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막 13:1-6)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되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을 줄로 믿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번 한 주간 특별하신 주님의 은총과 놀라운 축복이 삶을 지배하는 능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 중에 '서울쥐와 시골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마 내용은 모든 성도님이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서울쥐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시골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위해 극진히 대접합니다. 음식 준비를 열심히 해서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쥐가 영 맛있게 먹지 않습니다. 음식 타박을 합니다.
그리고 서울 자랑을 합니다. 서울에는 맛있는 케이크도 있고 치킨도 있고, 화려하고 멋진 조명도 있고, 화려한 도시를 마음껏 누리고 볼 수 있는데, 넌 시골에서 이런 것 먹고 사느냐고 시골쥐를 타박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분 나쁘게 들었는데, 시골쥐가 자꾸 듣다 보니까 서울에 대한 동경이 생깁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먹고 누리고 있는 일상이 한심하게 여겨졌습니다. 서울쥐가 떠나고 나서 시골쥐는 마음속에 서울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무작정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가서 친구 서울쥐를 만났습니다. 서울쥐는 친구를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그리고 케이크도 치킨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케이크도 있고 치킨도 있고 먹거리가 너무 많은데, 그걸 먹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얼마나 많은지, 또 사람들이 군데군데 얼마나 많은지, 또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듣다 보면 케이크에 누군가가 쥐약을 뿌려놓아서 그걸 먹고 죽었다는 쥐들의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래서 함부로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불안하고 불편해졌습니다. 그제야 시골쥐는 깨닫습니다. 내가 누렸던 일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했던 것인지. 그리고 나서 자신은 미련 없이 서울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이 동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고 명백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을 따라갑니다. 좋아합니다. 보이는 것이 화려하고 들리는 소리가 크면 그곳으로 따라가기가 일쑤입니다. 하지만 참 미련한 인생입니다. 속을 보지 못하고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본질을 살펴야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본질을 살피고 볼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분별력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우리 내면에 자리한 분별력을 살피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성전의 외양과 본질
1-1. 제자의 감탄
예수님께서는 모처럼 성전에서 마음껏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즐겁게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하늘이 땅이 되는 예수 혁명의 정신을 말씀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빗대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부자들과 과부의 헌금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렙돈을 넣었던 과부의 헌금이 가장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헌금하는 자의 사연을 보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성전을 나서십니다. 그때 한 제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여기서 한 제자가 말한 이 말은 감탄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 돌들이여! 멋지고 귀하고 위엄스러운 이 건물들이여!" 이런 말입니다. 감탄한 말입니다. 헤롯 성전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취해서 자기도 모르게 한 제자가 예수님께 "예수님 보십시오. 이 돌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건물이 얼마나 위대하고 귀하게 보입니까?" 하고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1-2. 예수님의 경고
그런데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의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물론 예수님께서는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 성을 침략하고 헤롯 성전을 파괴한 것을 말씀하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렇게 위엄 있고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니,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성전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가 과연 무엇일까요?
2. 성전의 역사
예수님의 의도를 살피기 위해서는 성전의 역사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공부해 봐야 합니다. 성전은 성막 시절을 포함해서 총 네 번의 성전 시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성막 시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막에서 하나님이 친히 "내가 너희와 만나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성막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깊은 교제를 누렸습니다. 성막 시절입니다. 이 성막 시절은 다윗 시절을 거쳐서 솔로몬 시절까지 이어집니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지금도 저 천막에 거하는도다" 하나님께 간절하게 구했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가서 성전을 짓습니다.
솔로몬 성전 시절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하게 지었는지, 다윗이 전쟁하면서 모아둔 전리품과 솔로몬 시절의 금은보화로 위대하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봉헌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됩니다. 불탔습니다. 그야말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성전에 있는 각종 금은보화와 그릇들은 다 바벨론으로 약탈당했습니다.
세 번째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이 70년 포로기를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포로 귀환 이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규모에 있어서는 솔로몬 성전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소박한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성전에서 기뻤습니다.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 시절입니다.
네 번째 성전이 바로 예수님 시절의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은 원래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에돔인으로서 유대인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환심이 필요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그가 많은 돈을 들여서 화려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곳에서 예배드리라고 보내준 것입니다.
2-1. 외양은 초라해도 충만한 시대
총 네 번의 성전 시절, 이 성전 시절에 두 성전은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성전이고, 또 두 성전은 보기에 화려한 성전입니다. 성막 시절과 스룹바벨 성전 시절은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사람들이 보기에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천막이었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이 만든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때가 성전의 외양처럼 영적인 암흑기였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나타나셨고, 모세와 깊이 있는 영적 교제를 나누셨고, 백성들이 간절한 소원이 있으면 모세를 통해서 성막에서 하나님께 구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 시절에 그 언제보다도 그 어느 때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깊이 있는 영적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비록 천막이었지만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곳이 바로 성막 시절이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예배드리고 싶었겠습니까? 마음껏 찬양했습니다. 기뻐 뛰며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 시절, 하나님이 성전 되시는,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하나님 자체가 성전의 머리 되시는 성전 시절이었습니다.
2-2. 외양은 화려해도 암흑이던 시대
그런데 반면, 솔로몬 성전 시절과 헤롯 성전 시절은 화려하기로는 세상의 그 어느 것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어땠습니까? 영적으로 부흥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난 이후에 타락했습니다. 이방의 공주들과 결혼하고 이방 신상을 섬겼습니다. 그 타락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어집니다.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결탁했습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성전 되시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주인 되는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책망하시고 때로는 달래기도 하고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언하는 선지자들을 가둡니다.
예레미야 20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같이 예언함을 들은지라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칼에 채워 두었더니." 예레미야는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어야 함을 선포하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체포합니다. 때리고 성전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엎드려야 한다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사람들은 듣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거짓 정치인들과 결탁했습니다. 백성들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예언합니다. 미가 3장 1절에서 3절입니다.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여기에 기록된 대로 백성들은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지 않고 사람이 주인 되는 성전, 그 피해는 백성들이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3. 교회의 참된 주인
예수님 시절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 권력인 헤롯당과 종교 권력인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대제사장, 율법학자들이 결탁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한마음이 됩니다. 빌라도와 헤롯이 그날에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너희들이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성전이 기도한다는 의미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성전에 나와서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는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성전에 나오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하나님, 제가 지은 죄를 자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성전에서 말씀하시면 저는 고치겠습니다." 목사도 예외가 아니고 장로도 예외가 아니고 성전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머리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시절, 솔로몬 성전 시절에는 성전의 주인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전을 필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성전을 파괴하시고,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서 헤롯 성전을 파괴하십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오늘 이 시대 교회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교회가 정말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인이셔야 됩니다. 어리석은 예수님의 제자처럼, 여기 이 제자가 헤롯 성전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외쳤던 사람처럼, 우리도 성전의 껍데기만 보고 살고 있는 건 아닙니까? 성전의 외양만 보고, 건물만 보고, 사람들이 모이는 숫자만 보고, 예산만 보고, 이 교회는 좋은 교회고 이 교회는 하나님 기뻐하시는 교회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교회가 참된 교회, 본질로서의 교회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셔야 됩니다. 목사도 교회의 주인이면 안 되고, 장로도, 교회의 유력한 자도, 그 어느 누구도 교회의 주인일 수 없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 한 분 앞에 우리 모두가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예배하는 교회, 이 교회가 참된 교회일 줄로 믿습니다.
4. 미혹받지 않는 분별력
4-1. 진리의 길
이것을 분별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기서 분별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여전히 이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말씀에 충격받은 것,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언제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인지. 무너진다면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 중에 리더 격인 네 명의 제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언제 어느 때에 어떤 징조가 일어날 것입니까?" 이들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위대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무너진다는데, 그러면 언제 무너질까요? "예수님, 어느 때에 무너집니까? 그러면 그 전에 징조가 있을 텐데, 그 징조를 저희들에게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은 여전히 껍데기로서의 성전, 건물로서의 성전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마치 선문답처럼 대답하십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핵심 단어 두 가지입니다. '주의하라', '미혹하리라'. 한마디로 말하면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 말씀입니다.
여기서 '미혹하다'라는 단어는 '플라나오(πλανάω)'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길을 잃고 헤매다', '정신을 잃다', '넋을 잃다'라는 뜻입니다. '주의하다'는 '블레포(βλέπω)'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두 눈을 부릅뜨고 살피라', '정직하게 살펴야 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것입니다. "너희들은 건물에만 관심이 있구나. 건물은 어차피 무너질 것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아무리 잘 지은 성전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건물이 너희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이 성전이 언제 무너지는지, 무너질 때 어떤 징조가 있는지, 거기에 관심 가지지 마라. 너희 영혼에 관심을 가져라. 너희 영혼이 미혹을 받아서 넋을 잃고 길을 잃고, '내가 그리스도라' 하는 이를 따라가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상세하게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너의 영혼을 지켜라."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위로가 됩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따라가야 됩니까? 한 가지 우리가 여기서 질문을 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따라가야 될 그 길이 무엇입니까? 미혹을 받는다는 건 진리의 길을 가다가 샛길로 빠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길, 내가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지, 내가 정말 진리의 길을 걷고 있는지, 이것은 어떻게 분별해야 됩니까? 이 길을 가려면 우린 어디에 서 있어야 됩니까? 이 질문을 우리는 누구나 주님께 드려야 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가지입니다. 진리의 길, 참된 길, 오직 그 한 가지는 예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3년 동안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3년간 양육하고 말씀으로 가르친 것처럼 그 가르침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미혹받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블레포(βλέπω) 살피라. 너의 영혼을 살피라. 어떤 이가 미혹하면 이 길이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참된 길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해 내라." 이 말씀이었습니다.
4-2. 말씀을 가르쳐야 할 책임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미혹받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말씀 위에.
한때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집단이 있습니다. 그 집단은 이 사회에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교인들이야 하도 많이 들어서 그들이 어떤 집단인지 다들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그 이단이나 교회나 같은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이단 집단은 수십 년이 넘어오는 동안 엄청나게 세를 확장했습니다. 수십만 명의 신도들을 확보했습니다. 폭발적인 성장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단의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기존 교회입니다. 우리들입니다. 이단이 성장한 데는 기존 교회가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단은 그들이 세를 불릴 때 기존 교회의 타락과 도덕성의 몰락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이단은 기존 교회를 바벨론이라고 말합니다. 타락한 바벨론. 물질에 타락하고 도덕에 타락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바벨론이라고 교회를 물고 늘어집니다. 목회자의 타락과 교회의 타락을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타락과는 별개로 오늘 우리가 이단이 말하는 교회의 타락에 대해서 딱히 반박할 말이 없습니다. 실제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싸우고, 교회는 분열합니다. 교회는 세습을 거듭합니다. 교회는 여전히 물질 때문에 얼룩져 있고 타락해졌습니다. 목회자나 교회나 이 집단, 저 집단으로 나뉘어서 사분오열되어서 싸웁니다.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은 그런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갑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양산됩니다. 그들에게 이단은 손을 내밉니다. "거봐, 너희들이 다닌 그 교회는 가짜야. 타락하잖아. 물질에 타락하고 권력에 취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그 집단에 너희들이 계속 있었으면 어떻게 될 뻔했니? 진리의 전당에 들어오라." 그들이 그렇게 손을 내밉니다. 교회의 타락이 성도들을 떠나게 했고, 그 떠난 성도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필요로 했으며, 그때 손을 내민 것이 이단 집단입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기존 교회가 이단을 살찌게 하고 배부르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단은 그 내용은 이단적이지만 껍데기는 성경 공부로 잘 포장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성경을 가르칩니다. 지금도 이단에 있는 사람들, 이단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다들 성경공부라고 말합니다. 재미있는 성경공부. 지금까지 몰랐던 걸 알게 해준 성경공부.
교회는 어떻습니까? 전도는 열심히 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프로그램은 열심히 돌립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에 기초해서 말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단에서 복음방을 지나서 본당에 들어가려면, 정식 신도가 되려면 시험을 봐야 됩니다. 그 시험이 만만치 않습니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그들이 합숙도 합니다. 일대일 공부도 하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옛날 제가 어릴 때 교회학교 다닐 때는 1년에 두 번씩 시험을 꼭 봤습니다. 성경고사를 1월에서 6월까지 공과 공부한 걸 6월 말에 시험을 봅니다. 7월에서 12월까지 공부한 건 12월 말에 시험을 봅니다. 통과하지 못하면, 일정한 점수를 받지 못하면 나머지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이 시대에 우리 교회학교에서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부모들이 난리 날 것입니다. 왜 우리 애에게 이렇게 스트레스 주느냐고, 왜 우리 애에게 학교에서도 하지 않는 시험을 보게 하느냐고 난리 날 것입니다. 학원 보내야 되는데 웬 성경공부냐고 난리도 아닐 것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성경고사는 이미 옛날에 유물이 되고 없어져 버렸습니다. 교회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가르칠 교사도 태부족입니다. 교사가 성경을 잘 모릅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해서 교회에 와서 한 시간만 예배만 드리고 돌아갑니다. 한 시간 예배 시간 가운데 말씀을, 진리 위에 제대로 배우고 가르치는 시간은 몇 분 되지 못합니다. 가정에 갑니다. 가정에서 일주일 동안 성경 읽지 않습니다. 방치됩니다.
그렇게 해서 초중고 12년을 보내고 졸업하면 성경의 인물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교의 참된 진리에 대해서도, 성경의 여러 사건에 대해서도 무지한 자들이 됩니다. 대학생이 되어서 인생에 고민이 생깁니다.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를 사귑니다. 그때 친구가 접근합니다. "너 요즘 고민 많지? 나랑 차 한잔 하자." 그러면서 이단이 손을 내밉니다. 성경공부를 얘기합니다. 막연하게 기대했던 성경공부에서 나름대로 자기는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몰랐던 것이 깨달아집니다. 교회에서 배우지 않았던 것, 이단에서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그곳을 진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 탓입니다. 요즘 이 시대 젊은이들이 이단으로 가는 이유, 이단의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 교회 탓입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아서. 어렵지만 한 영혼, 한 영혼 붙들고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성 있게 가르쳐야 하는데, 목회자들이 책임성이 없고 교사들이 책임성이 없고 교회가 능력이 없어서 아이들을 방치한 결과가 지금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 큰 책임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하겠습니까?
길을 가르쳐 놓아야, 참된 진리가 어떤 길인지를 가르쳐 두어야 미혹받지 않을 것 아닙니까?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진리의 길을 제대로 제시해 주지 않았는데, 이것이 미혹인지,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르고 이끄는 대로 따라가 버릴 것 아닙니까? 이런 일이 오늘 우리 주변에서, 우리 가정의 자녀들에게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 탓입니다. 목회자 탓이고 성도들 탓이고, 교회가 세상을 쫓아가느라 정신없이 교회의 외양에 몰두하고 있을 때, 우리 자녀들은 그렇게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린 돌이켜야 됩니다. 외양이 아니고 본질에 몰두해야 됩니다. 분별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쳐줘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미혹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말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3년 동안 주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열광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물 위를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능력, 그것만 보고 열광했습니다. 예수님의 본질, 예수님이 우리의 죄짐을 지고 이 땅에 오신 참된 메시아이심을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분별하는 것이 곧 실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매일같이 말씀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며 본질 위에 굳게 서서 진리의 길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미혹받지 않습니다. 그래야 껍데기에 속지 않습니다. 진리 위에 굳게 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주님 앞에 예배드립니다. 그 옛날 어리석은 제자처럼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합니까?" 감탄했던 자가 바로 우리가 아닙니까? 껍질에 속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고, 귀에 들리는 것을 쫓아가는 미련한 인생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어느 때에, 무슨 징조가 있어야 이 건물이 무너질 것인지 몰두하는 미련한 제자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미혹되지 말라 하시고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분별하는 자 되기 원합니다. 더디고 지루하고 힘들지라도 주의 말씀에 기초하며,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우리의 마음에 새기는 지혜로운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악한 세상에 우리가 먼저 주님의 등불이 되게 하시고, 빛과 소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