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강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15:33-38)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막 15:33-38)

1. 희생이 세운 것들

조선 말기 순조 임금 시절에 예조 판서를 지냈던 김학성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어머니가 참으로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남편을 일찍 여의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기울자 그분은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서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삯바느질도 하고 날품팔이도 하고 남의 집 일도 하면서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나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집안에 앉아서 삯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장대비가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빗물이 마당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떤 둔탁한 소리가 나서 마당에 나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묻혀 있던 항아리 뚜껑이 드러나 보였습니다.

자신이 묻어둔 항아리가 아니었기에 도대체 이 항아리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다가가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안에 은 덩어리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방망이질 쳤습니다. 항아리를 덮고 수습을 한 이후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방안에 들어와서 며칠을 밤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였습니다. 이걸 어떻게 할까? 오랫동안 고민한 이후에 그녀는 집을 처분하고 멀리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는 고생스러운 수고를 이어갔습니다. 자녀들은 열심히 공부했고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집안이 일어섰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이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두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두 아들이 듣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그걸 좀 쓰시지. 어머니 필요한 데 쓰셨으면 그렇게 고생하지 않으셨을 텐데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어머니가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내가 그걸 가져다가 우리 집안 살림에 펴서 쓰면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했겠느냐? 지금 너희들이 벼슬길에 올라서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노력하지 않고 얻은 재물 때문에 오히려 우리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을 것이다. 너희들은 죽을 때까지 이를 가슴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한다." 당부에 또 당부를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이, 어머니의 헌신이 이 가정을 살리고 가문을 살리고 두 아들을 세운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의 원리는 누구 하나가 성공하고 잘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과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어떨까요? 영적인 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오늘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 대리적 속죄의 사명을 다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대리적 속죄 사명을 다하신 우리 주님에 대해서 깊이 배우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 사랑의 힘입어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는데, 구원받은 자의 자세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의 사명도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버림받으신 유일한 분

2-1. 십자가의 절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주님은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그 일을 묵묵히 담당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주님은 다 수행하셨습니다. 주님은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주님의 손과 발에는 못이 들어갔습니다. 주님의 허리에는 창이 들어갔습니다. 온몸에는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건넸지만 주님은 거절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난과 고통을 뼛속 깊이,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받으시려는 주님의 철저하신 섬김의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십자가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형이 집행됩니다. 유대인 시간으로 제삼시,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주님은 그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장장 6시간 동안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유대인 시간으로 제구시,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에 주님은 운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남기신 말씀이 가상칠언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이 일곱 가지 말씀을 다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는 한 말씀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이렇게 한마디 말씀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이 말씀이 주님의 그 심정과 마음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Ἐλωΐ Ἐλωΐ λεμὰ σαβαχθανί)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우리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남기신 가장 의미 깊고 가장 중요한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십자가 상에서 6시간 동안 고통받으시면서 주님이 느끼신 단 한 가지 감정, 내가 드디어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받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저 머리로만 생각했습니다. 버림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십자가 상에서 달려 돌아가시면서 철저한 단절, 철저히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그 고통을 주님은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몸이 고난받는 것, 못 박히고 가시 면류관 쓰는 것, 이 고통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단절된다는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셔서 버린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이후부터 오늘까지 올 때까지 하나님은 단 한 분만 버리셨습니다. 단 한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만 버리시고 모든 인류를 구원으로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단 한 분을 버리신 이유는 우리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2. 예정의 참된 의미

우리는 여기서 지금까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전통적 이중 예정의 교리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일단의 무리는 구원으로, 어떤 일단의 무리는 유기와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수없이 듣고 수없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이중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품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세 가지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전통적인 이중 예정의 교리, 어떤 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멸망으로, 어떤 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구원으로 예정되어 있다면 첫 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성품에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을 사랑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만세 전부터 너는 지옥 가야 돼, 너는 천국이야, 만약 이렇게 하셨다면 이건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전도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이 이미 있는데 왜 전도하겠습니까? 아무리 전도해도,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지옥 갈 사람은 알아서 지옥 갈 것이고, 구원받을 사람은 알아서 구원받을 것인데 전도하는 노력과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쏟아붓는 것이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구약성경 이사야서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의 발걸음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복음을 끝까지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중 예정 교리가 참이라면 복음 전도가 의미 없어질 것입니다.

셋째 문제입니다. 이중 예정 교리를 우리가 받아들이면 우리는 운명론과 결정론에 빠져 살게 됩니다.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의 운명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멸망으로 그리고 구원으로. 이렇다면 오늘 우리가 무엇을 먹을지, 어떤 옷을 입을지, 누구와 만나서 어떤 사랑을 할지, 자녀는 몇 명을 낳을지, 이번 시험에 합격할지 불합격할지, 우리는 몇 살까지 살다가 어떻게 죽을지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과 결정론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아도 전통적인 이중 예정의 교리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버리기로 작정하신 분은 단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아버지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버리고 모든 인류를 구원으로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예정은 창세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인간이 에덴에서 범죄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죄를 지으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수치심이 느껴집니다.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뭇잎을 따다가 치마를 만들어 엮었습니다.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고.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해가 떠올랐습니다. 나뭇잎이 말려 올라갑니다. 수치가 다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똑같이 나뭇잎을 따다가 치마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삶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누군가가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짐승을 죽이셨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그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대를 에덴에서 내쫓으실 때, 쫓으시면서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내가 너희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짐승을 잡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이후에 때가 되면 내가 단 한 분, 내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그의 피가 너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려 줄 것이다.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어떤 수치 가운데 있든지, 그의 피가 너희의 영혼을 타고 흐르면 너는 결코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탄이 그 일로 너를 참소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에덴에서부터 복음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예정은 하나님이 단 한 분을 버리시고 모든 인류를 구원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3. 찢어진 휘장

이제 우리에게 선택권이 넘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으니 그 길로 우리가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의미심장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운명하실 때, 그때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7절과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주님께서 운명하시는 그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여기 "찢어졌다"는 말을 수동태로 쓰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찢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찢으셨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성소의 휘장을 찢을 수가 없습니다.

휘장이 무엇입니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아뢰는 대속죄일입니다. 다른 사람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그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성경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10장 19절과 20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휘장이 곧 그의 육체라고 말씀합니다. 휘장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살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허리에 창이 들어오고 주님의 몸에 있는 피와 물이 다 빠져나갔습니다. 갈기갈기 찢겨진 것처럼 휘장도 찢겨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어짐으로 우리가 얻은 특권과 유익이 있습니다. 대제사장만 일 년에 단 한 번 지성소,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오고 또 오는 모든 인류가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특권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정체성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누구나 다 하나님 제단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알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복음 전파의 통로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 나온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인 이 길로 우리가 먼저 나갔습니다. 단 한 분 버림받으신 우리 주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우리는 먼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먼저 구원받고 그것으로 끝내버리면 안 될 것입니다. 아직 다시 구원받지 못한 자, 아직까지 세상 가운데 죄의 권세 가운데 살고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를 열세 편이나 기록했는데, 마지막 감옥에서 기록한 마지막 서신 디모데후서에서 이 사명을 디모데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거룩한 구원의 통로가 되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먼저 구원받았기에 그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작금의 현실을 보십시오. 교계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성도들이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지 않습니까? 각종 시위와 집회로 인해서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아주 심각한 문제를 발견해야 됩니다. 집회, 시위와 결사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자유입니다. 이 나라와 대통령과 정부를 향해서 얼마든지 시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법과 시기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우리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일부 교계 지도자들과 교회 성도들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서 전도의 문이 막히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옵니다. 교회 학교에 다니는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 가서 이런 일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이 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엄마, 나 이제 학교 가서 교회 다닌다는 말을 대놓고 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니?" "내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 친구들이 나를 따돌립니다. 나를 이상하게 봅니다. 선생님도 나에게 '교회 갔다 온 사람 손들어 보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 내가 어떻게 교회 간다고 마음껏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경험하실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당신 지난주에 교회 다녀 왔느냐?" "당분간 교회 가지 말라." 직장에서, 일터에서 끊임없이 권고하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이런 지경까지 되고 말았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정치적인 판단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한 가지 기준,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느냐, 유익하냐, 그렇지 못하냐 라는 기준으로 볼 때, 지금 작금의 현실에서 몇몇 성도들과 교계 지도자들, 그분들은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거룩한 통로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휘장을 찢어 놓으시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했는데, 왜 너희가 그 자리를 막아서느냐. 우리에게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책망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심판 날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이 그 책임을 물으신다면 우리는 그 추궁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에나 행동에나, 내가 하는 말과 행위와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복음 전파에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기준으로 판단하셔야 됩니다.

5. 교회의 거룩한 본질

교회는 어때야 됩니까? 여러분,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교회 주인이시고 머리가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손과 발입니다.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지체는 머리가 시키는 대로 행해야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몸인데 머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 몸은 병든 몸입니다.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룩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 땅에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대리적 속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죽음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수용하고 담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교회가 살아야 된다는 명분 아래 믿지 않는 사람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보일까요? 교회가 죽기 위해서 나아간다면, 우리가 차라리 죽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한다면,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죽기 위해서 애쓰고 힘을 쓸 때, 교회는 거룩한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떨어진 기독교의 공신력, 떨어진 교회의 위상을 위해서 우리 교회가 땅을 팔아서, 우리 교회가 건물을 팔아서, 헌금을 다 나누어서라도 우리 교회가 이 땅에 떨어진 기독교의 공신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런 심정으로 목회해야 되고 그런 심정으로 교회를 섬겨야 됩니다. 교회가 죽어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날 수만 있다면,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예수 닮은 공동체, 예수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 교회 공동체의 거룩한 사명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됩니다.

지금 이 땅은 분열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극우와 극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로 분열되어져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교회는 어디에 속해 있을까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교회는 보수 중에 극우에 속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슬픈 일입니다. 이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왜 보수와 극우에 속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까? 교회는 진보도, 극좌도, 극우도 아닌, 그런 정치적 구분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가치를 가지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가 왜 세상의 정치 논리 가운데 희생양이 되어야 하고, 교회가 왜 세상의 정치 놀음에 앞장서야 하는 것입니까? 교회는 정치적인 집단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세속 권력은 로마가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습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거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정치적 해방을 꿈꾸었습니다. 예수께서 가지신 능력이라면,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로 5000명 이상을 먹이시는 능력이라면, 주님은 지금이라도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건져낼 수 있는 분이시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정치적 해방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유대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기대를 다 알고 있었지만, 세상의 가치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같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더 크고 원대하고 위대한 가치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서 그들의 세속적 욕망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 사상은 이미 이 세상에서 빛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반도에는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북녘땅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이 땅에도 공산주의의 망령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계급 투쟁입니다. 가진 자의 것을 가지지 못한 자가, 유산 계급의 것을 무산 계급이 빼앗아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을 빼앗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서 우리가 함께 나누어서 함께 잘 살자는 것이 공산주의 사상입니다. 그 계급 투쟁의 과정에서는 피가 발생합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땅을 가진 자 땅을 빼앗고, 건물을 가진 자 건물을 빼앗고, 물질을 많이 소유한 자 물질을 떼어서 나누자는 것이 공산주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가면 복음은 뛰어넘습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유무상통했습니다.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바나바를 보십시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복음이 이처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이 가치를 배우면 공산주의의 계급 투쟁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꿈꾸고 이뤄나갈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어떻습니까? '자유'라는 말 때문에 사람들은 방종으로 치닫습니다. 성적 지향성과 성적 자유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성애에 탐닉합니다. 자유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어떤 짓이든 해도 된다. 그런데 말씀은, 성경은 동성애가 죄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복음이 들어가고 말씀이 들어가고 말씀 앞에 굳게 선 자, 동성애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시장 경제, 거대한 기업이 작은 기업을 집어삼킵니다. 무한 경쟁의 논리 가운데 약한 자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들어가면 거대한 기업은 큰 울타리가 됩니다. 작은 중소기업들이 숨을 쉬고 살아날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복음의 역사는 정치 논리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극우냐, 극좌냐, 진보냐, 보수냐, 이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보다 더 가치 있고, 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복음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정치적 선동질을 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정치적 선동의 교회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복음에 굳게 서야 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고,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단 한 가지 유일한 목적은 버림받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께서 단 한 분 버림받으시고 모든 백성들이 다 구원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대리적 속죄 사명을 감당하는 그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나는 복음 전파의 디딤돌인가 걸림돌인가. 우리 교회는 복음 전파에 앞장서는 교회인가, 복음 전도를 막아서는 교회인가. 교회가 죽어서, 우리 개인이 죽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도 불사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 공동체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으로, 대리적 속죄의 제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라서, 우리가 죽음으로, 우리가 십자가를 짐으로, 교회가 죽음으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그 자리에 이르게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오히려 주님께서 휘장을 찢으시고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막아 놓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주옵소서. 혹시나 우리가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었다면 돌이키고 회개하오니 주여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고쳐 주시옵소서.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 닮은 공동체가 되어서, 죽고 썩어지고 사라져서 오히려 주님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감한 교회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오직 주님만 영광 받으시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높이 영광 받으시며, 하나님의 이름만 높임을 받는 그 놀라운 일에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