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막 14:27-31)
1. 소크라테스와 자기 인식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토론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앞에 서서 말을 하면, 청중들이 그 말에 동의를 구하기도 하고 동의를 표하기도 하면서 토론하는 문화가 굉장히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앞에 서서 말하는 사람들이 인기가 많았고, 수사학이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말재주 있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궤변을 일삼는 궤변론자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소위 말해서 소피스트 같은 사람들이 궤변론자들이었습니다. 소피스트 중에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사람이 제논입니다. 제논은 제논의 역설로 유명한데, 그가 남긴 역설 중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전사 중에 뛰어난 전사인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하면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거북이가 한참 앞서서 달리고 아킬레우스가 뒤에서 달린다는 전제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궤변이지만, 그는 나름대로 이렇게 논리를 세웁니다. 아킬레우스가 쏜살같이 달리는 동안 거북이도 느리지만 한 걸음 혹은 두 걸음을 걸어갈 것이고, 또 아킬레우스가 따라오는 동안 거북이도 그만큼 자기 나름대로 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렇게 옮기고 옮기면 절대로 그 거리를 좁힐 수는 있어도 따라잡을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궤변입니다. 시간과 거리와 속력에 간단한 수식만 넣어봐도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수학이나 과학이나 물리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그의 논리에 대항할 만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제논의 역설을 재미있게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여러 사람들을 혹세무민하고 마음을 빼앗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이 이렇게 말하는 자리에 들어가서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끝까지 듣고 있다가 소크라테스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소크라테스가 다 듣고 있다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남녀 간의 사랑만 사랑입니까? 동성 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까?" 그러면 대답을 해야겠지요. 소피스트가 말합니다. "동성 간의 사랑도 사랑입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또 묻습니다. "사랑의 보편적인 정의가 존재합니까? 아니면 개별적인 사랑의 정의만 존재합니까?" 이렇게 저렇게 계속 질문을 던지면 결국 마지막에 가면 두 부류만 남습니다.
어떤 소피스트는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또 어떤 소피스트는 마지막에 항복합니다. "결국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힘 있는 명제를 던집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명제는 이렇게 해서 나온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모른다는 전제 위에 지식의 집을 지어야 그 지식이 확고부동한 진리가 될 것이고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잘 모르는데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사실 그의 말이 옳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 문제들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잘 모르는데 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수많은 문제들이 마치 재앙처럼 연이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베드로를 만납니다. 베드로도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게 하십니다. 혹시 우리도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모르는 것은 없었는지, 그 때문에 믿음의 걸림돌이 된 적은 없었는지, 우리 자신을 오늘 이 말씀에 비추어서 깊이 살피고 돌아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베드로의 영적 상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돌이키시기 위해 세 번이나 노력하셨습니다. 식탁 자리에 초대하셨고, 암시도 주셨고, 강하게 말씀도 하셨고, 성만찬 자리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돌이키지 않습니다. 이제 주님의 기다림의 시간은 끝이 나고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감람산으로 길을 나섭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7절과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의 고난, 죽으심, 십자가, 부활, 그리고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베드로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 중에 마음에 딱 하나 걸린 것이 있었는데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이 그의 마음에 딱 부딪혔습니다. 왜 우리가 다 주님을 버린다고 말씀하실까? 베드로는 몹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목청을 높여서 대답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이 짧은 베드로의 말 속에서 그의 마음 상태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두 가지 정도의 심리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2-1. 영적 우월감
첫째는 영적 우월감입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여기 있는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팔아먹는다 하더라도 저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들보다 우월한 사람입니다. 제가 수제자 아닙니까? 제가 어딜 봐서 주님을 버린다는 말입니까? 그는 영적 우월감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2-2. 서운한 감정
두 번째로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주님에 대한 서운한 감정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버렸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배를 버렸습니다. 아버지도 버렸습니다. 가정도 버렸습니다.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삼 년 동안 제가 주님을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따라왔는지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너무 서운합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보니 베드로의 이 짧은 말 속에는 영적인 우월감과 서운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우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베드로는 두 번이나 놀라운 신앙고백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이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그를 마음껏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앞선 수제자의 자리에서 삼 년 동안 주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서는 우월감이 그에게 그렇게 작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공동체성을 훼손하는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나서기 좋아했던 베드로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에게는 서운한 감정도 있을 법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백을 하면 자기는 이백 이상을 했다고 주님께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감정은 베드로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우월감과 서운한 감정, 우리는 더 깊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감정의 찌꺼기들이 신앙 성장과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는 것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우월감과 열등감
먼저 우월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월감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감정은 열등감입니다.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반대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공통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우월감이나 열등감이나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조금 낫다고 여기면 우월감을 가지고, 조금 못하다고 여기면 열등감을 가집니다. 사람을 너무 의식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많이 의식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영적인 우월감을, 어떤 이는 영적인 열등감을 가집니다.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어떤 일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계속해서 교차하며 왕래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점도 물론 있습니다.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의 대체적인 특징은 내적 성찰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성찰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면 내가 어떤 죄인인지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데, 내가 계획하는 것, 생각하는 것, 바라고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제대로 알기 때문에 나는 다른 제자들과 차이가 하나도 없는 죄인임을 깨달을 텐데,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월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볼 때는 다른 제자들이 하찮게 보입니다. 말도 하지 못하고 주님께 신앙고백도 하지 못하고 항상 뒤에 처져 있고, 저런 자들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너나 할 것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성찰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영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셨던 말씀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각각 모든 사람들은 다 다양하고 각자의 재능과 각자의 특별한 능력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잘생겼고 저 사람은 많이 가지고 있고 저 사람은 집안도 좋고 재능도 많은데 나는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집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 같은 사람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모든 권한과 모든 능력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일개 목동 출신인 다윗에게 열등감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이 다윗을 칭찬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열등감은 자신을 파괴했고 공동체를 파괴했고 나라를 위태롭게 했습니다. 이것이 열등감의 무서운 점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보지 못하면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치료하는 방법은 어떤 방법입니까? 자기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면 됩니다. 자신을 보면 우월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하나님을 보면 열등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사울은 우월감과 열등감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감정 가운데 헤매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보고 자기 자신을 잘 살펴서 우월감도 열등감도 가지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주님 앞에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서운함과 공로주의
또한 두 번째 감정, 베드로가 표현한 두 번째 감정은 서운함입니다. 서운함의 뿌리를 깊이 깊이 내려가 보면 공로주의와 만납니다. 내가 어떻게 이랬는데,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섬겼는데. 교회 안에는 공로주의가 알게 모르게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삼십 년 사십 년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나를 몰라줄까? 우리 집안이 하나님을 위해서 삼 대째 사 대째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하나님,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나?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낙심하고 실족합니다. 공로주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섬긴 것에 대해 보답 받고 싶은 것이 바로 공로주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히 부모가 공들여 정성 다해 키운 자녀들에게 그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할 때 부모 마음속에는 공로주의가 싹트게 됩니다. 서운함의 싹이 틉니다. 부부 간의 관계도, 연인들 간의 관계도, 인간관계 모든 곳에 서운함의 근거는 내가 한 만큼 돌려받지 못했을 때, 그때 본전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세상에서는 열심히 일한 대가를 받아야 됩니다. 직장 생활이 그렇습니다. 열심히 일했으면 보답받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순간의 순종만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 순간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순종하고 살아가느냐, 지금 이 순간 내가 말씀 앞에 어떻게 엎드리느냐, 이것이 오늘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늠할 뿐입니다.
만약에 지난날의 공로로 보답받으려고 했다면 가장 억울한 사람이 모세일 것입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출애굽의 영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백삼십 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그가 들어올리고 있었던 지팡이 끝에서 얼마나 많은 능력이 행해졌습니까? 그는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 생활을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사십 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 한 가지를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위해 반석에 대해 명령해서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백성들을 향하여 소리를 높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물을 내랴!" 그들에게 화를 내고 진노를 퍼부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백성들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으니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만약에 그의 지난날의 공로를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인정하셨더라면 그는 일등으로 일 번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 과거의 공로는 다 흘려보내고 지금 너와 나의 관계가 어떠하냐 이것을 묻는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삼 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섬기고 헌신한 것은 그때 일이고,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원리를 꼭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이 말씀을 과거의 내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읽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맞는 말씀입니다. 또한 동시에 이전 것은 지나갔다는 말씀 속에 이전에 내가 주님 앞에 했던 모든 공로도 다 옛것으로 지나갔다는 말씀입니다.
이전 것을 기억하지 말라, 오늘 이 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존재로 주님 앞에 늘 새롭게 살고 있는지, 이것만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살아왔던 것이 우리 믿음의 미래를 담보하지 못합니다. 매일매일 새로워지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피조물로 믿음생활 감당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말씀과 기도의 역할
예수님이 보실 때 베드로는 자기 마음속에 우월감과 서운함과 공로주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님이 좀 더 강하게 말씀하시지 않으면 이것을 깨뜨리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많이 읽어 와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특정한 시점이나 장소나 횟수를 말씀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여기 이 말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님이 이렇게 명백하게 명확하게 "오늘 이 밤"이라고, 횟수까지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명확하게 알라고, 너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사람이다. 영적 우월감을 가져야 될 존재가 아니라, 나에 대해서 서운함을 표하고 공로주의를 나타낼 존재가 아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어떻게 할까요? 주님, 저는 주님을 부인할 생각이 없는데, 주님 어떻게 할까요? 주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최악의 상황을 피할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목소리가 더 높아집니다. 힘 있게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그들도 다 따라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를 보면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생활은 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기로 하는 것도 아니고, 강한 인간성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이 아닌 오기로, 악으로, 강한 인간성으로 주님 앞에 자신을 입증해 보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는 일, 이렇게 두꺼운 성경을 읽고 통독하는 일, 수십 년 동안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일, 급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교회에서 성실하게 잘 섬기는 일, 이것이 인간성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 한번 해보자"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 되는 일입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하셔서 내 마음이 열리고 은혜가 부어져야 믿음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악으로, 오기로, 강한 인간성으로 믿음생활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령이 일하시는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성령이 함께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오늘 이 밤"이라고,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고, "세 번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이 부어지면 동시에 반응해야 되는 것은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동전의 양면 같아서 하나의 세트로 움직입니다. 기도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 없는 기도회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함께 묶인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을 주셨을 때 그는 이 말씀을 붙잡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됐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답을 알려 주십시오. 제가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답을 알려 주시면 제가 그 길을 찾아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씀이라고 스쳐 지나가 버립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래서는 성령께서 일하실 수 없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나와 상관없는 말씀으로 들으면 곤란합니다.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말씀에 반응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강한 인간성이 허물어집니다. 우월감도 서운함도 허물어지고, 그 허물어진 자리에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믿음의 집을 지어갈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베드로에게는 필요했는데 그는 끝까지 기도하기를 거부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실패한 이유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정말 모른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 속에 영적인 우월감이나, 혹은 열등감이나, 혹은 공로주의가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어서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강하게 막아서고 있는 것이 있다면 부디 말씀 듣고 기도함으로 녹여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허물어지고 다시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믿음의 터전을 굳게 세워 가실 것입니다. 그 터전 위에 아름다운 신앙의 여정을 주님과 함께 항해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