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강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5:1-5)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막 15:1-5)

1. 진정한 왕의 자격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1835년에 태어나 1910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분은 이 기간 동안 많은 소설을 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었는데, 우리가 아는 불후의 명작이 여러 편 있습니다. 그중에 「톰 소여의 모험」도 그분의 작품이었고,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도 그분의 작품입니다. 그중 「왕자와 거지」는 1882년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배경은 1547년 영국 런던입니다. 영국 런던 1547년에 두 아이가 각기 다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가정은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가정으로, 태어난 아이는 에드워드라는 왕자였고, 또 하나는 영국 런던 빈민가 부랑아의 아들로 태어난 톰 캔티라는 아이였습니다. 두 아이의 삶의 현장은 너무나 극명하게 차이가 났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둘이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각자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톰 캔티는 왕실 구경이 정말 하고 싶었습니다. 저렇게 좋은 집에는 어떤 사람이 살까? 저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왕실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경비병에게 잡혀서 혼이 날 참에 쫓겨났습니다. 그 모습을 우연히 지켜본 에드워드 왕자가 경비병을 혼내고 톰 캔티를 불러다가 자기 방에서 씻기고 먹이고 함께 이야기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두 아이가 서로의 모습을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똑같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두 아이의 장난끼가 발동했습니다. 서로 옷을 바꿔 입어 보기로 한 것입니다. 옷을 바꿔 입고 왕실을 걷습니다. 그런데 경비병이 이를 발견하고 진짜 왕자인 에드워드를 두말할 것 없이 그냥 왕궁 밖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나는 왕자라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먹히지 않습니다. 톰 캔티는 내가 거지라고, 나는 왕자가 아니라고 소리소리 질렀지만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왕실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왕자가 과중한 업무와 학업 때문에 그만 미쳐버렸다고 말입니다. 헨리 8세는 왕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함구령을 내립니다. 왕자가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갑니다. 에드워드는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며 세상 공부를 합니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왕실에 돌아갈 수 없었고, 런던 시내 부랑아들, 거지들, 가난한 사람들, 고아들이 어떻게 사는지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과 정말 다르게 사는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가 왕실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영국 백성들이 이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정말 훌륭한 왕이 되어서 선정을 베풀겠다고 결심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헨리 8세가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제 졸지에 톰 캔티는 왕이 되게 생겼습니다.

자신이 왕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는 대관식 자리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고, 그 자리에 어떤 사람의 도움을 입은 에드워드가 나타났습니다. 멀리서 외칩니다. 내가 왕자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두 사람의 외모가 거의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하 한 사람이 말합니다. 왕이 갑자기 돌아가신지라 옥새 위치를 우리도 아무도 알 수 없으니 당신이 진짜 왕자라면 옥새 위치를 정확하게 말해 보시오. 에드워드가 옥새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말해 주었고 신하가 찾아봅니다. 그제서야 그는 왕자로 인정받고 왕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사실 사회 풍자 소설이고 사회적인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해서 지금도 읽히고 들려지고 있는 소설입니다.

1-1. 세상 왕의 한계

하지만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왕이 될 사람은 분명한 자격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옥새 위치 정도는 정확하게 알아야 왕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세상의 왕이 되기에는 한참 부족합니다. 백성들을 선정으로 잘 이끌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왕은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외적들의 침입에 대처할 만한 지략도 있어야 되고, 적과의 싸움에서 영토를 넓혀 갈 만한 용맹도 있어야 되고, 탁월한 무예도 겸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을 이 악한 세상에서 지켜낼 수 있고 자신의 왕국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왕이 갖추고 있어야 될 여러 가지 조건들이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왕이 해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선정을 베풀어도, 아무리 용맹하고 무예가 출중하고 뛰어나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두 가지 문제는 바로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우리 마음속에 불쑥불쑥 솟아 나오는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왕조차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왕도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문제를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도 그것이 가장 두려움이고 큰 문제였기 때문에, 백성의 사망의 문제를 왕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1-2. 진정한 왕 예수 그리스도

진정한 왕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그분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그분 나라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잘못된 열심의 경계

2-1. 예수를 넘긴 자들

예수님께서 일차적으로 체포당하시고 대제사장의 집 관저에 가서 신문당하셨습니다. 여러 거짓 증인들이 나와서 예수에 대해서 참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대제사장이 직접 신문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찬송 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가 맞느냐, 그리스도냐라는 질문입니다. 구약에서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 기름 부어 세우는 직책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말은 네가 왕이냐, 제사장이냐, 선지자냐, 이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서 회피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니라,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대제사장은 기소장을 썼습니다. 빌라도의 관저에 예수를 끌고 올 명분을 확실하게 얻었습니다. 그리고 기소장을 써서 예수를 끌고 빌라도의 관저에 들이닥칩니다.

오늘 말씀 1절입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우리는 이 본문에서 주의 깊게 봐야 될 것이 몇 단어가 있습니다. '새벽에', '즉시', '온 공회가',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는 단어입니다. 새벽입니다. 아직 빌라도는 자기의 업무를 시작하기 전입니다. 잠들어 있습니다. 모든 만물들이 잠들어 있는 이 새벽에 얼마나 급했던지 즉시, 그리고 모든 공회원들, 대제사장, 서기관, 유대인의 장로들이 함께 다 모여서 빌라도의 관저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기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 뭐가 이렇게 급해서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열심인가, 언제 이 사람들이 이렇게 새벽을 깨우며 일했던 적이 있던가, 이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을 다해서 즉시 달려갔던 적이 있던가 하는 질문을 해 봐야 됩니다. 왜 이렇게 열심일까요? 이들은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권력과 물질과 사회적 지위를 예수 때문에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시라도 빨리 예수를 기소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려고 이들은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들은 이렇게 열심을 내라고 하나님께서 그분들에게 직분을 준 것이 아닙니다. 새벽에 예수를 끌고 빌라도의 관저에 가서 고소할 것이 아니라, 이들은 새벽 미명에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리에, 새벽기도 하는 자리에 앉아 있어야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밤새도록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일까,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진리의 말씀과 그 빛이라고 하는 깊은 의미가 무엇일까, 그들은 공부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회당에서 가르칠 말씀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이들이 모여서 회의한 것이 예수를 죽일까 말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우리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을 고민하고 회의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열심을 내었는데 잘못된 열심, 그릇된 열심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살아가시는 동안 이들은 예수를 음모하고 음모에 빠뜨리고 죽이기 위해서 온갖 열심을 다해서 감당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끌려서 예수께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는 초막절 잔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잔치인 초막절 잔치 마지막 날에 사람들은 해방감에 젖어서 예루살렘 뒷골목에서 각종 험난한 일을 일삼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사건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이 맞도록, 밤새도록 예루살렘 뒷골목을 헤집고 다닙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나옵니다. 남자는 보내버리고 여자만 끌고 나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예수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말씀하십시오.

만약 예수가 돌로 쳐 죽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사랑의 율법을 전파하신 것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이율배반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물고 늘어질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살려 보내 주어라라고 한다면 모세의 율법에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것 때문에 못살게 굴고 고발할 것입니다. 이들은 이런 의도를 가지고 밤새도록 열심을 다해서 눈에 불을 켜고 예루살렘 뒷골목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끌고 주님 앞에 나온 자들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는 그 3년 동안 이런 악한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열심을 내었는데 그릇된 열심입니다.

2-2. 사명자의 참된 성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명과 성실의 관계를 함께 생각해 봐야 됩니다. 사명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명자는 무조건 성실해야 됩니다. 사명자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실한 사람이 무조건 사명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실한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성실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이 사람들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예수를 신문했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예수를 끌고 빌라도의 관저에 끌고 나왔습니다. 얼마나 성실합니까? 얼마나 열심입니까? 밤새도록 예루살렘 뒷골목을 헤집고 다닌 사람들, 얼마나 성실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하등 상관없는, 아무런 상관없는 성실함이 이들의 악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명 감당하는 성실한 자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책도 주시고 직분도 주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에 합당하게 일하는 자가 진실로 성실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하기 싫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찾아다니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자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성실도 아닙니다. 차라리 성실하지 않았더라면 죄는 짓지 않았을 텐데 이 사람들이 성실했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디에 성실하십니까? 김남준 목사님이 쓰신 「게으름」이라는 책에 보면 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텔레비전을 하루 종일 껴안고 뒹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죠. 하루 종일 텔레비전 리모콘만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텔레비전이 고장이 났습니다. 그때부터 바쁘기 시작합니다. 드라이버를 가지고 텔레비전을 고치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닙니다. 잘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들고 서비스센터에 가져다 줍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부지런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진짜 부지런한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그 텔레비전을 고치면 다시 뒹굴고 게을러질 것입니다. 게으름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부지런한 것입니다. 게으르기 위해서 부지런한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진실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나는 과연 사명자로 성실한가, 사명에 아무런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부지런한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성실한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빌라도의 질문

3-1.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는 잠을 자다가 갑자기 난데없이 들이닥친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를 포박해서 꽁꽁 묶어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예수를 끌고 나왔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처음 보았을까요? 빌라도는 예수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을까요? 빌라도도 예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집권 체계는 제일 정점 꼭대기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있습니다. 티베리우스가 직접 식민지에 와서 통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각 식민지마다 총독을 파견합니다. 그래서 파견된 사람이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 제일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빌라도가 있습니다. 그 아래에 분봉왕 헤롯들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세 덩어리로 분할해서 통치하는 자들입니다. 그 아래에 다시 그들에게 붙어서 기생하는 유대 종교 권력자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함수 관계의 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이들의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함수 관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가 얼마나 그들에게 위협적인 인물인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그들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권력을 빼앗는 것인지, 백성들이 예수에게 얼마나 열광하는지, 그래서 유대 종교 권력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것도 빌라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난데없는 방문에 빌라도가 일어나 눈을 떠서 나가보니 예수가 포박되어서 끌려왔습니다. 아, 뭔가 일이 일어났구나, 저들이 예수를 드디어 건수를 잡아서 끌고 왔구나.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사건 기록을 검토하지 않습니다. 기소장을 읽어 보지도 않습니다. 하루 이틀 걸리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한마디, 단도직입적으로, 직접적으로 예수께 질문합니다. 2절입니다.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가 단 한 가지 질문만 했습니다.

질문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대제사장은 예수께 네가 찬송 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습니다. 대제사장은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지만 빌라도는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빌라도에게 선지자, 제사장은 의미 없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자기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빌라도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것만 관심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가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대답한다면, 그 당시에 팔레스타인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왕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입니다. 이것은 황제에 대한 역모입니다. 내란 또는 체제 전복 죄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정치범으로 십자가형에 처해버릴 수 있습니다. 당장에 사형을 집행할 수도 있는 질문입니다.

3-2. 내 말이 옳도다

아마 빌라도는 이 질문을 던지면서 예수가 이 질문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왕이라고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아니라고 부인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2절입니다.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예수님이 그대로 인정해 버리셨습니까? 네 말이 옳도다. 이제는 더 이상 재판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재판 끝나고 주님을 십자가형을 언도받는 일에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앞에서나 빌라도 앞에서나 절대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쓸쓸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아이러니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감히 빌라도, 고작 자신의 등에 로마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고 있습니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께 인간 빌라도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너무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빌라도는 아마 그 당시의 최고의 황제, 왕 중의 왕은 티베리우스 황제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왕은 누구십니까? 우리가 고백하는 왕 중의 왕은 누구십니까?

로마 황제가 로마 시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로마 황제는 로마 시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합니다. 로마 시민의 권력은 굉장합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역대 최고의 제국입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보더라도 로마제국은 역대급 제국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면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대접받습니다. 면책특권을 가집니다. 내가 문제가 있어서 재판을 받으려고 하면 나는 로마에 가서 황제 앞에서 재판받겠다면 그것을 함부로 재판할 수도 없습니다. 로마 시민권이 가지는 권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 모든 만물을 쓰레기 같다고 말합니다. 나는 로마 시민권보다 하늘의 시민권,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싶다고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로마 시민권,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것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부와 명예와 권력을 안겨 준다 하더라도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고민, 실존적인 고민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죽음 이후의 문제를 로마 황제가 어떻게 해결해 줍니까? 죽고 난 이후의 문제, 황제도 고민입니다. 나도 죽으면 그다음 어떻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내가 누리고 살았는데 여기 다 놔두고 떠나야 하니, 황제도 고민입니다.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불쑥 일어나는 욕심과 정욕과 음란과 죄의 문제를 황제 스스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그 때문에 고민하고 염려하고, 죄삯은 사망인데 그것 때문에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이 모든 인간의 불쌍한 실존적 모습을 황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 한 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대리적 속죄의 죽음으로 나 대신에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되는데, 죄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되는데, 예수께서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세상에 어느 황제가, 세상에 어느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다는 말입니까? 세상의 법은 백성이 황제를 위하여 죽습니다. 백성이 전쟁 하러 가서 황제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다가 죽으면 황제는 그 병사의 남은 가족들을 위하여 평생 동안 잘 먹고 잘 살게 해줍니다. 그렇게 해 줄지언정 황제는 병사를 위하여 대신 죽지 않습니다. 그것이 법입니다. 백성들이 황제를 위하여 죽는 것이 법이지, 황제가 백성을 위하여 죽지 않습니다.

누가 왕입니까? 진정한 왕이 누구십니까? 그분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어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그다음 문제까지도, 영원한 생명의 문제까지도 단번에 해결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감히 빌라도, 고작 인간 빌라도가 예수를 신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이고, 이것이 비참한 인간의 죄된 모습입니다.

4.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4-1. 말씀을 지키는 백성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고 고백하고 모시는 자들입니다. 입으로 그렇게 고백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찬양도 하고, 예수께서 나의 왕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백성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한 가지 확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왕과 백성 사이에는 언약의 증표가 있는데 바로 법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도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가 그와의 언약 백성으로 지켜야 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약속을 하나 주셨는데, 너희는 내 백성이라면 이 말씀을 지키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말씀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확정해야 됩니다. 입으로만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삶으로 그렇게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말씀 지키며 살아간 개인도 있고 교회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절과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시는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몸은 로마 황제의 녹을 먹고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예배 드렸다는 뜻입니다.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예배 드리라.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고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라. 매일같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고넬료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말씀대로 지키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고넬료와 그의 가정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금이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 말씀을 지키며 사는 백성을 기억하십니까? 그러면 그의 인생은 더 이상 걱정하거나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로마의 압제와 핍박 가운데 살아 나가고 있는 교회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과 3절입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아직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이었습니다. 지하교회 성도들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핍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위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은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 눈에 보이는 역사를 만들어 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수고로 왔습니다. 사랑이 명사로 머물지 않고 동사로 바뀌어졌습니다. 성도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사랑을 수고로 왔고, 소망은 인내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비록 힘들고 어려운 지하교회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다음 세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이다, 그다음은 우리에게 영광된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 소망은 인내로 그들을 견디고 버티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교회 성도들을 기억하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왕인데 왕의 법전인 말씀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너희들, 내가 인정하며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며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만 아십니다. 내가 압니다. 말씀을 지키며 사는 내가 알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사는 우리를 보시는, 마음 심중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 아십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자들이라면 말씀대로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2.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삶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를 미혹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가정에서 돈을 벌어 오니까 가정의 가장인 네가 이 가정의 왕이야. 사업체를 운영하니까 사장님인 당신이 이 회사의, 이 사업체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담임목사인 저에게도 사탄이 계속 말합니다. 네가 이 교회를 담임하고 목회하고 있으니 이 교회 왕은 바로 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상상해 보십시오. 굉장히 무서운 얘기입니다. 가정에서 돈 벌어오는 가장이 그 가정의 왕이 되면 돈을 잘 벌어 올 때는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경제력이 힘들어지고 돈을 벌지 못하고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가장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 가정은 그대로 산산조각 파선합니다. 왜냐하면 왕이 무너졌으니까요.

그런데 그 가정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왕이 예수님이시라면, 모든 식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법전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가정이라면 가장에게 문제가 생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도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기 때문에, 왕이신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굶기시겠습니까? 왕이신 하나님이 그 백성들이 난파도록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사도 마찬가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교회 공동체라면 교회 공동체에 여러 가지 문제들, 비바람과 풍파가 와도 그냥 지나가는 바람일 뿐입니다. 왕 되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붙들고 지켜내시고, 가정도 직장도 일터도 왕 되신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속삭임과 미혹에 넘어가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고백하고, 하나님 주신 진리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고 지켜나가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 되시고 주는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왕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며 살면서도 우리에게 주신 말씀, 진리의 법전인 이 말씀을 지켜 행하며 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입으로만 왕으로 고백하는 자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행하며 지키며 살아가서 고넬료와 같은 사람,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 같은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성실한 자 되기를 원합니다. 사명은 팽개치고 우리가 내가 원하는 데 성실한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사명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주께서 책임지시고 복 내려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