세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길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엘리세이가 반갑게 맞아 줍니다. 여전히 꿀벌을 치며 생계를 유지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예핌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는 몸은 성지에 가 있었으나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있지 못했구나. 그런데 내 친구 엘리세이는 몸은 성지에 가지 못했지만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있었구나."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이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나는 오늘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와 모습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1. 서기관의 질문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을 일으키신 이후에 유대 종교 권력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과 사두개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날카로운 질문으로 예수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더 날카로운 비유에 맞서셨습니다. 그들의 질문을 무력화하셨습니다.
그 모든 질문과 대답을 다 지켜보고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받은 질문이 상당히 까다롭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훨씬 더 잘 대답하심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 말씀 28절입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서기관이 어떤 사람일까요. 말 그대로 서기(書記)는 베껴 쓰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입니다. 모세 오경의 말씀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잘 적고 정리해서 성경을 필사해서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든지 원어 성경을 보면 이분들을 율법 선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늘 읽고 기록하는 사람이니 그들이 성경에 대해서 얼마나 해박하겠습니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찾아왔던 바리새인과 헤롯당과 사두개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경의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들이 정치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면 여기 오늘 본문의 서기관은 훨씬 더 지적이고 훨씬 더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기에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의 질문이 굉장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을 너무 잘하는 것입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빠져들어 갑니다. 예수님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그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마음속 깊이 이 질문을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었던 고민과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질문을 그가 예수님께 드립니다. 28절을 다시 보십시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물었습니까? 수없이 많은 계명들 중에, 이렇게 방대한 율법 중에 최고의 원리가 되는 제일 계명이 무엇입니까? 어떤 계명을 우리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예수님, 본질 중에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무엇입니까? 이 대답을 저에게 들려 주십시오 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는 율법 선생이었습니다. 성전에서도 가르치고 회당에서도 가르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 깊이 고민이 됩니다. 이렇게 많은 본문의 말씀 중에 그중에 가장 제일 원리가 되는,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원리가 되는 말씀이 있을 텐데 무엇일까. 그도 여러 친구들 서기관들에게 물어봤을 것입니다. 자기 선생에게도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각자 다 다릅니다. 그의 마음속 깊이 뻥 뚫어 주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께 이 본질적인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1-1. 질문의 수준
여러분들은 여기서 서기관의 질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질문의 수준이 그 사람의 수준입니다. 이분이 이런 질문을 한 것으로 보면 이분의 수준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서 찾아온 바리새인, 헤롯당은 세금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부활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저의가 있는 수준 낮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서기관은 예수를 존경하고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자신이 늘 가지고 있었던 인생의 고민을 주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 자리에 지금 당장 여러분들 눈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묻고 싶습니까? 주님께서 한 가지만 물어보라, 내가 대답해 주마 하고 말씀하신다면 어떤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주님, 돈을 많이 벌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려면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 저는 출세하고 싶은데요. 저 높은 자리까지 오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마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돈 많이 벌고 싶으냐, 재정 전문가를 찾아가라.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으냐, 의사를 찾아가든 헬스 트레이너를 찾아가라. 출세하고 싶으냐, 서점에 가보라. 처세술에 대한 책이 널려 있다. 그거 읽어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일까요. 이 본질적인 질문이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궁금해하고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도무지 깨달아지지 않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가 예수님께 질문해야 됩니다.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이 질문을 평생 마음에 가지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각양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 최고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 본질적 질문을 가지고 살아왔던 서기관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고 예수님을 통해서 답을 찾게 하셨습니다.
1-2. 본질적 질문
제가 전임 전도사로 사역할 때 그때 그 교회에서 각 교역자들에게 한 과목씩 성경공부를 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교리 공부반을 맡았습니다. 저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조직신학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리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성도들에게 멋지게 교리 공부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제가 커리큘럼을 구성을 했습니다.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신론, 기독론, 성령론, 인간론, 죄론, 예정론, 종말론 등등의 커리큘럼을 구성했습니다. 삼위일체 역사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삼위일체 논쟁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삼위일체 이단들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여러 학자들이 어떤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는지, 그 논리의 장점과 단점과 약점은 무엇인지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참 인간이신지 참 하나님이신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기독론 논쟁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정론의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수업을 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빛이었습니다. 성도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을 저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눈빛의 초점이 없습니다. 허리멍덩해 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눈으로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도 고민이 되었습니다. 뭐가 문제일까. 왜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을까. 열심히 가르치는데도 더 많은 자료를 준비해서 더 많이 가르치고 설득적으로 수업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문제가 반복됩니다.
거의 한 학기가 마쳐 갈 때쯤에 어느 한 할머니 집사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사님, 성경 배우고 싶어요. 우리는 여기서 성경 배우러 왔는데 성경은 일 절도 찾지 않고 외국 사람 이름만 계속해서 말씀하시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배우고 싶어요. 하나님의 말씀 가르쳐 주세요."
저는 그때 크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죄송스러웠습니다. 성도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저 자신에게 실망했습니다. 그렇구나, 지금 이 자리는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배우는 자리다. 그런데 성경은 덮어 놓고 논리와 신학과 역사만 씩 걸쳐 들었으니 이 죄를 어떻게 감당할까. 하나님은 고민하는 저에게 답을 주셨습니다. 그 할머니 집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다시 회개하고 돌이키고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 질문은 우리의 신앙의 수준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질문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의문을 가지는 그 질문, 언젠가는 풀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든지, 설교를 통해서 깨닫게 하시든지, 예수님 같은 분을 만나게 하시든지, 저처럼 어느 할머니 집사님의 입술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든지, 중요한 것은 궁극적 질문을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기 서기관 같은 훌륭한 질문이 우리의 질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가장 큰 계명
예수님께서 서기관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답을 주셨습니다. 29절에서 31절까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2-1. 분리 불가한 사랑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두 가지 유의해야 될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한 호흡에 읽어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읽은 것처럼 끊어서 나누어서 읽으면 안 됩니다. 두 번째 주의해야 될 점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첫째 하나님 사랑, 둘째 이웃 사랑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최고의 가치고 이웃 사랑은 그보다 낮은 하등의 가치라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똑같은 가치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31절 끝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만약에 하나님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면 첫째 하나님 사랑을 말하고 거기 후에 적어 놓아야 옳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다 말씀하신 끝에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등가의 가치입니다. 똑같은 말씀입니다. 절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증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실 때 두 가지 돌판을 주셨습니다. 첫째 돌판, 두 번째 돌판. 첫 번째 돌판에는 일 계명부터 사 계명까지가 적혀 있고, 두 번째 돌판에는 오 계명부터 십 계명까지가 적혀 있습니다.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고 절하지 말라. 세 번째,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 네 번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걸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부모에게 패륜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에게 막말을 하고 눈을 부라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은 살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은 간음할 수 없고 도둑질할 수도 없습니다.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언할 수도 없고 이웃의 것을 탐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 주변을 보면 언론 보도를 보면 저 사람이 하나님 믿는 사람이 분명한데, 교회에 출석하고 직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이웃을 미워하고 막말을 하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사랑한다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이웃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이웃의 것을 탐낼 수도 없고 거짓 증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들은 입으로는 정말 하나님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죄 없는 예수를 살인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여기 서기관처럼 예수님과 대화하다가 예수님께 빠져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게 됩니다. 감동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과 21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그 형제를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2-2. 진짜와 가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그 증거를 요구하십니다. 어떻게 증거를 보이겠습니까? 그 증거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의 한 면만 인쇄되어 있는데, 만약 한 면만 인쇄된 걸 가지고 유통시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위조 지폐범으로 잡혀 갈 것입니다. 한 면만 인쇄된 지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가짜입니다. 양면이 다 인쇄되어 있어야 그게 진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린 다 가짜입니다. 거짓말하는 자, 가짜 성도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짜가 되시겠습니까, 가짜로 살고 계시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진짜가 되어야 합니다.
3. 사랑의 실천
우리는 때때로 평생 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어려운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고 각자 가정에서 흩어져서 예배드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신학적 논쟁이 뜨거워질 때도 있습니다. 흩어져 드리는 예배가 과연 성경적이냐, 신학적이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도 한국전쟁 때도 예배당 예배를 포기한 적이 없다. 사탄이 시험하는 것이다. 모여서 열심히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지 말고 모여서 열심히 예배하자.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주장에 빠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그 옛날 일제 강점기 때, 한국전쟁 때 우리는 순교를 각오하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실제로 예배드리다가 그 자리에서 불에 타 죽은 사람, 사로잡혀서 고문당하고 순교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만약 똑같은 상황이 오늘 이 순간 벌어진다면 우리 믿음의 성도들 중에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순교의 제물이 될 분들이 한두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뜨거운 믿음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과 오늘의 전염병 상황을 일치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면 잠재적으로 전염병의 온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이웃들도, 기저 질환이 있는 노인들, 가정의 면역이 약한 어린아이들에게 잠재적 위협 세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3-1. 참고 견디는 사랑
우리는 정말 모여서 예배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 내 손으로 헌금하고 싶고, 목청껏 찬양하고 싶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성도의 손을 부여잡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싶고, 식탁 공동체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참고 견디고 가정에서 예배드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모여서 예배드리고 싶으나 흩어져서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이유는 이웃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그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 꼭 물질로만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으로만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시기에 흩어져 예배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십사 세기 유럽에서 페스트, 흑사병이 창궐했습니다. 그때 유럽 사회를 이끌고 있었던 두 지성이 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지식인 집단, 의사들이었고, 또 한 그룹은 성직자 그룹이었습니다. 의사 그룹, 지식인 그룹이 처방을 내어 놓습니다. 이 열병이 몸이 뜨거워지니 피를 뽑아서 땅에 버리면 열이 내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제로 피를 뽑습니다. 다니면서 의사들이 사혈을 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어서 죽어 가는데 필요한 피까지 뽑으니 사람이 어찌 살겠습니까? 피를 뽑다가 피가 지혈되지 않아 감염이 되고 사람이 죽어 나갑니다. 그렇게 무지했습니다.
또 한 그룹 성직자 그룹들이 처방을 내놓습니다. 우리가 이럴 때일수록 성전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드려야 됩니다. 열심히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됩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전에 모여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참혹하고 비참했습니다. 그 당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 이천오백만 명의 죽음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 당시는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그렇다 치고 오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너무 모여서 예배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열정으로 지금 참고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이웃 사랑의 실천을 몸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3-2. 진짜 교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시간들이 오래 지속되면 성도들의 믿음이 약해질까 두렵다. 교회가 와해될까 두렵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만약 그렇게 될 것이라면 그런 교회는 무너지고 없어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진작에 무너질 거라면 그렇게 무너질 것이었으면 무너지는 것이 좋습니다.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반성해야 됩니다. 이런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성도들의 믿음이 와해되고 무너져 내린다면 평소에 신앙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 진짜가 드러나고 가짜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면역 체계가 제대로 활동하고 제대로 돌아가는 교회는 오히려 더 단단해집니다. 오히려 더 하나님 앞에 굳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이천 년 역사를 보더라도 그건 기우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보다 더한 시험이 예수님 위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지금껏 하나님의 역사, 기독교 역사는 지금껏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망하려면 진작에 망했어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것이 이미 역사에서 사라져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여기까지 내려와 있지 않습니까? 복음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걱정합니다. 헌금이 줄어들 것이다. 당연히 줄어들겠지요. 그러나 헌금이 줄어들면 거기에 맞춰 살면 됩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얼마나 풍족하게 살았는지,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닌 것에 얼마나 돈을 펑펑 쓰고 살았는지 우리의 탐욕과 우리의 죄악을 돌아봐야 됩니다. 먹는 것에, 마시는 것에, 배 불리는 것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곳에 물질을 쓰지 못하고 교회가 흥청망청 써 버린 것을 반성해야 됩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든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께 드려진 이 값진 예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우리는 다시 처음부터 원점부터 교회 재정을 다시 설계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 어려운 기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시간으로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 그냥 모여서 예배드리는 날을 허락해 주십시오, 다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습니다, 이 문제가 아니라 모여서 예배드릴 때 그럼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가, 하나님께서 원하고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집중하고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헌금에 참여하는 것,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나 먹고살기 힘들고 어려운데, 이럴 때일수록 국가가 위기에 처하고 다른 이웃이 위기에 처하고 어려워하는 이 시기에 우리가 각자의 먹고 살 것을 다 나누고 또 나누어서 함께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예배드리고 싶지만 참고 견디고 흩어져서 예배드리고, 거룩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것, 지금 하나님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함께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서면은 "하나님, 저는 다른 건 몰라도 가장 큰 계명, 첫 번째 되는 계명을 지켰습니다" 이렇게 말씀할 수 있는 주의 백성들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서기관처럼 우리도 마음속에 있는 궁극적 질문을 주님께 드립니다. 항상 고민하고 걱정하고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 갈망했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답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만나면 꼭 묻고 싶은 것 마음에 새기고 있다가 주님께 여쭤 보는 믿음의 자녀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다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뿐 아니라 이어지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는 용기와 지혜를 허락해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삶을 능력 있고 가치 있게 살아내어서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첫 번째 되는 계명, 가장 큰 계명을 실천하며 살다 왔습니다" 하나님께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자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