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어 기도하라 (막 14:32-42)
지난날 한 명의 미국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전직 미국 대통령들이 일제히 조의를 표했습니다. 이분은 윌슨 루즈벨트 저먼이라는 분입니다. 그는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분은 50년 동안 백악관에서 집사로 일한 분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에 백악관 청소부로 들어갔다가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여사의 추천으로 백악관 집사가 됩니다. 그때부터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열한 분의 미국 대통령을 모셨습니다. 그는 1997년도에 잠시 백악관을 떠났지만 다시 2003년에 부름을 받고 2012년까지 봉직했습니다.
그가 2012년에 완전히 은퇴할 때 오바마 대통령은 그를 기념하고 그를 높이면서 지금까지 그가 모셨던 열한 분의 미국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와 기념주화를 선물했습니다. 그만큼 모든 대통령들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또 그와 함께했던 대통령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는 결코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을 잘 섬기고 대통령의 가족들을 성심껏 돌보았습니다. 섬겨야 할 분을 섬기고 돌봐야 할 사람을 잘 돌본 것입니다. 대통령이 민주당원이건 공화당원이건 그것은 그분에게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인격적이고 인간적인 깊은 유대 관계 속에서 섬기고 돌보는 일을 50년 이상이나 성심껏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분은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대통령과 소통하고 가족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직업윤리를 만들어 갔습니다. 저는 이분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도 30년, 40년 혹은 그 이상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 가운데 놓여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믿음 생활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소통의 도구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깨달아 알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오랜 세월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관계에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은혜 받을 말씀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기도의 모범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생활을 살피고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감람산으로 가시는 길에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나를 떠나고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펄쩍 뜁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정확한 시간과 횟수까지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극구 부인합니다. 주님은 그대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하십니다.
1. 중보기도의 부탁
겟세마네 동산, 그곳은 주님께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던 곳이었습니다. 겟세마네(Γεθσημανῆ)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감람나무 열매의 기름을 짜는 곳, 그곳에서 주님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가지셨습니다. 제자들을 그곳에 두시고 항상 그러셨듯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데리고 가셨던 세 명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주님은 더 깊은 곳에 기도하러 들어가셨습니다. 오늘 말씀 33절, 34절을 보시겠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그냥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여기서 깨어 있으며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중보기도의 부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셨던 더 놀라운 말씀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제자들에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신 것은 우리에게 굉장한 의구심을 자아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주님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할 만큼의 영적인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영적 상태가 밑바닥 아닙니까? 엉망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통해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누가 크냐고 더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중보기도할 만한 능력이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의 무엇을 보고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계신 것일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왜 이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시는 것일까요? 사실 오늘 우리가 지금 심히 답답한 이 마음,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심정을 가지고 누구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할까 하고 주변을 살피고 돌아보면 딱히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기도 부탁할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지금 영적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안 되고, 저 사람은 나보다 믿음이 좋은 줄 알았는데 과거에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안 되고, 저 사람은 비밀 보장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안 되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중보기도를 부탁할 사람을 만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기도를 부탁하신 대상을 보면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3년을 동행하고 함께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에 대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들은 지금은 연약하지만 주님께서 막중한 중보기도의 사명을 맡겨 주시면 그것이 나중에 성령 받고 난 이후에 나도 그런 존재가 되어서 중보기도를 부탁해야 되겠다는 깊은 교훈이 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이렇게 중보기도를 부탁하신 것에 미루어 보고 비추어 보면, 우리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지금 내 마음 상태가, 심리 상태가 이렇습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나도 물론 기도하지만 나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 있으면 저는 훨씬 더 하나님 앞에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기도 부탁하셔야 됩니다. 특별히 부모들이 볼 때 자녀를 보면 지금도 연약하고 믿음이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녀들이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이 훗날 시간이 지나서 부모가 내가 믿음이 어릴 때도 나에게 기도 부탁을 하셨구나 하는 것이 그들의 인생의 귀한 교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자녀가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할수록 부모와 함께 나누었던 기도의 제목, 중보기도의 제목은 그들의 믿음과 인격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모자라고 연약한 제자들에게조차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하면서 중보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우리도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우리 마음을 터놓고 기도 부탁하실 수 있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솔직한 기도
또한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이렇게 중보기도를 부탁하신 이후에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아룁니다. 35절, 36절을 보십시오.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려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바(Αββᾶ)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을 보면 과연 이 기도가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가 맞나 할 정도로 솔직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이 잔이 나에게서 옮겨지기를, 이때가 속히 나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고난받을 것을 모르고 오셨습니까? 알고 오셨지 않습니까? 고난받으실 것도, 십자가 지실 것도, 심지어 죽임당할 것도, 무덤 속에 삼 일 계실 것도, 부활하실 것도 다 알고 오셨는데 왜 이 잔이 지나가기를, 이때가 속히 지나가기를 구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우리 주님은 그대로 갖고 계셨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비참한 죽음,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계신 주님이 불안하고 두려웠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은 기도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할 때 미사여구를 사용합니다.
나를 자꾸만 포장하려고 합니다. 가리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내 마음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처럼,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를 바라셨던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됩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2-1. 다윗의 솔직한 기도
이런 기도는 비단 우리 주님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왕 중의 왕이라고 하는 다윗도 자신의 있는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표현했습니다. 시편 55편 13절부터 15절까지 말씀입니다.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שְׁאוֹל)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
다윗의 일생을 보면 배신당한 일생이라고 할 만큼 그의 일생이 고단했습니다. 그는 군대 장관으로 일했는데 그가 섬겼던 사울에게 배신당하고 함께했던 부하들에게 배신당했습니다. 십수 년을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전전합니다. 인생 말년에는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당합니다. 그를 평생토록 섬겼던 신하들이 그의 등에 칼을 꽂습니다. 그는 다시 광야로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광야로 쫓겨나서 배신감에 치를 떱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배반할 수 있는가?
그 배신감에 몸서리치며 이 시편을 지었습니다. 그는 나의 동료요 친우로다, 나와 함께 재미있게 떠들며 하나님의 집 안을 다녔도다, 함께 예배드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다윗은 배신당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스올이 지옥 아닙니까? 저들이 살아 있는 채로 하나님께서 지옥에 던져 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 성군 다윗,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다윗이 어떻게 배신자라고 해서 그들을 산 채로 지옥불에 던져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 기도를 들으면서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이만큼 다윗은 자신의 있는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원수 시편입니다. 한두 편이 아닙니다. 다윗이 지은 73편의 시 중에 수십 편의 시가 원수 시편입니다. 원수를 하나님께서 짓밟아 달라고 기도하는 이 솔직한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칼을 들고 원수를 향하여 달려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신 원수 갚아 달라고 하나님께 자신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도란 우리 마음에 있는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 때로는 분노와 원망, 사람을 향한 분노까지 하나님께 고스란히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감추지 않고 포장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가 참된 기도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3. 반복되는 기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버지께 기도했는데 이 기도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두 번, 세 번 똑같은 기도를 계속해서 드립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1절도 보십시오. "세 번째 오사." 주님은 똑같은 기도를 두 번 그리고 세 번 반복해서 드렸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해야 될 만큼 자신이 십자가 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단 한 번의 기도로 하나님께 응답받으려 했던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 번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조차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기 위해서 똑같은 기도를 세 번씩이나 드렸지 않습니까? 더 깊게, 더 폭넓게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간구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낱낱이 토로하고 아뢰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3-1. 침묵하시는 하나님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이렇게 세 번이나 기도하시는데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통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아들은 이렇게 간절하게 구하는데 왜 하나님은 한 번도 반응하지 않으실까요?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확고부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이 십자가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백한 뜻입니다. 이 뜻은 변치 않습니다. 아들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침묵으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말씀하지 않으심으로 네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네가 십자가 져야 한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느냐 하고 하나님은 그대로 보여 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3-2. 기도는 내가 바뀌는 것
다만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뜻을 순종시켜서 일치시켜 나가는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도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대로 있고 하나님을 움직여서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기도, 고집부리고 하나님께 목소리 높여서 하나님 반드시 해 달라고 떼쓰는 기도, 이것이 기도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내가 변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 지는 것임을 알고 계셨고, 첫 번째 기도를 통해서 변하지 않자 두 번째로, 세 번째로 자신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합치시켜 나가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데 두 가지 장벽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장벽, 그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 뜻에 맞추든지 그렇지 않든지 할 것 아닙니까?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내 자아와 욕심을 내려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았는데 내 뜻을 변하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평행선을 달릴 뿐입니다.
4. 하나님과 동행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가끔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뜻을 알게 해 주시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갑자기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지각과 분별력이 갑자기 생겨나지 않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오랫동안 동행해야 됩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년의 공생애 기간을 보내면서 하나님과 함께 매일같이 동행하셨습니다. 새벽 아직 밝기도 전에 미명에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분주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만나도 주님은 매일 해가 밝기 전에 하나님과 교제하셨습니다. 이런 영적인 교통과 동행함이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방법입니다.
4-1. 에녹과 노아의 동행
이뿐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똑같이 주님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습니다. 에녹이 그랬고 노아가 그랬습니다. 창세기 5장 23절, 24절과 창세기 6장 9절입니다.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에녹이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기에 하나님은 그를 땅에 두지 않으시고 하늘로 데려가셨습니다. 노아가 의인이라고 칭함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행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손잡고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손잡고 걷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죄를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 지은 이와 손잡고 동행하지 않습니다.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죄 짓고 나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몹시 부담스럽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에 그들이 한 일을 보십시오.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에 하나님이 그들과 산책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아담과 하와가 미리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 숨어 버렸습니다. 죄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 지은 자가 불행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동행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뜻을 알고 기도하기 위한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죄 짓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4-2. 자아와 욕심을 내려놓음
이제 또 하나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그다음은 우리 자신의 자아와 욕심을 내려놓아야 됩니다. 자아와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면 기도하나 마나 한 것입니다. 자아와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여러 번 기도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첫 번째 기도해도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는 예수님의 마음이 변함이 없습니다. 괴롭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립니다. 다시 기도합니다. 두 번째 기도해도 잘 안 됩니다. 세 번째 기도하십니다. 세 번째 기도하시고 나서야 주님은 이제 결단하고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주님의 뜻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렇게 우리 자신이 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어 가기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의 투쟁을 해 가시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많이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 온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시절 속에서 위기가 속히 종식되기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다시 과거로 회복되기를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동안 열심을 다해서 기도해도 여전히 상황은 바뀌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상황은 더 어려워지고 험난해지고 힘겨워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을 바꾸어 봐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돌아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을 바꾸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바뀌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교회가 이러했다면 이제는 교회가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야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 내 인생이 이랬다면 내 삶이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이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해도 돌이켜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이제 우리는 기도의 방법과 내용을 바꾸어서, 하나님 그럼 도대체 교회가, 우리 자신이, 이 나라와 민족이 어떤 것이 바뀌어지기를 원하십니까, 알려 주시면 변화되고 바꾸어 나가겠습니다, 고통이 따른다 하더라도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하시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깨어 기도하라
우리 주님은 목숨을 걸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엎드려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간절하지 않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0절도 보십시오.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베드로가 호언장담했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린다 할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그런데 기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가 주님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했다면, 엎드려 기도하는 자가 되었다면, 자신의 무력감과 무능함과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자인지, 영적 우월감과 열등감, 공로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님을 위하여 중보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얻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얻은 특권을 발로 걷어차 버렸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잠들어 있었습니다.
5-1.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
우리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고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네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너의 영혼은 누가 돌본단 말이냐,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회개하지 못하고,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없고,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너의 완악한 자아를 내려놓을 수 없는데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깨어 기도해야 할 이유는 주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내 영혼을 위해서, 나의 남은 인생을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깨어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데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은 영원토록 무한정하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5-2. 기도의 때
41절을 보십시오.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이제 되었다, 자고 쉬라,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건강할 때, 정신이 맑을 때,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과 아직까지 믿지 않은 일가친척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건강한 때가 있습니다. 이제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하지 못하는 때가 속히 올 것입니다. 그때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때를 주실 때, 그때 이 시간과 때를 굳게 붙잡고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간절하게 엎드려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깨어 기도하시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