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강 / 예수를 멀찍이 따라가다 (14:53-65)

예수를 멀찍이 따라가다 (막 14:53-65)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맹자, 장자, 한비자 같은 사람들도 있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묵자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묵자에 대해서는 본명이 묵적이라는 것 이외에 특별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맹자나 장자나 한비자의 책에 묵자의 말과 사상이 아주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가 동시대 인물들과 활발한 사상 교류를 했고, 그의 사상이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묵자는 원래 양반 자제가 아니고 하층민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묵자를 하층민이라고 생각할까요? 그 당시 중국에는 묵씨 성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묵자는 어떻게 해서 묵씨 성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이에 대해서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가 워낙 바깥에서 열심히 일한 나머지 얼굴이 까맣게 타서 주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묵이라고 불렀다는 설입니다. 두 번째 설은 그 당시 중국에서는 어떤 죄를 지으면 얼굴에 먹으로 문신을 하는 형벌이 있었고, 그 형벌을 받은 사람이 노동형에 처해지는 벌이 있었는데, 아마 묵자가 그런 벌을 받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설은 공사장 현장에서 먹줄을 들고 다니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마 묵자가 먹줄을 들고 다니는 기술자가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중에 어떤 것이 사실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공통적으로 묵자는 노동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계층의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맹자 왈 공자 왈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고, 그는 학파를 형성했고 제자들을 두었습니다.

하루는 묵자의 제자가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정의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정의롭게 살 수 있습니까?" 어려운 질문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정의롭게 살 수 있는가, 잘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묵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집을 짓는다고 생각해 보자. 집을 지으려고 하면 어떤 사람은 정밀하게 측량을 해야 되고, 어떤 사람은 흙을 날라 와야 하고, 어떤 이는 벽돌을 구워야 하고, 또 어떤 이는 가져온 벽돌을 치밀하게 쌓아 올려야 한다. 그래야 단단한 집을 지을 수 있고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다.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맡은 일을 게을리 하거나 성실하게 감당하지 못하면 안전한 집, 좋은 집을 지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 자기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정의다."

굉장한 통찰입니다. 사실 묵자가 말한 정의는 국가로까지 옮겨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입니까?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까? 그 나라에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인도 있고 군인도 있고 법조인도 있고 근로자도 있고 여러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군인이 될 필요도, 정치인이 될 필요도, 모두가 법조인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법조인, 군인, 정치인, 일반 백성, 노인, 학생 할 것 없이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맡은 일을 감당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좋은 나라, 단단한 나라, 정의로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함부로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넘볼 수 없는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도 우리가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이런 일을 하라, 너는 이런 일을 하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란트에 맞는 사명과 일을 주셨습니다. 그 일을 우리가 성심으로 잘 감당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세워질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삶의 현장,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고, 우리는 혹시 그 자리를 벗어나 이탈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예수를 멀찍이 따라간 베드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신 후에 체포되셨습니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서 일단의 무리들이 검과 몽치를 가져왔습니다. 유다는 배반의 입맞춤으로 예수를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의 집 공관까지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야음을 틈타서 모두가 도망가 버렸습니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는 사로잡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만한 이유도, 그럴 가치도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도망가다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을까? 예수님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었을까? 먼 발치에서 예수를 끌고 가는 무리를 뒤따라가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 5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베드로는 나름대로 용기를 냈습니다. 두려워서 도망갔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가다가 가다가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갔습니다. 나름대로는 용기를 내어서, 큰 용기를 내서 들어간 것입니다.

1-1. 멀찍이 따라간다는 것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가 눈여겨 살펴봐야 할 어색한 본문은 '예수를 멀찍이 따라갔다'하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떨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따라다니고 동행하면서 지근거리에서 예수님을 보좌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베드로를 3년 동안 항상 데리고 다녔습니다. 중요한 자리, 꼭 필요한 자리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늘 데리고 다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친히 말씀을 들었고 주님과 함께 동행했습니다. 3년 동안 이렇게 다녔습니다. 한 번도 멀찍이 떨어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와 멀찍이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우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도 주님께 전할 수 없습니다. 서로 소통이 일어나지 않고 대화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항상 대화하고 주의 말씀 듣고, 나도 내 답답한 방을 주님께 아뢰었는데, 이제는 대화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중간에 장애물이 자꾸 들어옵니다. 사람이 지나다닙니다. 건물도 중간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의 표정을 읽으면서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알아차려야 되는데, 예수님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중간에 장애물이 있어서, 사람이 있어서, 그리고 건물이 있어서 베드로는 이렇게 주님과 멀찍이 떨어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1-2. 타락의 본래 의미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타락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타락을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것,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 이걸 타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타락과 죄는 그렇게 쉽게 지어지지 않습니다. 원래 타락의 본래 의미는 있던 자리를 이탈하는 것, 내가 마땅히 있어야 될 그 자리를 떠나는 것부터 타락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큰 비윤리적인 죄를 짓는 것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가 있어야 될 그 자리를 지키지 않고 떠나는 것에서부터 죄가 시작됩니다.

베드로의 원래 있어야 될 자리, 마땅한 자리는 예수님의 바로 옆자리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어떤 고난이 닥쳐도 주와 함께 다녀야 됐는데, 그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가면서 그는 이제 타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2. 포도나무 비유의 교훈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나와 함께 있으라고, 그래야 너희가 큰 열매, 많은 열매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과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를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에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지는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됩니다.

2-1. 양분을 공급받는 가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서 양분을 받아 먹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무는 뿌리에서부터 양분을 빨아들여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가지는 열매로 양분을 공급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꼭 붙어 있음으로 인해서 양분을 받아 먹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말씀을 받아 먹어야 됩니다. 우리는 죄 짓는 것을 타락이라고 생각하고, 악을 행하는 걸 타락이라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인 타락의 시작은 말씀에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고 있는가,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만 먹고 있는가, 매일같이 주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나는 영적으로 건강한가, 내 영혼이 배부른가, 이걸 점검해 봐야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섭취하지 않고 받아 먹지 않으면, 우리는 타락의 길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읽든지, 설교 말씀을 듣든지, 매일같이 교독을 하든지, 그런 일련의 노력들을 통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 먹는 좋은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과 함께 아름다운 동행을 할 수 있습니다.

2-2. 고난 중에도 붙어 있는 가지

주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신 두 번째 이유는 고난의 현장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여름 밤이 되면 비바람이 몹시 몰아치는 밤이 있습니다. 그때 포도나무 가지는 고민을 합니다. 붙어 있을까? 떨어져 버릴까? 붙어 있으려니 이 고난과 비바람이 너무 거셉니다. 떨어져 버릴까? 아니, 조금만 더 견디면 될 것 같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비바람이 지나고 화창한 날이 개었습니다. 농부가 지나가면서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담습니다. 어떤 가지는 땅에 떨어지고, 어떤 가지는 가지에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농부가 떨어진 가지를 주워다가 햇볕에 말려서 불쏘시개로 써버립니다.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가지에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여름밤의 비바람을 견디고 또 견뎠던 가지는 그다음 희망을 가집니다. 또 열매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비바람이 불어닥칩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어려움이 우리에게 주기적으로 찾아옵니다. 그때 기억하셔야 됩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를 떠나지 않겠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꼭 붙어 있는 아름다운 가지가 되겠다. 이걸 기억하셔야 됩니다. 떨어져 나가 버리면 그걸로 우리는 타락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고난이 닥쳤습니다.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온 무리들이 몰려왔습니다. 베드로는 겁이 났습니다. 칼을 빼서 휘둘러 보았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운명과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말씀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어떤 고난이 있어도 주를 떠나지 말라. 거기서 떠나는 순간 우리는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3. 자리를 이탈한 종교 지도자들

베드로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들도 역시 타락의 길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무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5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예수가 체포되어 가신 대제사장의 집 공관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이었고, 서기관들이었고, 장로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법으로는 어떤 사람도 감옥에 집어넣어 고문을 하거나 죽일 수가 없습니다. 로마법에 의거해서 처리해야 됩니다. 예수를 당장 죽이고 싶은데,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법에 의해서 고소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를 데려가기 전에 대제사장의 집 공관에 모여서 기소할 조건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다음 이런 행동을 합니다. 55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증거를 찾았는데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설교하신 일, 말씀 전하신 일, 병자를 고치신 일, 귀신을 쫓아내신 일밖에 없습니다. 가르치고, 전파하시고, 고치신 일이 주님이 하신 전부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다 품어 안으시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에게서 어떤 증거도, 어떤 죄악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일이 거짓 증언을 할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예수에 대해서 거짓 증언을 하라고 부추깁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하여 이르되."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거짓말이라는 것이 각기가 잘 맞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들끼리도 마음이 맞지 않습니다. 59절을 보십시오.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낭패입니다. 예수를 오늘 밤이 가기 전에 기소해서 날이 밝으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 선고받아야 되는데,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예수를 대신 잡을 명분이 없습니다.

3-1. 대제사장의 본래 자리

그래서 대제사장이 직접 나섰습니다. 직접 신문합니다. 60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참담합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있어야 될 자리가 이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대제사장을 두신 이유가 예수님을 신문하라고 두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 아론을 불러다가, 아론아 앞으로 너와 너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서 대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에 보면 대제사장이 입는 의복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호단 위에 에봇이라는 옷을 입습니다. 에봇 앞에 마치 앞치마처럼 길게 늘어진 판결 흉패가 있습니다. 오른쪽 가슴, 왼쪽 가슴에 우림과 둠밈(אוּרִים וְתֻמִּים)이라는 두 돌을 넣습니다. 그리고 그 가슴에서부터 시작되어서 열두 개의 보석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세 개씩 네 줄로 달려 있습니다. 이름이 각기 다른 보석입니다. 이 열두 개의 보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열두 지파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이 대제사장의 가슴에 박혀 있다는 뜻은,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있어야 될 자리는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성소에 엎드려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어려운 일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치시고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자리, 엎드리는 자리에 대제사장이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에게 권리이자 특권이자 의무가 있는데, 일 년에 단 한 번 모든 백성들을 대신해서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성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어지지 않는 공간입니다. 대제사장에게만 일 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에 허락된 공간입니다. 모든 백성들의 죄를 다 가지고 들어가서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대표인 대제사장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들의 죄를 면수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있어야 될 자리는 지성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 그 자리에서 엎드려 기도해야 됩니다. 그 때문에 대제사장의 집이 성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쉬도록, 그곳에서 늘 기도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다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이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중보자의 역할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대제사장 역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주는 영적인, 상징적인 중재자입니다. 상징적인 중재자인 대제사장이 참된 중보자인 예수를 심문하는 자리에 있는 아이러니를 우리가 어떻게 설명해야 되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있어야 될 자리를 이탈했습니다. 타락이 시작된 것입니다. 죄가 시작된 것입니다.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그가 영원토록 권력을 유지하고 가지기 위해서 예수를 제거해야 했기에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는 이 참담한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3-2. 서기관과 장로들의 본래 자리

서기관, 대제사장과 함께 있는 서기관은 율법 선생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서기관들처럼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자들입니다. 인쇄술이 없었던 시절에 모세오경을 항상 베껴서 필사해서 나누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보통의 일반인들이 까막눈입니다.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회당에서,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성경 선생입니다.

제사장들은 서기관을 데리고 다닙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합니다. 조정의 역할을 대제사장이 합니다. 제사장이 합니다. 그때 서기관에게 묻습니다. "아무개 서기관이여, 지금 이 분쟁은 어떤 말씀으로 조정하면 좋겠습니까?" 그럼 서기관이 성경을 펴서 읽어 줍니다.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분쟁을 조절해 주는 역할을 서기관이 담당해야만 했습니다. 성경 선생이고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이 서기관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대제사장과 결탁했습니다. 예수를 심문하고, 없던 죄도 만들어 내고, 예수를 기소해서 빌라도에게 데려가려는 자리에 대제사장, 서기관들이 모여 있습니다.

장로들도 있습니다. 연장자들입니다. 유대인들 중에 나이 많은 분들입니다.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래 살아서 경륜이 있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각 동네마다 어르신들, 장로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져 줍니다. 젊은이들이 흥분하면 흥분을 가라앉혀 줍니다. 인생의 깊은 지혜로 탈무드를 읽어 줍니다.

그런 장로들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매수당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서 예수를 기소하고, 없는 죄를 만들어 내고, 거짓 증언들을 일삼고 있습니다. 어찌 참담하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원래 그들이 있어야 될 자리, 그 자리를 이탈해서 예수를 심문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 모두가 타락하고 죄짓는 자들입니다.

4. 우리가 서야 할 자리

우린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나는 어디에 있어야 되는가, 나는 한 사람의 성도요 신앙인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그 자리가 분명히 있는데,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되는가, 우리에게 질문해야 됩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하나님이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교회 목양을 담당하는 목사로, 설교하는 목사로 하나님이 세워 주셨습니다. 목사가 하는 일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설교를 하기 위해서 설교 준비하는 일을 합니다. 주일 설교, 새벽 설교, 수요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온 마음과 시간과 정성을 다해야 됩니다. 그 일이 일의 전부입니다. 성도들의 기도 제목을 받아서 새벽마다, 시간 날 때마다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을 목회자는 해야 합니다. 성도들 각 가정을 심방하고, 일터를 심방하고, 성도들의 삶을 위로하는 일을 해야 됩니다. 그 일이 전부입니다.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자리로 옮겨가 버리면, 그 자리를 떠나 버리면 그때부터 타락이 시작됩니다. 타락이 별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영적인 사명도 주시고 자연인의 사명도 주셨습니다. 부모로서의 삶, 자연인의 사명 아닙니까? 사회적인 사명도 주셨습니다. 각자의 일터에서 일할 수 있는 사명도 주셨습니다. 자연인의 사명, 사회적인 사명, 영적인 사명, 이 사명의 자리를 떠나서 엉뚱한 자리에 서 있으면 그게 바로 타락이고, 그게 바로 죄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 대단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맡겨진 자리를 지키면 됩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자리, 성도는 성도의 자리, 우리가 해야 될 그 자리를 성실하게 감당하고 지키면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충성된 일꾼입니다. 위대한 업적을 세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성실하게 그 자리를 감당하는 자, 그들에게 하나님은 "너는 참 충성된 종이다"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그 자리에 합당하게 서 있는지, 혹은 이탈해 있는지, 베드로처럼 멀찍이 예수를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처럼 그들이 있어야 될 자리를 이탈해서 오히려 예수를 심문하고 거짓 증언하는 자리에 서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4-1. 다윗의 교훈

우리가 사랑하는 다윗 왕, 그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저지를 수 없는 흉악한 죄를 세 가지나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의 시작은 자리를 이탈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무엘하 11장 1절과 2절입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속한 그의 신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습니다.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면 왕들이 가야 됩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가지 않습니다. 요압 장군을 보냅니다. 군대를 보냈습니다. 자기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목자였습니다. 양 떼들이 전쟁터에 나아가는데 목자로서 양 떼들을 이끌지 않고 그는 왕궁에서 편안하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늘어지게 한 잠 잤습니다. 저녁에 되어서 침상에서 일어났습니다. 왕궁 옥상을 산책하며 거닙니다. 저 건너편에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거기서부터 죄가 시작됩니다.

간음 죄, 살인 죄,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한 걸 범하는 죄, 십계명 가운데 세 가지 계명이나 동시에 범해 버렸습니다. 이런 무서운 죄가 한꺼번에 순식간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자리를 이탈하는 것으로부터, 거기서부터 타락이 시작되고 죄가 시작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오늘 나를 어디에 세우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그 자리, 오늘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이탈해 있다면 즉시 돌아가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좋은 가지가 되어서 많은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자리를 되찾고 그 자리를 지키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을 통해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를 멀찍이 따라갔던 베드로, 주님과 대화할 수도 없었고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었고, 그리하여 그는 타락의 길을 접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하나님께서 본래 그들을 부르신 자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서 죄 짓는 자리에 서고 말았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르신 부르심의 자리에 서 있는 지혜로운 백성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자리를 매일같이 돌아보게 하시고, 그 자리에 합당한 충성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열정을 부어 주시옵소서. 주님 앞에 마땅히 있어야 될 그 자리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운 가지가 되어서, 우리 가지에 많은 열매 가득 맺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