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 보기 (막 12:35-44)
노만 록웰(Norman Rockwell)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미국의 화가이자 일러스트 작가입니다. 1894년에 태어나 1978년까지 84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무려 47년 동안이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라는 미국의 주간지에 표지 삽화를 그렸습니다. 그분이 남긴 삽화는 가장 미국적이고 가장 서정적이며 미국인의 감정을 잘 드러내는 탁월한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중에 한 작품을 소개합니다. 1929년에 그린 '의사와 인형'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보시면 의사 선생님이 진찰을 하고 있는데 인형에다가 청진기를 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그림을 보시면서 상상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저는 이 그림을 보며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이 여자아이가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처럼 아끼던 인형이 마치 사람처럼 바뀌었는데 이 아이가 배가 아프고 열이 납니다. 밤새도록 간호해 주었는데 열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잠에서 깨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꿈인지 생시인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엄마에게 달려갔습니다. 인형이 아프다고, 내 동생을 빨리 의사 선생님께 데리고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엄마는 난처했습니다. 아이를 타이르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의사 선생님에게 갔습니다. 선생님은 엄마를 안심시키고 그리고 짐짓 모른 체하면서 인형에다가 청진기를 갖다 댑니다. 그리고 점잖게 아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생을 밤새껏 열심히 잘 간호해 주었구나.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집에 데리고 가서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고 잘 돌봐 주면 거뜬히 일어날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그리고 돌려보냈습니다. 저는 그런 상상을 했습니다. 노만 록웰은 이 작품을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이후인 1942년에 같은 제목의 또 다른 그림을 그렸습니다. 앞의 그림과 뒤의 그림이 어떻게 달라져 있습니까? 의사 선생님은 더 나이가 든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더 어려 보입니다. 인형은 훨씬 더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청진기가 사라졌습니다. 이제 의사 선생님이 인형의 맥을 잡고 있습니다. 마치 살과 살을 부딪히는 것처럼 인형의 맥을 재고 있습니다. 한쪽 손으로는 시계를 보며 인형의 맥박이 얼마나 되는지를 재고 있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의사 선생님은 인형을 진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돌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화도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에게 핀잔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이와 입장을 바꾸어서 아이의 간절한 마음을 다독이고 있습니다. 눈높이를 낮춰서 아이의 마음을 곱게곱게 다독여 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세월이 지나서 시간이 한참 지나서 이 여자아이가 어른이 되면 자신의 어린 시절 이 모습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따뜻한 마음으로 기억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철없던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을 힘들게 했는데, 선생님은 한 번도 나를 나무라지 않고 열심히 진찰해 주었다고 말입니다. 입장을 바꿔 보고 그리고 내 속마음을 진찰해 주던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아이도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읽는 것도, 어떤 자리에 앉는 것도, 헌금하는 사람을 보는 것도 지금 우리가 고착화된 자신의 방식대로 바라보지 말 것을 주문하십니다. 뒤집어 보기를 말씀하십니다. 자기중심으로 성경을 읽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을 읽고, 예수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렇게 살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굳어지고 고착화된 영혼의 문제를 깊이 살피고 회개하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성경을 뒤집어 보라
예수님께서 모처럼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을 만났습니다. 서기관은 진심으로 자신의 속 깊은 마음을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예수님,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진심을 여쭈었습니다. 진지하게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했습니다.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건 결코 분리되지 않는 계명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서기관은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을 포함해서 수많은 백성들을 성전에 앉혀 놓고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증거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 증거하시는 모습을 보면 이제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분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진지하고 편안하고 아주 행복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역설적인 말씀을 화두로 던집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이건 역설적인 질문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맞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혈통상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옳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뒤집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근거가 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시편 110편 1절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셨습니다. 다윗이 시편을 기록하면서 성령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라고 칭하고 있는데 여기 '주'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나를 가리켜 '주'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런데 어떻게 내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다윗이 나를 '주'라고 칭했는데 말이다 하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 역설적인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이 즐겁게 듣더라"
성경 공부는 본질적으로 재미있는 것입니다. 성전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들었습니다. 아주 행복했습니다. 막혔던 가슴이 뻥 하고 뚫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아주 흥미롭고 즐거웠습니다. 원래 성경 공부는, 원래 설교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까지 배워왔던 지식이 한 번에 뒤집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몰랐던 것이 깨달아집니다. "아!" 하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그러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희열이 차오릅니다. 영적 쾌감이 느껴집니다.
이건 학교에서 학습하는 것과는 질이 다른 것입니다. 배우지 못한 분들도, 학벌이 없는 분들도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을 들으면 너무너무 행복하고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기쁨이 있습니다.
1-1. 전통에 갇힌 해석
그 당시 예수님 시절에 성전과 회당에서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언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회당에서도 말씀을 듣고 성전에서도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답답한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 반복되는 이야기, 자신들의 가슴을 옥죄는 이야기만 들으면서 한 번도 주님의 말씀을 즐겁게 재미있게 들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당시 회당이나 성전에서 말씀을 전했던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같은 유대 종교 권력가들은 말씀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내려오는 전통 그대로 말씀을 증거합니다. 그들은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통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속사적으로 설교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을 예수님으로 수렴시켰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다시 구약을 해석하셨습니다. 그러니 시선이 뒤바뀌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너무 신비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연구하시는 주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해서 백성들에게 알려주시는 주님, 그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신비롭고 즐거웠습니다.
1-2. 자기중심적 해석
또 하나, 그 당시 종교 권력가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민수기 18장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그 당시 유대 종교 권력가들은 이 말씀을 십일조의 기본으로 가르쳤습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는 분깃이 없습니다. 땅이 없습니다. 나머지 지파들은 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일조를 가지고 와서 레위 지파에게 드렸습니다. 레위 지파는 십일조를 가지고 자신의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일조의 기능이 레위 지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데도 얼마든지 쓰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 지도자들은 그걸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명기 14장 28절과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출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십일조의 기능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기능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로 십일조를 사용하도록 율법에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종교 권력가들은 그걸 가르치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오직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성경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1-3. 말씀 중심의 해석
우리 예수님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셨습니까? 말씀에 비추어서 사람을 책망합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사람을 칭찬합니다. 어떤 악한 감정이 있어서 누구를 책망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비춰 보니 너는 나쁜 사람이다, 너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해석하고 가르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책망을 하더라도 말씀으로, 칭찬을 하더라도 말씀으로, 천국 비유도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이 시대 강단에서 어떻게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까?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은 철저하게 말씀을 연구하고 준비해야 됩니다.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변화의 물결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말씀을 연구하고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의무입니다. 변함없이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공부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것, 죄스러운 일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호도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끌고 가서도 안 됩니다. 목사의 권위를 세우는 일에 말씀을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의 교권을 강화하는 일에, 성도들에게 헌금을 많이 거둬들이는 일에 말씀을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그 죄 값을 어떻게 다 치르려고 그렇게 할까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고 재미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말씀 자체로 가르치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2. 삶을 뒤집어 보라
예수님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십니다. 자기중심적 해석에서 예수님 중심, 하나님 중심의 해석으로 바뀌어진 것처럼 우리의 삶도 예수 중심으로 바뀌라고 말씀하십니다. 38절과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거기 서기관이 앉아 있습니다. 서기관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서기관으로 대표되는 유대의 종교 권력가들의 행태를 주님이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다닐 때 먼저 인사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인사를 받으려 합니다. 자리에 앉을 때도 최고 높은 자리, 상석에 앉습니다. 낮은 자리는 앉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뜻은 노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일하지 않고 땀 흘리지 않습니다.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대접 받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항상 인사만 받습니다. 항상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종교 권력자들의 행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셨습니다.
2-1. 하늘이 땅이 되심
예수 정신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정신을 '예수 혁명의 정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 정신의 핵심은 하늘이 땅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됨을 취할 분이십니다. 가장 높은 곳에 영광 중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땅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낮고 비천한 곳,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병든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던 나병 환자를 만지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땅처럼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던 자들을 하늘로 끌어올려서 그들을 하늘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정신, 예수 혁명의 정신은 하늘이 땅이 되는 것이고 땅이 곧 하늘이 되는 정신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정신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목동이 왕이 됩니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왼손을 쓰는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영적 지도자가 됩니다. 세상에 그런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2-2. 교회 공동체의 정신
초기 한국교회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주인과 머슴이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교회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머슴이 먼저 장로가 됩니다. 주인은 진심으로 박수 쳐 줍니다. 집에 돌아오면 주인과 머슴의 관계인데, 교회 가면 장로님으로 열심히 섬기고 열심히 따랐습니다. 이것이 예수 정신입니다. 뿌리 깊은 사대주의, 뿌리 깊은 양반 중심주의에서 예수 정신이 우리에게 들어오니 놀라운 혁명과 변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공동체입니다. 세월이 흘러 시간이 가서 예수 정신이 사라진 교회 공동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하늘이 땅이 되는 곳이고, 땅이 하늘처럼 받들어지는 곳,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 주신 곳, 이곳이 바로 교회 아닙니까? 어떻게 교회가 세상과 동일화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대비해서 존재적 탁월성을 가지는 공동체입니다.
때때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세상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볼멘소리를 말합니다. 너무 심하게 교회를 단속한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클럽은 단속하지 않으면서, 젊은이들이 다니는 술집은 단속하지 않으면서, 왜 교회만 이렇게 심하게 잣대를 들이대느냐 하는 목소리입니다. 저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절망했습니다. 어떻게 교회가 클럽과 술집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교회의 권위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입니다. 교회는 클럽과 술집과 같은 동일 선상에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 한 곳도 교회 공동체와 동일화될 수 없습니다.
앞서가는 세상의 사람들은 평등을 말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평등을 넘어 하늘이 땅이 되셨습니다. 땅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 예수 정신, 예수 혁명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존재적 탁월성을 가진 교회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입으로 세상의 여러 공동체와 동일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교회 공동체, 내가 믿는 예수님은 하늘이 땅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가 예수님 따르는 제자라면, 우리도 예수 혁명의 정신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인사 받기 좋아하고 상석에 앉는 것이 아니라, 역전하고 뒤집어지고, 다른 곳에 가서 앉고,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자들, 그런 혁명의 정신이 교회 안에 살아 숨 쉬어야 할 것입니다.
3. 헌금을 뒤집어 보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증거하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드나들면서 헌금 바구니에 헌금을 합니다. 딱 봐도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엄청난 금액을 가지고 와서 헌금함에 올려놓습니다. 그 안에 넣을 수가 없어서 올려놓고 갑니다. 부자들입니다.
그런데 저 구석에서 부자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과부입니다. 여인이 쭈뼛쭈뼛 줄 때를 살피다가 와서 헌금함에 동전 두 개를 넣었습니다. 소리가 크게 납니다. 여인이 넣었던 동전은 두 렙돈이었습니다. 렙돈(λεπτόν)은 그 당시 헬라 사회에서 통용되는 동전이었습니다. 1데나리온(δηνάριον)의 100분의 1의 가치를 가집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화폐로 환산해 보면, 노동자 하루 품삯을 단순하게 10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1렙돈은 100분의 1인 1,000원 정도 됩니다. 두 렙돈을 넣었으니까 과부가 2,000원 정도를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이 여기 온 어떤 사람들의 헌금보다 훨씬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44절에 나옵니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3-1. 사연을 보시는 주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에게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 예수님은 헌금의 객관적인 액면가를 보는 분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은 그 헌금에 들어있는 사연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과부의 사연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두 렙돈을 헌금하면 놓고 나면 굶어야 하는 과부의 사연을 말입니다. 왜 과부가 되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살고 있는지, 이 헌금을 넣기까지 얼마나 마음에 심한 갈등을 했는지, 성전에 나왔는데 부자들이 으시대면서 넣는 헌금을 보면서 자신의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 때문에 돌아갈까 몇 번을 망설이던 사연까지, 우리 주님은 과부의 심정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연을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께서 하나님의 교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헌금하시는 그 사연들도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어떠한 청년이 취업을 위해서 매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취업을 했습니다.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은혜 입은 분들에게 보답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 청년이 한 푼도 쓰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에 가지고 나와서 주께 드립니다. 우리 주님은 그 청년의 사연을 다 알고 계십니다. 열심히 공부했던 사연과 이 헌금을 드리기까지 그 소중한 마음과 갈등했던 수많은 갈등의 마음들까지 우리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어르신들이 자녀들에게 받았던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꼬박 모았다가 하나님의 성전에 가지고 나와서 드립니다. 그 사연도 하나님 다 알고 계십니다. 자식 잘 되기를 위해서 간구하며 기도하는 그 어르신들의 간고(艱苦)한 그 마음의 절절한 기도 제목도 우리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한 아이가 자신의 저금통을 깨뜨려서 재난으로 힘들어하는 이웃을 위해서 써 주십시오 하고 낸 헌금의 사연도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얼마나 소중한 마음인지, 얼마나 거룩한 마음인지 하나님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목사밖에 알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3-2. 마음을 다해 드림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며 위로받으며, 또한 우리가 드리는 이 마음,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다해 주께 드려야 되겠다는 결단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이 헌금을 사용하는 걸 결정하고 집행하는 교회 중직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열 번 기도하고 백 번 기도해서 이 헌금이 정말 나의 임의대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함을 교회 중직들은 결단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절대로 허튼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단 한 번이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연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 헌금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목회자들은 감사함으로 헌금을 받아서 자신의 삶에 사용해야 됩니다. 거룩과 감사로,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연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뒤집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 입장이 되어서 철저하게 예수님의 눈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예수 정신으로, 예수 혁명의 정신으로, 하늘이 땅이 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입장을 바꿔 놓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헌금을 드릴 때도, 헌금을 사용할 때도 바꾸어 보라고 말씀하시는 이 주님의 거룩한 말씀이 우리의 삶에 거룩한 지침이 되고 빛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도 자기중심적으로 읽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읽으며, 자리에 앉을 때도 예수 혁명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거룩한 예물을 드릴 때 전심으로 드리게 하시고, 우리의 사연을 보시고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보시는 우리 주님 앞에 마음 다해 드리게 하시며, 예물 사용을 결정하는 중직들이 열 번 백 번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한 방향으로 사용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 새기며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