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강 /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15:23-32)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막 15:23-32)

서론: 관점의 차이

관점이라는 말의 의미는 '보는 지점'입니다. 어떤 물건을 보는 지점에 따라 그 물건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정면에서 보는 것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 측면에서 보는 것처럼 보는 위치에 따라 굉장히 다르게 보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는 자신의 책 「논리철학논고」에서 오리-토끼 그림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이 오리로 보이십니까, 아니면 토끼로 보이십니까? 어떤 분은 오리로 보이는 분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토끼로 보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토끼로 보일 수도 있고 오리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보일 뿐입니다.

어떤 한 사물을 보는 데 이렇게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을 보는 관점도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라는 사람이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 의하면 리처드 도킨스는 사람을 마치 동물처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유전자가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은 유전자가 지배하는 거대한 로봇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어린아이가 학습하지 않았는데도 맹수를 보면 두려워합니다. 사자나 호랑이나 곰을 보면 겁을 내고, 어린아이에게 독사 그림을 보여줘도 겁을 냅니다. 학습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는 정보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주 자그맣고 귀여운 동물을 보면 다가가서 만지려고 합니다. 이것도 유전자에 각인된 정보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학습되지 않았는데 유전자가 인간을 지배한다고 말하고 있고, 이 유전자의 특징이 이기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인간이 이타적인 행위를 할 때도 있는데, 이타적인 행위 자체도 이미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이차적으로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인간을 바라보면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고,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따르는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보는 또 다른 관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물론 죄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타락하였지만, 성령께서 조명하시므로 그 죄가 벗겨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면 하나님의 훌륭한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인 존재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인간을 동물과 같은 존재, 이기적인 존재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구원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계시는지, 이 말씀을 통해서 혹시 우리가 구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면 수정하고 바꾸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관점을 마음속에 다시 깊이 각인하시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십자가의 고난

1-1. 몰약을 탄 포도주

예수님께서 치욕과 모욕과 수치를 다 견뎌 내셨습니다. 밤새도록 심문당하고 채찍질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체력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 병사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데려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예수님은 지쳐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매 맞고 모욕당하며 골고다 언덕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십자가형이 집행되기 직전입니다.

바로 그때 로마 군인이 무언가 하나를 예수님에게 건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로마 병사가 건넨 것은 몰약을 탄 포도주 잔이었습니다. 이것을 마시라고 예수님께 건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를 왜 건네주었을까요? 몰약을 탄 포도주는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려서 손과 발에 못이 박혀야 되고, 옆구리에 창이 들어가야 되는데 맨 정신으로는 이 고통을 다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육체를 마취하는 것입니다. 정치범으로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끝내 거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몰약을 탄 포도주, 마취제를 거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것을 거절하신 이유는 세포 하나하나에 모든 고통을 다 받겠다는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도 알고 계시고 주님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주께서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단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전부터 십자가를 향해 가는 과정까지, 십자가에서 당하는 고통까지 그 모든 것을 다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하나하나의 고통까지도 다 감수하시고 하나도 건너뛰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입니다.

1-2. 온몸으로 당하신 고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과정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깊고 폭넓게 퍼져 있는지를 우리는 깊이 깨닫습니다. 우선 주님께서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실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머리가 찔립니다. 곳곳에 가시가 찔려서 피가 흐릅니다. 그 피가 흘러서 눈을 적시고, 그 피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립니다. 주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머리로 생각하는 것들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하루에도 수십 번, 하루에도 수백 번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리 선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죄투성이입니다. 사람들은 생각으로 죄를 짓고, 그 생각이 손과 발로 내려가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죄이기 때문에 주님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내가 너 대신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다음 주님께서 양손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손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이 손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육체 가지고 우리는 죄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짓습니다. 발은 또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길,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신 그 금지된 길을 우리는 생각 없이 그냥 걸어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심으로써 우리 죄를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온몸에 주님께서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우리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이 죄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몸뚱이 어느 하나, 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죄로 찌들어 있고 죄의 권세에 굴복되어 내려온 육체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몰약을 탄 포도주도 거부하시고, 채찍질도 한 대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다 맞으시고 다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 몸으로, 몸의 각 부분으로 지은 죄를 주님께서는 몸으로 고난당하시면서 그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이유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건너뛰지 않으시고, 그 어느 것 하나도 넘어가지 않으시고 그대로 다 받아 내셨습니다.

2. 교회를 섬기는 삶

여기까지 생각하면 우리는 주님의 그 극진하신 사랑,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깊이 감동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 주시면 우리는 주님께서 이 고통당하신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주께서 가시 면류관 쓰시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이 들어가시고, 온몸에 채찍질당하시고, 이렇게 죽으셨구나. 우리는 이 주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기억하면 나도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성도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주님께 집을 사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차를 사드릴 수가 있습니까? 옷을 한 벌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주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어떻게 교회를 위해서 섬긴다는 의미와 동일합니까? 사도행전 9장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이, 바울 되기 전 그냥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신실한 종교 사냥꾼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옥에 넘겨줍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그는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옥에 넘겨주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앞이 가려져서 하나도 보지 못하는 그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그런데 이 말을 들었던 사울이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삶을 살아가실 때 사울은 예수님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사울이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사울은 와해시켰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옥에 넘겨주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고, 그들이 다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는데 사울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를 핍박하는 너 사울아, 너는 바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논리에 비추어서 보면, 예수를 박해하는 자가 사울이고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라면, 교회를 잘 섬기고 교회를 사랑하면 곧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우리 교회 공동체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서 예수님이 극심한 고통을 다 겪어 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살려낸 영혼과 그렇게 살려낸 영혼들이 모여진 교회를 섬기고 아끼고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고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바 최선을 다해서 교회를 섬겨야 됩니다. 어떤 이는 청소하는 일로, 어떤 이는 봉사를 감당하는 일로, 어떤 이는 한 영혼 한 영혼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일로, 어떤 이는 교회를 위해서 불철주야 기도하는 일로, 교회 공동체 각 섬기는 자리에서 내 섬김을 최선을 다해서 담당하는 일로 우리는 그 교회를 잘 섬기면 주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섬기는 일이구나." 주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부디 앞으로 우리가 마음속에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모진 고난당하신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나의 온 힘을 다해서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두 가지 구원관

3-1. 세상의 구원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집행됩니다. 그 전에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겨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진행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제삼시, 유대인 시간 제삼시는 오늘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예수님의 사형 집행이 오전 9시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른 시간입니다.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집행되었을까요? 그 전날 밤새도록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대제사장의 공간에서 빌라도의 공간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수치를 주고 모욕하고, 그리고 일사천리로 불법적인 재판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오전 9시에 형 집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독특한 점이 발견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을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보통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정치범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치범은 정치범대로, 강도 같은 잡범은 잡범대로 그렇게 십자가형을 집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강도를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사형 집행을 진행했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각인 효과 때문입니다. 그 그림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의 십자가가 가운데에 있습니다. 오른편 왼편에 강도가 달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예수가 무슨 종교적인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구나. 양쪽에 달린 강도처럼 흉악한 범죄자에 불과하구나." 예수님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전략입니다. 예수님에게 뭔가 고유한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강도의 자리로 전락시키려는 빌라도의 음모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집행해 버렸습니다. 이른바 강도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영향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의 전략이 성공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환경이나 어떤 사람에게 영향받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율법에 의하면, 정결법에 의하면 시체를 만지면 안 됩니다. 나병환자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각색 병자들을 가까이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거리낌이 없습니다. 나병환자도 만져 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각색 병자들을 다 가까이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시체도 만져 주셨습니다.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 살려 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죽었는데 주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시체를 가까이하는 것을 주님은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생명의 능력이 죽은 자를 살리게 하고, 주님의 생명의 능력이 들어가면 나병환자의 병이 낫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영향을 줄지언정 악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도 역시 그러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달린 강도들에게 주님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 강도 중에 한 강도가 회심했습니다. 주님이 전하신 말씀을 듣고 주께서 그에게 말합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마음껏 휘두르시고 마음껏 드러내셨습니다. 그랬던 주님, 오늘 우리에게도 능력의 주님으로 나타나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마디 두 마디 던집니다. 29절과 30절을 보십시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십자가형을 구경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것이 구원이다." 이들이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가 너무나 무능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무능한 예수 우리는 필요 없으니, 달려 있지 말고 내려와서 너 자신을 구해 내 보라."

그런데 지나가는 일반 백성들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31절 3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대제사장, 서기관들, 이른바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를 조롱하기를 "십자가에서 내려와라. 그러면 지금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 지지 않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고난과 고통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고난, 고통, 수치, 모욕이라는 단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구원관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받기를 두려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기를 싫어합니다. 피해 가려고 합니다. 둘러가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점집이 항상 문전성시 아니겠습니까? 해마다 연초가 되면 점집으로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 중에도 가서 묻습니다. "올해 내가 어떤 일을 조심해야 될까요?"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부적을 써서 가져옵니다. 지갑에 넣고 아니면 베개 밑에 놓고 잠을 잡니다. 그런다고 고난과 고생과 어려움이 피해 가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라도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두려워하면서 복받기만 바라는 사람입니다. 고생하지 않고 얻고자 하는 것, 현세주의적인 구원관입니다. 기복 신앙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 십자가 없고 고통 없고 고난 없고 헌신 없고 아무것도 헌신하지 않으면서 구원의 영광과 부활의 영광에는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오늘 우리네 사람들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그때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나, 오늘 2천 년 이후에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말하는 오늘 우리들이나 똑같은 구원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기복 신앙적인 구원관입니다.

3-2. 하나님의 구원관

하나님은 이렇게 구원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구원은 철저하게 십자가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려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고통 다 당하고 다 겪고 거기서 죽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어야, 그래야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버리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관은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불꽃, 십자가를 지고 하나도 건너가지 않고, 몰약을 탄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온몸에 관통하는 고통을 다 치르고 지나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과정을 생략하고 구원의 결과만 취하려고 하는 악한 종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시면서도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구원관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르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지나갑니다.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이었습니다. 칭의의 차원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사십 년 동안 모진 고난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사십 년 동안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항상 광야를 추억하고 광야를 기억합니다. 그 고통의 시간이 다다른 이후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성화의 과정이 다 지나고 나서야 영화의 차원의 구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상상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칭의의 차원의 구원이 있고 난 이후에 광야를 건너뛰고, 구름을 태워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지 왜 이렇게 고난을 겪게 하시는가? 사람을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성화의 차원의 구원의 기간을 통해서 교만이 무너집니다. 인간의 자아가 부러집니다. 자기 생각이 바뀌어집니다.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하나님 중심적 생각으로 바뀌어집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관은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의 자아가 바뀌고, 교만이 꺾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더듬는 그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전적으로 순종한 구약의 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아람 장군 나아만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위대한 장군이었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병이 낫지 않습니다. 어떤 의사를 만나도, 아무리 좋다는 약을 써도 낫지 않습니다. 그의 집에 있는 한 여종이,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한 여종이 지나가는 말로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엘리사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이 주인님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밑져봐야 본전이니까 사람을 데리고 엘리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엘리사가 말합니다. "요단강 물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으면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기도도 한번 해주지 않고, 안수기도도 해주지 않고 요단강 물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으라니. "우리나라 아람에는 훨씬 더 깨끗한 물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왜 여기 들어가야 되나. 돌아가자." 혈기가 충만합니다. 아직까지 자아가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변 종들이 말립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해 보십시다." 그가 순종합니다. 요단강에 한 번, 두 번, 세 번 낫지 않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일곱 번 들어갔다가 올라올 때 그의 살이 어린아이 같이 깨끗하게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그 과정을 통해서 자아가 죽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요단강 물에 그의 자아를 죽였습니다. 흘려보냈습니다. 떠나보냈습니다. 그런 고통의 과정, 자아를 죽이고 자기 생각을 꺾고 교만을 꺾는 과정을 통해서야 그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결론: 십자가를 통과하라

오늘 우리는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통과하는 구원이 아니라 비껴가는 구원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을 통과하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과정과 장치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시면서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욕심이 내려놓아질 것이고 자아가 깎일 것입니다.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우리 삶에 그대로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계획에 순종하셔서, 영광의 부활의 영광, 구원의 영광이 우리 자신과 가정과 우리와 함께하는 모든 분들에게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비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게 노력하고 많이 가지는 것, 수고하지 않고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통받지 않고 영광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시고 사람들이 "내려오면 믿겠다" 했지만, 하나님은 주님을 십자가에 끝내 매달아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 우리도 이 원리를 잘 기억하게 하여 주시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의 가시밭길, 이 어려운 시간들을 온전히 견디고 이겨내는 믿음의 자녀, 하나님 백성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이 길을 걸어가면서 생각이 바뀌고 자아가 무너지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