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강 / 유다를 기다리다 (14:17-26)

유다를 기다리다 (막 14:17-26)

1. 용서와 화해의 사람

넬슨 만델라는 1918년에 태어났습니다. 이 분이 태어났던 곳은 남아프리카공화국입니다. 이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수의 흑인이 소수의 백인에 의해서 짓밟히고 굴욕당하고 어렵고 힘든 인생을 살아간다는 운명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만델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법학을 공부합니다. 그의 바람대로 법학을 공부한 이후에 흑인 최초로 남아공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에 법률 사무실을 세웁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법적인 조치를 취해 줍니다. ANC 즉 아프리카민족회의를 중심으로 인권 활동도 계속해 나갑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활동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1962년에 여러 가지 죄목으로 투옥당합니다. 그리고 2년 뒤 1964년에 로벤 섬 감옥에 이감되어 갇힙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27년 6개월 동안 그는 자그마치 그렇게 길고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길고 긴 세월을 감옥에 있으면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자신이 출옥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1990년 그가 감옥 문을 나섭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만델라가 출옥하면 흑백 갈등이 더 심화되고 그가 감옥에서 27년 6개월 있었던 한풀이를 할 것이라고.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빗나가 버렸습니다. 그는 출옥한 이후에 극렬 주의자들을 찾아가서 설득합니다. 우리가 유혈 폭동을 일으키고 불을 지르고 돌 던지고 싸우는 것은 전혀 유익이 되지 않고 우리 조국을 위해서 하나도 덕이 되지 않는다. 서로 하나 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그래서 아파르트헤이트 즉 남아공의 흑인 차별주의를 철폐하는 데 앞장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994년에 약 65%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도, 나중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도, 그에게는 영예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만델라를 영예롭게 한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에 시작했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는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흑인들에게 재산상 신체상 위해를 가한 사람들, 그런 백인들이 찾아와서 스스로 용서를 구하면 사면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들을 조건 없이 사면해 주었습니다. 그에게 개인적인 빚을 진 사람들도 그는 용서해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서 27년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게 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면해 줍니다.

감옥에서 지내면서 그에게 온갖 고문으로 인권을 수탈했던 사람들, 그들도 찾아가서 용서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감옥에서 나왔는데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여전히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내가 감옥에서 나왔다면 용서하고 베푸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의 삶입니다." 명언 아닙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민족의 화합과 나라의 화합을 일구어 낸 사람이었습니다.

2. 용서받은 자의 삶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눌 주제는 용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용서는 신앙생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가 지은 죄 그대로 심판하셨다면 오늘 우리가 온전하고 건강하게 살아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 그대로 즉각적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셨다면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고 주님을 통해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존재들입니다.

문제는 용서받은 존재가 용서하는 존재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용서를 덧입었는데 과연 우리는 용서하는 존재로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용서하는 존재가 되라고 말씀하시고, 용서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통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유다를 기다리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하실 객실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식사 자리로 옮겨 가십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저물매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라고 했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중요한 것이 '열둘'이라는 숫자입니다. 왜 중요하냐면 예수님의 제자 전체가 12명입니다. 그런데 12명 안에는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인간의 속마음과 계획하는 것과 그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유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유다가 종교 권력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버린 것까지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유다를 데리고 식사 자리에 함께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인성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편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해야 소화가 잘 됩니다. 불편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면 체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불편한 사람과 함께 앉아 있으면 아무리 맛난 음식이라 하더라도 그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존재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과 똑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셔서 나를 배신하는 유다를 주님도 불편하셨을 텐데 그를 데리고 굳이 식사 자리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이 왜 유다를 마지막 만찬 자리까지 함께 데리고 가셨을까요?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돌아오라. 네가 끝까지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면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주님께서 돌이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유다를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3-1. 첫 번째 기회

주님은 식사 자리에서 유다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암시가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18절을 보시겠습니다.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유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다 알고 계시는구나.' 유다도 예수님과 3년을 동행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을 다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계획을 가지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예수님이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예수님이 하시는 이 암시적인 말씀을 듣고 난 후에 '정말 주님이 내 계획을 알고 계시는구나.'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방망이질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때 유다가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해야 했습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다 알고 계시는군요. 주님 제가 하지 못할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엎드려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모른 척합니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주변에 있는 다른 제자들이 더 야단입니다. 19절 보십시오.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부터 야고보, 안드레, 바돌로매, 시몬,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 "나는 아니지요?" 근심하며 묻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과연 유다도 "나는 아니지요?"라는 이 대열에 참여했을까요? 아니면 유다는 끝까지 가만히 있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생각하기를 유다도 "나는 아니지요?" 하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주님 앞에 그 말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사람의 속마음과 생각을 다 알고 계시지만 함께하는 다른 제자들, 동료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는 아니지요?" 라고 말하고 있는데 유다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당연히 의심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계획하고 공들여 왔던 것이 다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겉과 속이 다르게, 앞과 뒤가 다르게 주님 앞에 "나는 아니지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계획하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을 팔 것을 아시고 마음에 찔림을 주시는데, 그는 찔러 주시는 주님 앞에 회개치 않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 옆사람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다의 악한 점이고 그가 회개를 촉구하시는 예수님을 실망시키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유다를 욕합니다. 우리는 유다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사실 죄 짓고 돌아서는 우리의 모습이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유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 짓고 나면 내가 죄 짓기 전의 내 모습, 죄 짓는 현장에서의 나의 모습, 죄 짓고 나서도 죄를 은폐하는 나의 모습,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돌이켜 내가 지은 잘못을 내 옆사람이 알까 봐 그것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혹시 내가 이런 짓을 한 것을 이 사람이 알지 않을까? 전전긍긍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네 잘못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유다나 우리나 다 같은 죄인들이 아니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방법은 우리에게 찔림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하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병을 고치는 것, 방언하는 것, 예언하는 것, 이것이 없어서 저는 성령이 함께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성경 읽을 때, 말씀 들을 때 마음의 찔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하고 잘못된 곁길로 가면 내 신앙 양심에 찔림이 있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그렇게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다만 성령의 역사하심에 반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유다의 속마음을 찔러 주셨습니다. 너 잘못했다고, 지금이라도 돌이키고 회개하라고 찔러 주셨는데 유다는 성령의 찔림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그다음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죄 짓는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면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다시 선한 길로 돌아오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돌이키고 회개하겠습니다." 그렇게 돌아와야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 가운데 받아주실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여기서 다른 제자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제자들은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엄청난 말씀을 하셨지 않습니까? 여기에 나와 함께한 사람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선생님을 판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대체 우리 중에 누가 주님을 판다고 하는 말입니까?" 그렇게 나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태도가 "나는 아니지요?" "나는 아니지요?" 이래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은 공동체의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직분 맡은 자, 사명 맡은 자, 직분의 중책을 맡은 자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대로 힘써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해야 됩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은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나 유다의 행동을 방조한 나머지 제자들이나 모두가 동일선상에 있는 죄인들입니다.

3-2. 두 번째 기회

주님께서 유다를 회개시키기 위한 첫 번째 시도가 무산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더 강력한 말씀을 유다에게 하십니다. 21절을 보시겠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독설 아닙니까? 주님께서 이 독설에 가까운 말씀을 유다에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첫 번째 시도에서 유다가 침묵하고 회개하지 않으니까 더 강력한 말씀을 하심으로 유다가 돌아오고 회개하기를 바라는 주님의 간절한 염원과 의지가 이 말씀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은 유다의 회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오해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하는 말씀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예수님은 십자가 지고 돌아가실 분 아닌가? 유다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니 유다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건 궤변입니다. 틀린 말씀입니다.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 당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거대한 악의 축들이 있었습니다. 로마 권력, 로마 권력에 기생하는 헤롯 가문, 헤롯 가문에 기생하고 있는 유대 종교 권력자들, 이들이 세 가지 축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권력 지향적이고 두 번째는 물질을 좋아합니다. 헤롯 가문은 로마에 큰 돈을 주고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유대 종교 권력자들은 헤롯 가문에 돈을 주고 자기 종교 권력을 가졌습니다. 즉 권력에 대한 의지와 물질에 대한 욕망이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약에 유다가 가만히 있었다 하더라도 로마와 헤롯과 유대 종교 권력자들이 주님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또한 권력에 대한 의지와 물질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제자 공동체에 3년 동안 몸담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권력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주님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그날 나도 권력을 가지고, 내가 가진 그 권력으로 물질을 마음껏 가지고 싶었습니다. 유다는 그런 욕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유다가 가진 권력과 물질에 대한 욕망이 로마와 헤롯과 그리고 유대 종교 권력자의 생각과 딱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유다를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교회 공동체에서 입으로 "주여 주여" 부르짖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물질과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순간적으로 타락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마치 거대한 자력을 가진 큰 자석이 땅을 한번 훑고 지나가면 쇳붙이들은 전부 다 자석에 달라붙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로마와 헤롯과 유대 종교 권력자들의 거대한 자력이 땅을 한번 훑고 지나가는데 유다가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결탁해 버린 것입니다.

만약에 유다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와 함께 걸어갈 길을 결단하고 걸어갔다면 세상이 아무리 악하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들과 결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왜 하필 너냐? 내가 3년 동안 힘써서 양육하고 길렀던 내 제자가 왜 나를 팔려고 하느냐? 너 아니라도 나는 저 세상의 악한 권력에 의해서 십자가 지고 죽음의 길을 걸어갈 텐데 왜 하필 너란 말이냐? 주님은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은 마지막 식사 자리까지 유다를 위해서 설득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찔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의지와 권력과 물질에 대한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휩쓸려 갈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세상을 핑계 삼습니다. 환경을 핑계 삼습니다. 내가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악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동체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세속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사고방식은 유대 종교 권력자들, 헤롯과 로마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결국 두 번째 주님의 말씀도 지나갑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3-3. 세 번째 기회

이제 주님은 마지막 세 번째 시도로 유다를 설득하려고 시도하십니다. 22절에서 2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심에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성만찬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떡을 떼어서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을 먹어라" 하시고, 잔을 부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마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최초의 성만찬, 주님과 함께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성만찬을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만찬을 통해서 주님은 기대하셨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너에게 주노니 너는 이 자리에서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라. 주님은 유다를 위한 회개를 성만찬을 통해서 촉구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만찬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받고 은혜받고 그리고 돌아오고 회개할 것이지만, 하지만 유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말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살과 피를 받고 마실 뿐입니다. 성만찬을 대하고 있지만 회개하지 않는 유다, 그런 완악한 유다를 봅니다.

4. 짐펄과 개펄

이 유다를 보면서 우리는 그 옛날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씀을 떠올립니다. 에스겔 47장 10절과 11절입니다.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했을 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말씀과 은혜의 물입니다. 그 물이 졸졸졸 흘러와서 시냇가가 됩니다. 그 물은 사람들의 발목을 채웁니다. 조금 더 무릎을 채우고, 조금 더 허리, 조금 더 차서 사람들이 능히 헤엄쳐서 건너지 못할 강이 됩니다. 그런데 그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죽음이 생명이 됩니다. 바닷가에 들어갔더니 물고기가 살아납니다. 나무에 그 물이 닿았더니 나무가 소생하게 됩니다. 과일 나무가 열매를 아름답게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생수가 닿는 곳마다 죽어가는 모든 생명이 다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곳이 있습니다. 살아나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진펄과 개펄이라는 곳입니다. 사해 바다 주변에는 움푹움푹 파인 웅덩이 같은 곳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펄과 개펄입니다. 가끔씩 우기가 되면 비가 많이 내리면 사해 바닷물이 넘쳐납니다. 넘쳐난 바닷물이 움푹 파인 웅덩이에 가득 찹니다. 우기가 끝나고 햇빛이 내리쬐면 태양빛이 내리쬐면 물이 증발하고 소금기만 남습니다. 움푹 파인 그곳에 자꾸 소금이 내려앉습니다. 소금기가 있는 진펄과 개펄,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모든 생명이 다 소생하게 되고 물고기와 나무와 각종 과실수가 다 살아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펄과 개펄은 살아나지 못합니다.

바로 유다 같은 사람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을 받아 먹고 살아나는 사람들, 그 말씀의 은혜를 입고 모두가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마음속에 웅덩이가 움푹움푹 파인 유다 같은 사람들, 권력에 대한 의지와 물질에 대한 의지로 마음에 웅덩이가 파인 사람들, 그에게는 생명이 소생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은 내 마음에 파여 있는 진펄과 개펄을 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더 이상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소금기 담긴 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회개하여 내 마음을 가득 메우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다 은혜받고 모두가 다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유다 단 한 사람만 구원받지 못한다면 이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5. 용서받을 자격

용서도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용서가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유다를 기다렸습니다. 끝까지 유다를 위해서 마지막 만찬을 마련하시고 그에게 알아듣게 말씀하시고 더 강력하게 성령의 찔림으로 책망하시고 성만찬까지 베풀어 주셨지만, 그러나 유다는 그의 마음의 진펄과 개펄의 웅덩이를 메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불쌍한 사람, 불행한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유다와 제자들, 주님이 함께 발걸음을 옮깁니다. 26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고 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열세 생명이 함께 같은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주님은 감람 산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고 십자가의 길로 가는 길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죽음의 길이었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생명을 살려 가는 길입니다. 유다는 주님과 함께 그 뒤를 따릅니다. 하지만 실상은 죽음의 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 죽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유다 같은 자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용서하시는 사랑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용서해야 될 사람, 나는 도저히 이 사람을 용납할 수 없다는 사람, 그런 자들도 넓은 마음 열린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넉넉히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는 능력의 사람, 은혜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실 때 끝까지 진펄과 개펄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돌아오지 않는 미련한 백성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회를 주실 때 돌아와야,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그 찔림에 응답하고 엎드리고 회개하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생 길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진실하게 살기 원하나 항상 죄 짓고 넘어지는 인생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깨달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다시 한번 돌이키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실 때 돌이키는 지혜로운 백성,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토록 그 기회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 주실 때 돌아오는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엎드립니다. 주님처럼 유다를 기다리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그들을 기다리며,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그들을 품에 안고 기회를 주는 믿음의 백성, 화해의 중재자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