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막 14:66-72)
악어의 눈물이라는 이야기를 아마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나일 강에 살던 악어는 사람을 잡아먹거나 먹이를 먹으면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악어가 미안해서, 미안한 눈물 곧 애도의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과연 악어가 사람을 잡아놓고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요? 과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악어는 눈물샘 아래를 지나가는 신경이 턱관절 신경과 줄기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먹이를 삼키기 위해서 턱을 벌리면 신경이 자극되어서 자연스럽게 눈물샘이 자극되고 눈물이 흐른다고 합니다. 결국 악어가 흘리는 눈물은 애도의 눈물이 아닌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문학가들은 악어의 눈물을 가리켜 위선자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지만 속으로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갖은 악행과 계략을 꾸미는 사람, 그런 사람을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악어도 이렇게 눈물을 흘리지만 사람들도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그 의미가 참으로 다양합니다. 우선 기쁨의 눈물이 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가장 높은 단상에 올라가서 흘리는 눈물은 지난날 수고하고 땀 흘렸던 그 모든 것들이 기억나서 기쁨에 겨워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가 흘리는 눈물을 보면서 사람들도 함께 눈물 흘립니다. 그 수고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가히 짐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후회의 눈물, 회한의 눈물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자녀들이 흘리는 눈물입니다. 우리가 부모님 살아생전에 조금 더 잘할 걸, 부모님 말씀 좀 잘 듣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행하며 살 걸 하며 후회하는 눈물, 회한의 눈물입니다. 그것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비통함이 묻어있는 눈물입니다. 또한 고단함의 눈물도 있습니다. 일생을 살아가다 보면 고단한 일을 겪고 경험하게 되는데, 그때 흘리는 눈물을 윤성하 시인은 「소금시」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소금 월급을 받았다. 소금을 얻기 위해 한 달을 싸웠고 소금으로 한 달을 살았다. 나는 소금 병정. 한 달 동안 몸 안에 소금기를 내주고 월급을 받는다. 소금 방패를 들고 거친 소금밭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버틴다. 소금기를 더 잘 씻어내기 위해 한 달을 절어 있었다. 울지 마라. 눈물이 너의 몸을 녹일 것이니."
과거 로마 병사들은 소금으로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월급, 급여라는 말이 샐러리가 되었고 월급쟁이가 샐러리맨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소금을 벌기 위해서 로마 병사들은 몸 안에 있는 소금기를 내어주어야 됩니다. 땀이 흘러야 된다는 뜻입니다. 땀만 흘리겠습니까? 눈물도 흘러야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로마 병사를 소금 병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역설적인 것은 소금으로 만들어진 소금 병정은 울면 안 됩니다. 눈물이 흘러내리면 그 몸이 다 녹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면서 고단한 인생길에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울지 않으려 입술 깨물고 버티는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이렇게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사람들은 많이 울고 지냅니다. 하지만 우리가 꼭 흘려야 할 눈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은 베드로의 눈물이 바로 그 눈물입니다. 회개의 눈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연되어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 살아간 모습들을 회개의 눈물로 씻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너는 어떤 눈물을 흘리고 있느냐,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눈물인지 우리의 눈물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신앙인의 영향력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 관정으로 체포되어 들어가시고 다른 모든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도망가다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셨을까? 잡혀서 그냥 그 자리에서 처형당하시는 건 아닐까? 예수님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서 먼발치에서 멀찍이 따라가다가 대제사장의 집 안뜰, 아래뜰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때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66절과 67절을 보시겠습니다. "베드로가 아래 뜰에 있을 때에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니."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고 밤이 되면 기온이 떨어져서 춥습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이렇게 불을 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불가에 있던 이 베드로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둘러봅니다. 그리고 주목하여 봅니다. 가만히 살펴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난데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도 저 안에 있는 나사렛 예수와 같이 있었던 사람이다."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베드로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마 심장이 멎는 듯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믿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을 눈여겨 보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행하며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참 많이 다니셨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 그리고 온 유대로, 다시 데가볼리 쪽 갈릴리로, 주님이 3년 동안 다니셨던 곳곳마다 베드로는 동행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림자처럼 바로 옆에 붙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설교하실 때도 그랬고, 병자를 고치실 때도, 귀신을 내쫓으실 때도, 기적을 베푸실 때도 베드로는 항상 그 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는 동시에 베드로를 봅니다. "아, 저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구나" 하면서 무의식중에라도 베드로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 몸짓, 행동, 이런 것들에 사람들은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전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아해할 만한 행동도 가끔씩 합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기도받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을 다 쫓아냈습니다. 화를 내면서 쫓아버렸습니다. 그런 짓도 서슴지 않았던 베드로였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의 여종까지 베드로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영향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 신앙을 가진 사람을 눈여겨 봅니다. "아, 저 사람이 예수 믿는데, 저 사람의 말은 어떠하고, 저 사람의 행동은 어떠하고, 저 사람의 가정은 어떠하고, 저 사람의 태도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세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영향력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도 영향력을 가집니다.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막대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우리의 삶에만 영향을 끼칠 뿐 영원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의 영향은 바로 영적인 영향력입니다. 어떤 이를 영적으로 귀하게 세울 수도 있고, 어떤 이를 영적으로 바닥에 떨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1-1. 한 사람의 영향력
가끔 늘그막에 교회 등록하시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70이 넘어서 오십니다. 제가 여쭤봅니다. "어르신, 교회에 처음 나오신 겁니까? 칠십 평생 사시면서 예배당은 처음 오십니까?" 그러면 그 어른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30대까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어느 교회 집사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저기 가면 어떤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목사에게 제가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교회라면 진저리가 나고 쳐다보기도 싫어서 교회를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인생 늘그막에 죽을 때가 가까이 오니 하나님 품 안에 와야 되겠다 생각하고 돌아왔습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잃어버린 40년은 누가 보상해 줍니까? 그분이 40년 동안 믿음 생활 잘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나중에 그분을 실족하게 한 이는 심판 날 하나님 앞에 가서 책망받을 것입니다. "너의 말 한마디가, 너의 행동거지 하나가 저 사람의 40년을 잃어버리게 했는데 너 어떻게 책임질 거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추상같이 우리에게 따져 물으시면 그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때 우리가 뭐라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책임져야 됩니다, 그분의 잃어버린 40년을.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믿음 생활을 굳게 지키고 평생 동안 붙잡아서 큰 믿음의 일꾼이 된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큰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너 한 사람의 삶의 수고와 본을 보인 때문에 저 사람이 큰 일꾼이 되었구나. 믿음의 큰 일꾼이 되었으니 너에게도 큰 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위대하고 놀라운 상급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거대한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됩니다.
1-2. 아브라함과 롯
성경에도 그런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정반대의 예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에 불러놓으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잘 섬기고 믿음 생활하게 하셨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게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 아내 사라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황했습니다. 아내를 묻을 매장지가 없어서 걱정하고 있는데 가나안 땅에 있는 원주민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23장 5절과 6절입니다.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거절할 자가 없으리이다."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내 주여,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세우신 지도자이십니다." 그렇게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 땅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땅 중에 당신이 원하는 땅을 가져가십시오. 당신의 아내를 장례 치르십시오. 걱정 없이 장사하십시오." 물론 아브라함은 정당한 대가를, 그보다 더 많은 대가를 주고 땅을 샀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수고한 그 수고의 깊이를 헤아려 보셔야 됩니다. 얼마나 수고했기에, 얼마나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기에 그들이 자기 땅을 그냥 그대로 내어놓는다 하겠습니까? 그동안 아브라함은 고생하고 땀 흘리고 수고하고 믿음의 본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여겨 보는데, 그 눈여겨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달랐습니다. 그는 소돔 땅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소돔 땅이 왜 망했습니까? 소돔 땅이 멸망한 이유는 열 명의 의인이 없어서 멸망한 것입니다. 한번 따져봅시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 그 안에 두 딸들 2명, 사위 2명, 합이 6명입니다. 네 명을 전도하지 못해서 망한 것입니다. 물론 두 명의 사위도 정상적인 신앙인이 아니었고, 두 딸들도 세상에 찌들어버린 타락한 여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산술적으로 보면 롯의 가정은 네 명을 전도하지 못해서 온 도시가 다 망해버렸습니다.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주해 온 롯의 가정을 눈여겨 봅니다. 뭐가 다르지? 우리와 어떤 것이 다를까? 다름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돌리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망해버린 것입니다. 롯의 가정 때문에 소돔 땅이 망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눈여겨 살펴보고 우리 행위와 말투까지 다 살펴보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생각보다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질문
또한 이 여종이 베드로에게 질문한 이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또 한 가지 교훈을 배웁니다. 그 교훈은 부지불식간에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언젠가는 우리가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이 질문을 받았는데, 예 아니면 아니오로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고백을 요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회색지대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알면 아는 것이고 모르면 모르는 것이지, 어중간하게 애매하게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잘 대답해야 됩니다. 만약 예수를 안다고 대답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신문받고 고통받고 있는 대제사장의 집 관정 안으로 베드로도 끌려 들어갈 것입니다. 영광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같이 재판당하고 고난당하고 매질을 당하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 지고 올라가서 순교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커다란 고통이 따릅니다. 만약 모른다고 대답한다면 그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저 열린 문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잘 대답해야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회색지대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주님의 결단을 요구하는 질문이 우리 인생에 닥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이 질문을 할 테니 지금 준비해라" 예고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우리에게 닥쳐 들어옵니다. 그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에 가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치든지 바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됩니다. 흑이든지 백이든지, 회색지대는 결코 머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상황을 언젠가 주시고 "너희의 믿음의 정직함을 보여라, 네 믿음의 순전함을 보자" 하시면 우리 그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 인생에 한 번은, 꼭 한 번은 하나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통해서든지, 어떤 상황을 통해서든지, 어떤 일을 통해서든지 우리에게 반드시 물어볼 때 그때 잘 대답해야 됩니다.
2-1. 준비하는 삶
베드로는 여기에서 실패했습니다. 훗날 베드로가 돌이키고 회개한 이후에 이때의 기억이 너무 가슴에 사무쳐서 그가 이렇게 교훈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하라." 항상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돌아보니까 자기는 준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깨어서 항상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나처럼 실패의 전철을 밟지 말고,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라, 항상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을 준비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깨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 누구를 통해서 질문하든지 "나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나는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베드로의 세 번 부인
그러나 불행하게도 베드로는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68절을 보시겠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갑자기 여종이 물어보는 말에 그는 대답하지 못하고 부인합니다. 그러면서 자리를 옮깁니다. 이제 도주로를 확보합니다. 앞뜰로 나가서 그 열린 문으로 기회만 되면 빨리 저기로 도망가야지 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가슴은 방망이질 치고 두렵습니다. 그렇게 두려운 마음으로 베드로는 자리를 옮깁니다.
그런데 여종이 거기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동원합니다. 옆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여종이 묻습니다. "여보십시오, 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까? 나는 저 사람을 저 안에 있는 예수가 설교할 때 보았는데요." 그러니 옆에 있는 사람도 동조합니다. "그렇군요. 나도 보았습니다. 나도 저 사람을 그때 누군가가 함께 있을 때 보았습니다. 예수가 기적을 행할 때 나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한 번 더 부인합니다.
70절을 보십시오.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라."
또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종이 아니라 사람들이 베드로를 둥그렇게 에워쌉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너의 말씨대로 보니 말투가 저 북쪽 갈릴리 사람이구나. 갈릴리에 있는 나사렛 예수와 같은 도당이구나. 네가 함께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왜 거짓말하느냐? 왜 발뺌하느냐?" 베드로에게 해명을 요구합니다.
베드로는 이제 자기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서 그냥 어중간하게 대처했다가는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71절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누구를 저주했을까요? 저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했다는 얘기입니다. 강력하게 예수를 저주했습니다. 어떤 내용으로 예수를 저주했는지 알 수 없지만, 베드로는 사람들이 모두 물러날 만큼, "저렇게 자기 선생을 저주하고 욕하는 걸 보니 아닌가 보다" 사람들이 믿을 만큼 강력하게 예수를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맹세했습니다. 뭘 걸고 맹세했는지는 모르나 그는 예수를 저주하고 뭔가를 걸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빠져나왔습니다.
3-1. 예수님의 신앙고백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 상황이나 이 장소를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하는 이 순간, 예수님은 같은 시각 대제사장의 집 가장 밀폐된 공간에서 신문받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직접 예수를 신문합니다. 거짓 증인들이 많이 모여와 있었는데 그들의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자 대제사장이 직접 신문합니다. 그 신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61절과 62절을 보시겠습니다.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대제사장이 분명히 물었습니다.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확실하냐?" 예수님이 단순하게 대답합니다. "내가 그니라." 예수님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친아버지이신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도 버리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인정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이 제자들도 예수님의 품 안에 끌어안았습니다. 예수께서 인정하셔야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구원받을 수 있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반열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시각 베드로는 선생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예수를 아는지 모르는지 물을 때, 사람들이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질문을 할 때, 내 정체성을 드러내야 되는 어쩔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될 때, 그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예수께서 "나는 나를 부인하지 않는다. 한 번도 내 하나님 아버지를 부인한 적이 없다" 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음성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내가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나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나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자신을 살리려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자리를 박차고 도망와 버렸습니다.
4. 회개의 눈물
얼마나 달렸을까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캄캄한 골목길 어귀에 섰을 때, 그때 그의 귓전을 때리는 한 소리가 들립니다.
72절을 보십시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첫 번째 닭이 울었는데 첫 번 닭이 우는 소리는 정신이 없어서 듣지 못했습니다. 부인하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느라 그는 그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무도 없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저 멀리 어느 방향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그때 갑자기 머리를 때리며 한 가지 기억이 나는데,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네가 오늘 닭이 두 번 울기 전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이 말씀이 떠오르는 순간 그의 눈에는 눈물이 솟아나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옵니다. 무릎을 꿇고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4-1. 성령의 역사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억나게 하고 생각나게 하는 것은 내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기억나고 싶다고 이것이 기억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억나게 하는 것, 생각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기억나게 하고 떠올리게 하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서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바다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요한복음 16장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라."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하시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때가 되면 기억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물리적으로 기억력이 자꾸만 감퇴되고 사라지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놀라워서 기억나게 하십니다. 그때 예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때 예수께서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가 기억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갑자기 기억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이 기억났을까요? "네가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만이 아닙니다. "주님, 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만큼은 주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고 자기가 호언장담했던 호기로웠던 그의 모습이 기억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운 얼굴로, 예수님께서 눈빛으로 베드로를 붙드시고 "내가 오늘 밤 고민하여 슬퍼하며 심히 죽게 되었으니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 너희는 여기 머물러서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 기도를 부탁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것도 기억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계속해서 잠들어 있었던 자신의 모습도 기억났습니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서 온 자들에게 칼을 빼서 휘둘러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떨어트린 것도 기억났습니다. 인자한 모습으로 예수께서 떨어진 귀를 주워다가 그 귀에 붙여주시고 고쳐주신 모습도 기억났습니다.
여러 가지가 다 기억나서 그는 견딜 수가 없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통곡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4-2. 베드로와 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눈물이 그를 살린 눈물이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더 이상 떨어질 데야 떨어질 수 없는 가장 밑바닥에서 그는 이제 자신의 무능을 경험합니다. 호언장담했던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립니다. 거기서 그는 새로움을 경험하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사실 가룟 유다나 베드로나 오십보 백보 아닙니까?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치운 가룟 유다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던 베드로나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결정적인 차이는 눈물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기억나게 하시고 생각나고 깨닫게 하셔서 흘렸던 눈물이 그를 위대한 사도 베드로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 성령께서 가장 많이 일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자꾸만 생각나게 하십니다. 나의 감추었던 죄도, 과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도 자꾸만 기억나게 하십니다. 기억이 나면 눈물이 납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은혜를 받았던 그 날도 기억하면 눈물 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가운데 살았던 내 모습을 기억하며 눈물 나고, 그래서 베드로처럼 통곡하고 눈물 흘리는 것입니다.
그 눈물이 나를 살리는 눈물입니다. 여러 가지 눈물의 의미가 있지만, 베드로처럼 성령께서 기억나고 생각나게 하셔서 흘리는 눈물이 우리가 흘려야 하는 모든 눈물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눈물이 메마른 시대,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시대,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가는 이 시대, 우리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깨닫는 은혜를 주셔서 많이 울고 깊이 있게 울어서 새로움을 경험하시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여러 가지 눈으로 살피고 또 바라봅니다. 우리는 영적인 영향력을 주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충대충 살았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한마디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들의 영혼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또 일생 일대의 중요한 질문 앞에 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대답할 말을 준비하기 원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대답을 항상 준비하고 깨어 있는 믿음의 백성으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베드로가 흘린 그 눈물,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그 눈물이 오늘 우리 눈에 흐르는 눈물 되게 하여 주시고, 그 눈물이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무릎을 적시며 강단을 적시며 우리의 가정을 적시는 회복의 눈물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