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강 / 깨어 있으라 (13:28-37)

깨어 있으라 (막 13:28-37)

제임스 스톡데일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미 해군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했습니다. 1965년에 포로가 되어서 1973년에 풀려날 때까지 그 악명 높은 하노이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 포로수용소는 사람들이 끌려 들어가기는 하는데 살아서 나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굉장히 악명 높은 곳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지만, 그가 결국 살아서 나오자 많은 언론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토록 험하고 악명 높은 곳에서 살아남았습니까?" 그는 그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수용소에서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희망 그 자체로 그쳤습니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한동안 낙심하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내년 부활절이 되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내년 부활절이 되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다음 크리스마스도, 그다음 부활절도. 그렇게 몇 번만 반복하면 가지고 있었던 희망과 삶의 의지는 꺾이게 되고, 작은 일에도 충격을 받아서 그만 삶을 포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두 가지를 함께 붙잡았습니다. 하나는 언젠가는 집에 돌아갈 것이다 하는 낙관적인 희망,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처절하고 절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 그래서 주는 밥이 정말 기대 이하로 힘들지만, 그러나 악을 쓰고 그 밥을 삼키고 먹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고, 강제 노역에 시달리지만 열심히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함께 붙잡고 이겨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두 가지를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고 불렀습니다. 스톡데일의 역설이라는 것입니다. 위로는 희망을 붙잡되 동시에 아래로는 현실을 놓지 않는 것, 두 가지를 함께 잡는 것을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부릅니다.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분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으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서 정신과 의사로 살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나치에 의해서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다카우 수용소에서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역시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은 가지고 있는데 처절한 현실은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그 희망이 독이 되어서 오히려 그들의 삶에 치명적인 독소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희망도 가지고 동시에 현실도 인정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살지만, 희망이 현실에 기초하지 않을 때 희망은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약처럼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희망에 취해서 현실을 도피하고 현실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깨어 있으라" 하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우리가 희망에 취해 있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정신 차리고 이 현실, 악한 현실을 살아가라 하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어디에 취해 있는지, 혹시 내가 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우리 자신을 살피고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먼저 28절과 2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무화과나무의 잎이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낍니다. 자연을 보면 여름이 왔구나, 가을이 오겠구나, 겨울이 다가왔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징조를 보고 시대를 분별하라 하는 뜻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인자가 문 앞에 온 줄 알라"고 말씀하셨는데, 본문에서 말하는 '이런 일'이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동시에 거짓 선지자가 일어나서 여러 선량한 사람을 미혹하는 일을 보거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마디로 종합해 보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실지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두 발을 이 땅에 딛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시대의 징조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나와 우리 가정과 일터를 둘러싼 환경들은 얼마나 급변하고 있는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희망에 도취되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경고의 말씀이자 사랑이 가득한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1-1. 역사의 교훈

역사를 보아도 이런 일이 반복되고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중세 시대를 보면 중세 교회의 권위가 하늘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교황이 세속 군주나 황제를 임명할 때도 있었습니다. 가톨릭의 권위와 교회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굉장히 높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세 가톨릭 교회가 망해 버렸습니다. 왜 망했을까요? 이것 때문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세월은 격변하고 있고 시대는 변해 가고 있는데, 이 시대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중세 교회가 망해 버린 것입니다.

13세기에 중세 교회는 십자군 원정을 계획했습니다. 성지가 이슬람에 의해서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명분이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성지,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던 성지가 적군인 이슬람 군대에 의해서 짓밟히고 빼앗겼다. 우리가 군대를 모아서 가서 탈환해 오자. 그러면서 군사들을 모았습니다. 돈 있는 사람들이 군대를 보낼 수 있도록 돈을 모았습니다. 모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황금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슬람 군대가 가지고 있던 온갖 보물, 그 보물에 그들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금은보화를 탈취해 오자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에서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신의 권위로 가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지를 탈환하러 가는데, 어떻게 우리가 지고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부터 그들의 마음속에는 의심과 불안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교황을 비롯한 교회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 권위, 옛날의 권위를 그대로 고수해 나갑니다. 시대는 변하고 있고 사람들은 변하고 있는데, 여전히 그들은 이전의 구습에 얽매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440년에 금속활자가 발명됩니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습니다. 이것이 주는 의미는 획기적이었습니다. 성경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성경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손으로 필사해서 한 권을 가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을 인쇄기로 대량으로 찍어 냅니다.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됩니다. 독일어로, 프랑스어로, 영어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국의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니 지금까지 우리가 교회에 속고 있었구나, 교황에게 속고 있었구나 하고 사람들은 비로소 성경을 읽고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변함이 없습니다.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서.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지 못하고 여전히 똑같은 패턴을 반복했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중세 가톨릭 교회는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망해 버렸습니다.

1-2. 오늘 우리의 과제

오늘의 시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대의 징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당면한 시대의 징조는 바로 급격한 환경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이전과 이후로 급격하게 달라진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이전과 다른 삶의 방향과 결과들이 도출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어떤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고 여기에 발맞추어 변화되어 가야 하겠습니까? 저는 교회학교 교육에 관심이 굉장히 많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잘 양육시키고 교육해서 이 나라의 미래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기둥 같은 일꾼으로 세워 가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는 많은 변화가 닥쳐왔습니다. 여름성경학교나 여름 수련회 같은 외부 행사들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모여서 며칠 동안 행사를 가지기가 쉽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징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속 깊이 들여다보면 지금까지 여름 행사, 여름 수련회는 이벤트에 가까운 것이 컸습니다. 학생들을 며칠 동안 모아 놓고 여러 놀이들을 진행합니다. 함께 대규모의 집단 행사를 진행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지금까지가 이벤트와 행사 위주였다면, 이제는 지속 가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제대로 양육하고 길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는 교회에 불러서 학생들을 양육했다면, 이제는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는 핵심이 바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 가정의 중심이 되는 부모를 제대로 양육하고 가르쳐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이어가도록 교회의 패러다임과 방향이 바뀌어 나가야 됩니다. 그런 시대의 변화와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20년 뒤, 30년 뒤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깨어 있으라" 하신 말씀은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교회 재정의 사용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헌금되는 모든 재정의 대부분을 교회 안을 위해서만 사용했습니다. 교회 안의 여러 행사와 진행하는 것들, 교회 건물을 수리하고 보수하는 일들. 그런데 어려운 시대가 오면서 교회 안팎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실직했는데 재취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는데 어떻게 일자리를 찾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교회는 그 재정 사용을 소외되고 병들고 어렵고 기초적인 생활을 못 하는 분들을 위해서 재정을 투여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시대의 징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요구하고 계신데, 교회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여러 방향으로 발맞춰 옷을 재빨리 갈아입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회만 그렇습니까? 우리 가정도, 나의 신앙생활의 패턴도, 우리가 일터에서 일하는 것도, 이 나라가 새롭게 방향을 잡고 나아가야 될 것도 시대의 징조에 민감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대의 징조에 발맞추어 변화하라.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라는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우리 주변을 둘러싼 여러 환경의 변화에 둔감하게 반응하지 마시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말씀에 깨어 있으라

두 번째 말씀입니다. 32절과 3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종말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종말의 때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십니다.

종말은 두 가지 의미의 종말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종말입니다. 내가 언제 하나님 앞에 부름받을지, 지금 우리가 건강한 육신으로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리고 있으나, 다음 주에 똑같이 이 자리에 하나님 앞에 앉아 있다고 누가 과연 보장하겠습니까? 개인의 종말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역사의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호령 소리와 나팔 소리로 공중에 구름 타고 나타나시는 그날, 그 날과 그 시는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역사의 종말, 이 땅의 마지막에 오는 그때는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오늘 이 말씀에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언제 내가 부름받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도 남아 있는 내 자리를, 내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믿음의 백성들이 뒷정리를 할 때, "깨끗하게 사셨군요. 티끌 찾지 않고 이렇게 담백하게 살다 가셨군요" 할 정도로 우리는 항상 깨어서 우리의 뒷모습을 정리하고 깨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텐데, 그 자리에서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할 정도로 살아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저는 하나님 만난 이후로, 구원받은 이후로 하나님 말씀 붙들고 분투하며 살았습니다. 모자란 것들 있고 때로는 넘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주님 말씀 지키며 살려고 애쓰며 지내왔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앞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2-1. 죄가 아닌 말씀에

사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깨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죄의 유혹이 우리를 충동질합니다. 마음속에 항상 죄가 우리를 분탕질합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내 마음속에 있는 육체의 욕망이 나를 이끌어 세웁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깨어 있습니다. 죄가 나를 끌고 가려 할 때 끌려갑니다. 죄가 나를 일으켜 세울 때 일어나서 따라갑니다. 그렇게 깨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다 내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하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데,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는 존재인가? 말씀에는 깨어 있지 않고 죄에 대하여 깨어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죄가 말하면 즉시 반응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반복해서 말씀하면 죽은 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생각을 막고 듣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은 제대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깨어 있으십니까? 말씀에 깨어 있는 자인가, 그렇지 않으면 죄의 유혹에 깨어 있는 자인가? 바울은 로마서 6장 2절과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은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2-2. 세례의 의미

예수님 시절의 세례는 흐르는 강물에 들어가서 받았습니다. 세례를 베푸는 자가 세례받는 자의 머리를 붙잡고 강물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건져 올립니다. 강에 들어간다는 것은 흐르는 강물에 나의 모든 옛 자아를 떠나보냅니다. 강에 들어가서 오래 있으면 죽는 것처럼, 나의 옛 자아, 죄악된 자아는 이제는 강에 흘려보내고 죽었습니다. 건져 올린 나는 이제는 새로운 자아가 되어서 믿음으로 새롭게 살겠습니다 하는 결단이 바로 세례입니다.

우리는 세례받은 존재들 아닙니까? 육체의 세례를 받았든 영의 세례를 받았든 하나님을 만난 존재라면, 적어도 말씀에 대해서 깨어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이 악한 세상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의 권세가 우리를 유혹하고 충동질하고 이끌어 세운다 할지라도 일절 반응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만 깨어 있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청지기의 정체성을 기억하라

세 번째 말씀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고 주인이 부탁하셨습니다. 문지기는 바로 청지기를 말합니다. 문지기가 깨어 있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문지기가, 청지기가 자기 정체성, 자기 직분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청지기가 자기 정체성을 기억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 버렸기 때문에,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주인이 맡긴 직무와 주인의 재산을 마치 제 것처럼 사용합니다. 함부로 사용합니다. 정체성을 망각하고 깨어 있지 못하면, 그러다가 주인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어떻게 될까요? 경을 칠 것입니다. 혼날 것입니다. 내쫓아 버릴 것입니다. 법적인 책임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심각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청지기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나는 청지기다. 나는 주인의 일을 부여받은 심부름꾼이다." 이것을 기억하고 깨어 있으라 하는 뜻입니다.

국회의원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국민의 종복입니다. 국민들에게서 표를 받아서 임기 동안 권한을 위임받아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국민의 종복이라는 이 정체성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려고 하거나 국민의 요구와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면, 다음 선거에서 심판받을 것입니다. 국민들이 달아준 금배지를 국민들의 손으로 다시 떼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붙들고 간직하는 것이 그 자리를 지키고 유지하는 지름길입니다.

3-1. 모든 것은 맡겨진 것

목회자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인 저에게 교회를 위임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을 잠시 잠깐 위임받아서 목회하고 있는 것이 목사인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 종 되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런 청지기 의식을 제대로 붙들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마치 제 것인 양, 마치 자기 것인 양 함부로 행하고 함부로 대하고 자기 멋대로 이끌고 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잣대로 보시다가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교회, 나라, 건강, 물질, 우리에게 맡겨준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주인이 요구하시면 주인께 내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재능을 주셨는데, 하나님이 "너 그 재능 나를 위해서 좀 쓰자" 하면, 당연히 "하나님 쓰십시오" 하고 내어 드려야 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고, 물질도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이 땅에 올 때 적신으로 왔습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와서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모든 것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청지기 의식을 분명히 기억하고 살아가야 우리 인생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3-2. 사명의 발견

「침묵」이라는 소설을 쓴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는 또 하나의 위대한 소설을 썼습니다. 그 소설은 「내가 버린 여자」라는 제목의 소설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난 이후, 제2차 대전 이후입니다.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도덕성은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대학생 요시오카라는 남자가 있는데, 이 사람은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돈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패망했는데도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대학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여성을 만납니다. 비누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미쓰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여인과 함께 지내다가 그는 훌쩍 떠나 버렸습니다. 여인은 버림받았습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고 나를 육체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는 좌절감에, 그녀는 술집을 전전하며 밑바닥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치명적인 선고를 받습니다. 한센병 선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병원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오랫동안 그 수용소에서 지내다가, 세월이 지나서 다시 재검을 받습니다. 오진이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수용소를 떠나왔습니다. 다시 재활의 의지를 가지고 삶을 긍정하며 살아 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자신의 뇌리 속에 그 옛날 과거의 수용소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어린아이, 노인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인들이 한센병으로 손가락 마디가 끊어져 나가도 고통을 받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그들의 그 불쌍한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자기 발로 다시 그 병원과 수용소를 찾아갑니다. "내가 이제 드디어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는데, 이 건강을 가지고 이분들과 함께 살기며 평생을 살겠습니다." 사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돌아와서 함께 일했다는 이야기가 그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건강과 일터와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는데, 그제서야 그들은 삶의 의미를 찾고 인간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 말씀하시는데, 이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깨어 있고 어떤 사람은 깨지 않아도 되고 하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죄와 악을 떠나고, 말씀에 깨어 있고, 사명에 깨고, 청지기로서 깨어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3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깨어 있으라", 이 말은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희망에 취해서 이 땅의 현실을 부정하지 마시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붙들고, 나는 어디에서 깨어 있어야 하는 존재인지, 혹시 내가 깨지 못하고 눈감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나를 돌아보시고, 깨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믿음의 백성으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희망이라는 것에 취해서 현실을 부정하고 눈감고 살아왔던 세월을 회개합니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고 하시는 말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고, 말씀에 대하여 깨어 있으라는 이 말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기억하고,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 이 말씀을 깨닫습니다. 주님, 우리가 잠들어 있던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게 하여 주시고, 깨어진 영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백성, 능력의 백성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