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과 몽치, 그리고 입맞춤 (막 14:43-52)
태조 이성계라고 하면 우리는 조선왕조를 창건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의 원래 시작은 고려 변방의 무인이었습니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이름 석 자를 알리기 시작했던 것은 위화도 회군 이후였습니다. 그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돌아왔을 때 그 당시 고려 왕실은 두 집단으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무능하고 부패하고 능력 없는 고려 왕실을 갈아엎고 이제는 새 나라를 건설하자 하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정도전, 이성계, 그리고 이방원 등이 중심이 된 하나의 그룹입니다. 또 다른 그룹도 있었는데, 고려 왕실이 무능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것은 맞으나 그러나 새 나라를 건설하는 것까지는 하지 않겠다, 이 안에서 다시 개혁하고 우리는 고려의 명맥을 이어가고 싶다 하는 사람들이 또 다른 무리였습니다. 정몽주 같은 사람이 그들의 중심이었습니다.
사실 정도전, 이성계, 이방원 입장에서는 무능하고 타락한 고려 왕실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불편했던 세력은 정몽주 같은 충신들이었습니다. 갖은 방법으로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그러나 돌이키지를 않습니다. 이제 더 이상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이방원이 그의 마음을 슬쩍 떠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여가를 던집니다. 하지만 정몽주의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몸이 죽어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단심가로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원은 정몽주의 진심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이 사람은 안 되겠구나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부하를 시켜서 선죽교에서 잔혹하게 살해해 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고대 사회에서, 그리고 수많은 역사를 통해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 궤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일은 항상 인간 사회에서는 늘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러면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어떨까요? 현대 사회에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과거의 방식으로는 제거하지 않습니다. 보다 더 교묘하고 보다 더 세련된 방식으로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정치적인 생명을 끊어 버립니다. 이런 일이 현대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실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다수결의 원리를 말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저마다의 생각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다양성이야말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거대한 용광로 안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녹아지고 거대한 담론을 이루어서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집권자들 입장에서 볼 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계획한 것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저 사람만 제거해 버리면 나는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 당시의 정치 권력자들, 종교 권력자들도 예수님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제거해야 될 대상으로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 검과 몽치를 든 사람, 또 한편 배반의 입맞춤을 한 사람들을 볼 것입니다. 말씀이 주어졌을 때 그 말씀에 반응하는 방식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이중적인 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도 살펴볼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귀한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검과 몽치를 든 자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되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도다." 그때 예수를 체포하려고 왔던 일단의 무리들이 바로 들이닥칩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몽치를 들고 왔습니다. 검은 곧 칼입니다. 그런데 몽치는 몽둥이입니다. 짧고 단단한 나무로 만든 몽둥이입니다. 도둑이나 강도를 잡을 때 쓰는 도구입니다. 그걸 가지고 예수를 잡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을 보낸 배후 세력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1-1.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그렇다면 유대 종교 권력자들은 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을까요? 그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던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그들과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의견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제거해야 하는가,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없애고 봐야 하는가? 생각이 달라도 제거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없앨 필요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이 다른데 잠자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어떤 해도 당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과 내가 생각이 다른데 나는 마음의 생각만 품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거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영향력이 있었고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민중들에게 선포됩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잠들어 있던 영혼들을 일깨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예수님을 통해서 듣고 보니 지금까지 그들이 속아 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수탈당하고 빼앗기고 항상 뒤에서 뼈마디가 닳도록 고생해야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나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 나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행복을 누리고 이 땅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 악한 종교 권력자들이 성경을 호도하고 성경을 잘못 가르쳐서 그들의 주머니에 돈을 채우기 위해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까막눈인 우리들에게 말씀을 잘못 가르쳤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분노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술렁거립니다. 이전 같은 종교 권력자들의 권위가 이제는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종교 권력자들은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더 이상 두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방치했다가는 이제는 모든 백성들이 자기들에게 등을 돌릴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가만있어도 돈을 갖다 바쳤고, 가만있어도 그대로 위에 군림할 수 있었고, 대대 자손 만대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는데, 저 예수를 가만히 두면 그런 일이 불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1-2. 마음에 일어난 갈등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속에 어떤 감동도 없었을까요?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던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 또 탈무드(Talmud), 미드라쉬(Midrash) 등으로 그들의 마음의 양식을 삼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순전하고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들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되살아납니다. 갈등이 일어납니다. "아, 그랬지. 하나님 말씀이, 이것이 진리이지." 그런데 지금 그들은 마음에 일어나는 갈등을 다룰 생각이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생각과 하고 있는 행동이 여기 있는데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부딪힙니다. 갈등이 일어납니다. 갈등 앓는 것이 너무 싫고 귀찮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2. 참된 은혜의 의미
여러분들은 "은혜 받았다"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설교를 듣고 나서, 성경을 읽고 나서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진짜 은혜 받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수많은 사람들은 내 생각과 똑같은 설교를 들을 때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내 생각과 똑같은 성경 구절을 찾아 읽을 때 밑줄도 치고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내 생각과 똑같이 설교하시고, 내 생각과 틀림없는 말씀이 있습니까?" 놀라워합니다. 그걸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짜 은혜는 마음의 갈등이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여기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반대 대척점에 있어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킵니다. 내 생각대로 그냥 가다가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갈등을 일으켜서 내가 말씀대로 결단하고 주님 따라갑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 마음에 갈등을 일으킵니다. 갈등이 일어나야 말씀의 능력이 발휘됩니다. 마음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증거가 바로 갈등입니다. 그런데 유대의 종교 권력자들은 자신들 마음에 피어나는 작은 불씨가 일으키는 갈등을 소홀히 다룹니다. 그게 너무 싫어서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가 되는 예수님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2-1. 에덴동산의 교훈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지위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최고 권력자들이었습니다. 동식물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 그들이 최고의 권위를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한 가지 금지된 것이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한가운데 선악과를 세우시고 절대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볼 때마다 불편합니다. 갈등이 일어납니다. 먹고 싶습니다.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고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 바로 말씀입니다. 선악과는 곧 말씀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만 제거하면 에덴동산 전체가 자기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것만 내가 따 먹어 버리면, 저걸 내가 정복하지 못해서 여기에 진정한 왕이 되지 못하고 주인이 되지 못하는구나." 먹고 싶었습니다. 저걸 제거해 버리면 진정한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제거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에덴동산의 진정한 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요, 착각이었습니다. 쫓겨났습니다. 빈털터리로 쫓겨났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마음껏 누리고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그들은 이마에 땀이 흐르고 수고해야 땅의 소산을 겨우 얻어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행한 일이 그들의 인생을 덮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불어 닥친 불행입니다.
우리 인생에 말씀이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불편하게 할 때, 그걸 제거해 버리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됩니다.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 권력자들은 예수만 제거하면 그들에게는 자손 만대 부귀와 자손 만대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를 제거한 이후로 그들은 천하의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고 오는 모든 인류의 입에 오르내리는 악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천하의 악인의 자리에 낙인찍히게 된 것입니다.
2-2. 우상의 특징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왜 우상을 좋아할까요? 시편 115편 4절에서 8절까지가 우상에 대해서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에 대해서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없습니다. 우상은 은과 금으로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은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살아라, 잘 살아라, 부모를 공경하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말씀대로 순종하라, 엎드려 예배 드리라, 이런 요구를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얼마나 편합니까?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데, 어떤 말도 하지 않는데, 사랑하게 얼마나 편합니까? 성가시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귀찮게 하지도, 불편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갈등도 일어나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릅니다.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 두꺼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시마다 때마다 말씀하십니다. 뭔가 좀 해보려고 하면 이게 다 나쁜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생각해보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하나님 자녀는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왜 그렇게 많은 것인지, 하고 싶은데 누리고 싶은데 못하게 하십니다. 요구 사항도 많고 성가시고 불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제거해 버리면, 그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수고로움과 땀 흘림과 지옥의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2-3. 말씀 앞의 올바른 반응
그러면 우리는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 37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많이 찔렸습니다. 마음에 감동이 됩니다.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어찌할꼬?" 유대 종교 권력자들은 마음이 찔렸을 때 그 찔림이 불편하고 싫어서 예수를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마음이 찔렸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우리가 어찌하고 어떻게 해야 생명을 얻겠습니까?"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리면 그다음 행동해야 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됩니다. 물어봐야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셔서 제 마음이 요동칩니다. 갈등합니다. 이제 저에게 갈 길을 알려 주십시오. 방향을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행동하겠습니다." 그래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야 내 삶이 바뀌어 갑니다. 예수 믿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갈등을 주실 때 은혜가 주어진 줄 아시고, "내가 은혜 받고 있구나" 생각하시고 그 은혜의 물결을 쫓아가시기 바랍니다.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삶이 변화되고 내 인생이 변화되는 데까지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배반의 입맞춤
예수님에게 찾아온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는데, 또 한 사람은 배반의 입맞춤으로 주님께 다가옵니다. 44절에서 46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밤, 사람들의 얼굴도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서 온 자들이 미리 군호를 짜두었습니다. 유다가 예수께 다가갑니다. "랍비여" 하면서 사랑의 입맞춤을 예수님께 건넸습니다. 그런데 그 입맞춤은 배반의 입맞춤이었습니다. 예수를 확증하자마자 그들은 예수를 체포해서 가버렸습니다.
유다는 남들이 보기에는 선생님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처럼 사랑의 입맞춤을 건넸지만, 그러나 이면으로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버린 악한 사람, 배은망덕한 이중적인 인격이었습니다.
3-1. 우리 안의 이중성
우리는 유다를 욕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면 유다 못지않게 다중적인 인격이 우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는 더없이 좋은 얼굴로, 좋은 인격으로 사람을 대하지만, 그러나 예배당 문을 나서거나 혹은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안에는 각양각색의 탐심과 욕심과 정욕과 인간적인 다양한 얼굴들이 우리 몸속에, 우리의 영혼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불쑥불쑥 솟아 나와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이중 혹은 다중 인격으로 드러납니다.
믿음 생활의 여정이란 것은 겉과 속의 일치, 겉사람과 속사람의 일치, 우리의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일치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여러 세상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하면 곤란합니다. 한 가지 인격으로, 예수 믿는 사람의 인격으로, 주님 닮은 제자로 그 한 가지 얼굴만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교회든 바깥이든 가정이든 일터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인격과 그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3-2. 분별력의 근거
또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예수님은 유다가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당연히 그의 속마음까지 다 들여다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천사의 얼굴로,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사탄의 본모습을 알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그 내면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라서 알 수 없습니다.
유일한 한 가지 길은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의 자리에 제대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우리는 분간할 방법도 없고 그럴 실력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탄은 머리에 뿔을 달고 삼지창을 들고 꼬리를 펄럭이며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다가옵니다.
이단들은 우리에게 달콤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꼭 필요한 것을 채워주며 다가옵니다. 힘들 때 다가옵니다. 그러니 다가오는 그 모습을 우리가 어떻게 분별하겠습니까?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되어 있는 그들을 어떻게 그 껍질을 벗겨낼 수 있겠습니까?
에덴동산의 뱀이 하와를 찾아왔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교했다는 말은 지혜로웠다는 뜻입니다. 뱀과 하와는 친했습니다. 항상 둘이 함께 지냈습니다. 사람에게 말을 건넬 정도로 뱀은 지혜로웠습니다. 가까운 자를 통해서 사탄이 유혹하는 것입니다.
뱀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와는 말씀에 깊이 서 있지 않아서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랬는지, 저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셨는지 불완전한 성경 지식 가운데 말씀에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하와를 사탄은 끊임없이 공략합니다. 뱀의 혀를 통해서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말씀에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사탄이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흔들립니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미모의 들릴라가 그를 유혹합니다. 그가 들릴라에게 유혹 받았던 단 한 가지 이유는 사명의 자리를 지키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사사로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그가 서 있을 자리에 있어야만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유혹에 다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뿌리 내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를 제대로 지키면 우리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4. 세상의 방식으로 대응한 베드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 내리지도 못했고 사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47절을 보십시오.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곁에 서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 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0절을 보면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이 말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상에 물들어 그들이 가지고 온 칼과 몽치, 그리고 이중적인 권모술수에 그도 칼로 대응했습니다.
세상이 칼을 가지고 온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칼을 들고 대응하면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음모를 가지고 꾸미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더한 음모를 가지고 대응해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길 수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께 그것은 큰 죄가 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감당합니까? 세상이 돈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는 더 많은 돈으로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말씀과 사명에 뿌리 내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말씀이 피가 되고 살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말씀이 부어졌을 때 "주님,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초대교회의 백성들처럼 "우리가 어찌하오리까?" 엎드리지 않습니다. 무시했습니다. "주님, 저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무시했습니다.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사명도 주셨습니다. 기도하라고, "너희는 여기 깨어서 머물러 있으라.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 내가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여 죽게 되었으니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께 받은 사명, 기도의 사명도 감당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서지 못했지요. 기도하지 않았지요. 그러니 그가 붙잡아야 할 것은 칼밖에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칼, 그 칼이 능력이 있습니까? 결코 능력이 없습니다. 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칼로 예수님을 지키고 진리를 지키겠습니까?
주님은 칼을 들지 않습니다. 검과 몽치, 배반의 입맞춤에 대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담대해지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받고 기도의 사명을 지키고 주님은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4-1. 제자들의 결말
그들의 결말이 어떻습니까? 50절에서 5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그들은 호언장담했습니다. 호기롭게 떠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위시해서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어떤 한 제자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가다가 너무 급해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사탄 앞에 수치와 모욕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부어져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마음속을 소용돌이치게 하고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붙들고 진리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미혹 가운데 넘어가지 마시고, 그 넘어가지 않는 길은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고 기도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승리의 끝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귀한 역사를 경험하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갈등하게 하시고, 끊임없이 죄악의 길로 달려가려고 하는 우리를 멈추어 세우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은혜 받는다는 것이 내 마음에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가 참된 은혜를 받은 자로서 우리 자신을 고치며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진리 안에 거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세상처럼 검과 몽치로, 배반의 입맞춤의 술수로 그들을 대적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말씀 앞에 뿌리 박으며 사명의 자리를 기도로 지키며 이겨내는 믿음의 백성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올바른 영적 분별력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참된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며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