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강 /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15:6-15)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막 15:6-15)

고대 그리스는 직접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수많은 위대한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그들로 인해서 나라는 아름다워졌고 위대해졌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 테미스토클레스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그리스의 집정관이자 동시에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에게해의 패권을 두고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분은 페르시아의 해군력을 막아내기 위해서 전투선 200여 척을 건조하고 해상의 군사력을 증대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퇴하고 에게해의 패권을 그리스가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고, 이 사람들이 확인되지 않은 악의적인 소문들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이 분에 대한 여러 가지 악한 소문들을 계속해서 옮기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그건 아닙니다. 오해입니다"라고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그것도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마침 그 당시 고대 그리스에는 도편추방법이라는 법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도자기 파편에 그 나라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의 이름을 써 내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사람을 10년 동안 해외로 추방하는 법이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바로 이 법의 희생양이 되고 맙니다. 극단적인 민주주의의 폐해를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플라톤은 이런 모습을 가리켜 중우정치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리석은 대중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정치를 표현한 것입니다.

과거 고대 그리스에만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정치인이나 정치 집단이 아젠다를 띄웁니다. 그러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이 여론을 형성합니다. 국가가 법과 제도에 의해서 통치되고 다스려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심각하고 아주 극단적인 여론몰이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결정해 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그런 막심한 피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재판, 예수님의 재판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은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의가 사라진 재판입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보면서 과연 사람들의 다수가 동의하는 것이 정의인가 하는 질문을 해 봐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면 거기에 복음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 봐야 합니다. 과연 정의가 무엇인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백성들인데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정의의 기원과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깊이 묵상하고 살피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고,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으로 재판은 끝입니다. 그러나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명철한 사람이었고 아주 노련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수없이 많이 보아 왔기에 예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만든 전례 때문에 걸림돌이 됩니다. 죄가 없으면 석방하면 되지 않습니까?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 풀어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걸림돌은 전례 때문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명절에 한 가지 전례를 빌라도가 만들었습니다. 그는 주후 26년에 유대 땅에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백성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 한 가지 없던 법을 만들었는데, 명절에 죄수를 석방하는 법이었습니다. 법과 제도와 절차에 의해서 법대로 하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를 풀어준다 하는 단서가 바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보다 훨씬 더 흉악한 범죄인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증인도 없고 증거도 없었고 정의가 상실된 재판이었지만, 그러나 가장 흉악한 범죄자 한 사람이 잡혀 있었습니다. 바로 바라바였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그야말로 체제 전복자였습니다. 민란을 꾸몄습니다. 민란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살인했습니다. 살인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요구가 죄 없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석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딜레마였습니다. 백성들은 그 뒤에서 조종하는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리고 유대의 종교 권력자들에게 조종당하고 있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그 당시 유대인들의 핫 이슈는 예수냐 바라바냐 하는 문제 같습니다. 예수는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라바는 누가 보더라도 죄인입니다. 누구를 석방해야 되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석방해야 되는데 백성들의 목소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석방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 다수가 정의인가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 봐야 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과연 다수가 정의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복음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다수가 정의라면 예수님의 재판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빌라도가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냐고 사람들이 질문할 것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다수가 그 안에 복음을 상실하고 있다면, 다수라 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음성을 상실하고 있다면 이것은 진리도 될 수 없고 복음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1-1. 노아 시대의 교훈

노아 홍수 사건을 살펴보십시오. 노아 홍수 시대에 단 8명만 살아남았습니다. 노아와 노아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해서 예배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세상을 즐기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짓는 동안 120년의 시간을 주셨건만 그 시간도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다수가 정의라면, 대다수가 모인 그 자리가 진리가 살아 있는 곳이라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셔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8명만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수는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1-2. 엘리야와 남은 자들

구약시대 엘리야와 나머지 7,000명의 사람들이 아직까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남은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외에 모든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에게 무릎을 꿇고 우상 숭배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다수가 진리라면 그 7,000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옳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7,000명이 정말 나의 백성이고 남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유다가 멸망할 때 1차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는 다니엘도 있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고 바쳐진 음식을 아무리 왕이 먹는 진미와 포도주라 할지라도 먹고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왕의 음식인데 나도 먹고 싶다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누가 정의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그것이 정의입니다.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날 때 이 땅의 기독교인은 1.3%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98.7%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 정의입니까? 소수의, 극소수의 1.3%가 정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 있고 뿌리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하셔야 됩니다. 혹시 우리도 숫자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 우리도 사람들이 많이 줄 서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니까 나도 가야 되는가 보다, 대세를 쫓아가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면 그것은 사망의 길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뿌리 박혀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길을 가면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한 사람이 서 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 아니라 단 한 사람도 없다 할지라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바를 석방하십시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하였지만 이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도 기억하시고, 우리는 말씀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군중의 급변한 태도

두 번째 질문을 해 봐야 됩니다. 그렇다면 군중들은 왜 이렇게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을까요? 사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할지어다" 소리 높여 예수를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이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태도가 급변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바랐던 예수의 모습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 로마를 극복하고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이런 예수를 원한다, 해방자 예수를 원한다. 그들은 현세적인 예수를 소망하고 꿈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고 거리가 멀었습니다. 주님은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들이 원했던 예수의 모습이 아님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태도가 급변한 것입니다. 요즘 말로 손절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굉장히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좋아했던 정치인, 스포츠 스타, 연예인들에게 원했던 바가 그들에게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요구를 합니다. 돌아서서 악성 댓글을 달아 버립니다. 돌팔매질을 합니다. 세상에 악한 사람도 그런 악한 사람이 없도록 그 사람을 매도해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표리부동합니다. 손바닥 뒤집듯이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요? 하나님 한 분은 절대로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죄인 되었을 때나 하나님의 자녀 되었을 때나 하나님은 똑같이 진실하고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지금도 확정하시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 한 분이 변함없는 하나님 아버지가 되십니다. 사람 따라가지 마시고, 변덕을 부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마시고, 상처받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빌라도의 선택

또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빌라도의 속 마음을 헤아려 봐야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정치적 역학 관계에 의해서 유대 종교 권력자들에게 예수님이 잘못 보여서 그들이 시기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준 것을 빌라도가 다 알고 있습니다. 노련한 정치인입니다. 그래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해 볼까 하고 백성들에게 한마디 말을 던져 봅니다. 찔러보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던져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의 반응이 아주 강하게 돌아옵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찐 일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적어도 양심이 있는 정치인이자 재판관이었다면 백성들에게 물어봐서는 안 됩니다. 법이 있고 제도가 있고 절차가 있습니다. 기소한 기소장이 있습니다. 여러 증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청취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의견도 듣고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그래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됩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백성들 이야기만 듣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예수를 그냥 넘겨 줘도 됩니다. 그런데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를 채찍질하라고 명령합니다. 무리를 기쁘게 하고자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원래 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백성들에게 물어보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백성들의 눈치를 보면서 없던 전례도 만들었고, 마치 인민재판 같은 것을 예수님의 재판으로 해버린 것입니다.

3-1. 출세를 향한 욕망

빌라도는 왜 이렇게 했을까요? 빌라도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빌라도는 로마 본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뛰어난 지능과 명석한 재능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출세했습니다. 아주 어려운 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외교관이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신임을 받고 유대 땅에 총독으로 파견 받았습니다. 지금은 로마 본토에서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가장 원하고 소원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지금은 비록 내가 본토에서 떨어져 나와서 유대의 총독으로 있지만 나는 곧 저 본토로 가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오른 팔이 되겠다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선결 조건이 있는데 그 선결 조건은 다스리고 있는 유대 땅이 평온한 것입니다. 문제가 없어야 됩니다. 소요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민란이 일어나서도 안 되고 백성들이 시끄러워서도 안 됩니다.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라바야말로 죄인 중에 죄인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출세하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따위가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악한 사람 바라바를 석방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정의가 사라진 것입니다. 오로지 빌라도에게 있어서 정의는 내가 출세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만족을 주고 그들에게 호의를 얻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는 출세해서 빨리 로마 본토로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안중에 없습니다. 진리도 정의도 예수님에 대한 호의도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로마 황제 입장에서 한번 이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 황제는 제국의 중심에서 온 세계를 다스리는 왕 중의 왕, 황제 중의 황제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그가 식민지를 다스리고 있는데 그에게 있어서 식민지는 어떤 의미일까요?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 됩니다. 그리고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면 됩니다. 빌라도를 총독으로 보냈으니 거기서 잘 다스리면 됩니다. 만약 민란 일어나고 소요 사태가 일어나면 본토에서 군대를 보내야 됩니다.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집니다.

파견한 총독이 세금을 조금 떼먹든, 없는 법을 만들어서 죄수를 석방해 주든, 예수가 죄가 있는데 그를 십자가에 못 박든 말든, 예수가 죄가 없는데 석방하지 않든, 그것은 황제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따위야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에게는 관심 밖입니다. 이런 황제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빌라도는 황제 마음에 들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줘 버린 것입니다. 위로는 황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3-2. 하나님을 기쁘시게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 봐야 됩니다. 나는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빌라도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이후에 사도들의 신조를 만들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흉이 되었습니다.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2,000년이 넘도록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흉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않고 왕을 만족시키고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아갔던 사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가 누구십니까?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세상에 어떤 황제도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을 손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하십니까? 누구의 마음에 합당하게 하기 위해서 행동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십니까? 무엇을 우리의 인생의 이정표로 삼으십니까?

데살로니가전서 2장 4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복음을 위탁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붙들고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받은 사명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삶이라고 자기 스스로의 정체성을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 기쁘게 하도록 살다 보면 오해받습니다. 그런데 그 오해가 평생 동안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그런 오해를 안고 우리는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팔아먹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등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오해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한 분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아가셔야 됩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은 하나님 한 분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십자가 지신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면 주님은 로마와 맞서 싸워야 됩니다. 로마를 전복시키고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해줘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세적인 만족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오해해도 주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그들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고 나서야 예수의 죽음을 백성들은 이해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목 놓아 통곡하고 회개합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가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오해했던 것들이 풀려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해하고 붙들고 계시면 그것으로 만족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지음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지음 받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 복음은 숫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복음을 근거하는 기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이번 한 주도 승리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숫자를 따라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을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진리가 없다면 즉시 돌이키게 하여 주옵소서. 한 사람이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이 확실하면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 믿음의 백성이 되는 결단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이 선택 가운데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복음을 위탁 받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다 보면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그 오해를 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만이 내 삶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결단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믿음의 백성으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