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증인들 (막 15:39-47)
엘리자베스 요안나 셰핑이라는 분은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았고, 어머니는 딸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딸은 성장해서 어머니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다시 딸을 버렸습니다. 딸이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요안나 셰핑은 1912년 우리 나이로 서른두 살이 되던 해에 조선의 간호 선교사로 자원합니다.
조선에 발을 디딜 때 그녀는 아직 젊은 처녀였습니다. 그녀가 간호사로 조선에 와서 처음 근무했던 곳은 광주 제중원이었습니다. 광주 제중원에서부터 일을 시작해서 여러 병원에서 환자를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그녀는 간호학 책도 저술하고, 조선간호부회를 조직해서 간호사들의 인권 향상에 힘을 썼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여성 교육에도 관심이 있어서 여성들을 계몽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이일학교를 만듭니다. 훗날 이일학교는 신학교가 되고, 오늘날 전주에 있는 한일장신대학의 모체가 됩니다.
그녀는 수많은 일을 감당했지만, 그중에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일은 고아와 거지와 한센인들의 어머니가 되어 준 것입니다. 사실 한센병 환자들은 자신의 병 때문에 자신을 돌보기도 굉장히 벅찹니다. 그래서 자녀 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것을 잘 알았던 엘리자베스 요안나 셰핑은 13명의 한센인 자녀들을 돌보고 입양합니다. 푸른 눈의 외국 여인이 우리나라 어린아이들을 안아서 키웠습니다. 이렇게 13명을 키우고 돌보느라 자기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2년 동안 이 땅에서 열심히 사역한 결과 그녀는 1934년 쉰네 살의 나이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충격적이게도 그녀가 세상을 떠나게 된 원인은 영양실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뒷마무리를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유산은 동전 7전과 강냉이 가루 두 홉, 그리고 절반은 거리의 거지에게 찢어 주고 남은 담요 절반이었습니다.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 이후에 그녀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광주 최초의 시민장으로 거행되었고, 연도를 가득 메운 천여 명의 고아와 거지와 한센인들은 "어머니, 어머니" 하며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녀가 이 땅을 살고 있었을 때, 미지의 땅 조선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알려지지 않은 조선에 와서 사역을 할 때는 아무도 그녀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고, 목사가 아니라 평신도였고,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녀를 뇌리에서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녀의 아름다운 헌신과 섬김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녀를 파송했던 미국 남장로교회는 교단이 파송한 여성 선교사 중에 가장 위대했던 선교사 일곱 명 중에 한 사람으로 엘리자베스 요안나 셰핑을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7년 엘리자베스 요안나 셰핑의 한국 이름 서서평, 그녀의 이름을 딴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이 땅을 살아갈 때 어떤 인생을 사느냐에 따라서, 사후에 세상을 떠나고 그들의 공동체를 떠난 이후에 기억되는 정도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에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 십자가의 증인 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엘리자베스 요안나 셰핑과 우리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모습을 통해서, 나는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각인될 것인지 우리 자신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반추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일곱째 말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그 고통으로 인해서 우리는 살 길을 얻었습니다. 단 한 분 그리스도만 버리시고 모든 인류를 구원으로 하나님은 초대해 놓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임 당하시던 그날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누구나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은총과 특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아주 통쾌해 하며 쾌재를 부르며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죽임 당하신 이 모습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이제 예수가 죽었으니 우리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구나, 자손대대로 자손만대 떵떵거리며 지금 누리던 부와 권세를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었구나, 예수 때문에 하마터면 일이 그릇될 뻔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어땠을까요? 빌라도의 유일한 관심, 유일한 목적은 출세였습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오른팔이 되어서 황제의 측근이 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땅이 조용해야 됩니다.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키기 직전이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바라바를 석방하소서. 그는 군중의 소리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석방했습니다. 빌라도도 안도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민란과 소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 모습을 보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분들입니다. 백부장, 여인들, 아리마대 사람 요셉, 그들입니다.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백부장의 고백
3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 백부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백부장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기록된 백부장은 예수님의 고난과 수난, 고통 받으심과 십자가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전날부터 불법적인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의 집, 공회,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받으셨습니다. 여기 이 백부장은 그 모든 재판을 다 지켜봅니다. 불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질 당하셨습니다. 아마 백부장이 명령을 내려 부하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치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워서 앞장 세웠습니다. 주님은 지치고 지쳐서 골고다 언덕을 올라오시면서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쓰러지셨습니다.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 올라오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아 두었습니다.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했던 지휘관이 바로 여기 이 백부장입니다.
1-1. 그렇게 숨지심
그런데 이 백부장이 어떻게 처음으로 십자가를 고백한 예수님 십자가의 증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3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예수께서 그렇게 숨지셨다는 의미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이 분은 사형집행을 업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정치범으로 온 사람을 항상 사형집행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여느 사형수와는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사형수는 어떤 포부와 정치적 견해와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다 무너져 내립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무기력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합니다. 자신이 가진 소신도 다 뒤집어 버립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칩니다.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며 악을 쓰며 그들을 원망하고 저주합니다. 그리고 살려 달라고, 한 번만 살려 달라고 호소합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가 다 비굴해지고 비겁해집니다.
이런 모습을 매일같이 보았던 백부장이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모습, 그렇게 숨지심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원망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채찍질 당할 때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불법적인 재판을 당했지만 주님은 한마디 말씀도 내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버린 유다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떠나간 베드로도 입에 올리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건넨 몰약을 탄 포도주도 주님은 거부하셨습니다. 모든 고통을 있는 그대로 주님은 다 받아내셨습니다. 이것이 백부장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죽음 앞에 이렇게 의연한 사람이 있다니,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이 무서운 십자가형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소리 질러 아버지와 대화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분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1-2. 영적 품위의 능력
이 고백이 진실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한 번도 하나님의 아들 된 그리스도의 영적인 품격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놀라운 영향력이 백부장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영적 품위를 지키고 살고 있는가, 우리는 격조와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봐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해야 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해야 될 말이 있고 절대로 입으로 내뱉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해야 될 행동과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따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어떤 행동과 어떤 죄와 어떤 짓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행실을 봅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이 그렇게 숨지심을 본 것처럼, 우리는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극한의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영적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내주해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죄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지 마라고, 여기서 네가 한 걸음만 더 가면 죄 짓는 것이라고. 그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영적인 품격을 느낄 수 있도록 살아가야 됩니다.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가 "메두사호의 뗏목"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1840년 작품입니다. 메두사호가 파선났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작은 배에 옮겨 탔습니다. 망망대해입니다. 언제 이들을 구출하러 건져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대개 이런 경우라면 이 작은 배 탄 사람들의 시선은 배 밖을 향해야 됩니다. 대박 큰 배를 향하면서 목을 길게 빼고 언제 큰 배가 우리를 건져줄까, 손에 횃불을 들고 뭔가를 들고 손을 흔들며 나를 살려 달라고 외쳐야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시선은 배 안에 어딘가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배 한가운데 있는 어떤 사람이 들어 올리고 있는 모자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 모자에는 제비가 있습니다. 제비뽑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 제비를 뽑을까요? 언제 살아남을지 모르는 상황, 언제 어떤 배가 와서 우리를 건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먼저 죽을 사람을 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고 살아남겠다는 저들의 의도입니다. 참혹합니다. 들라크루아가 살아갔던 시절 그때는 그런 일이 횡행했습니다. 비일비재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이런 인간의 야만적인 모습을 그림을 통해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 것 같습니까?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이지만, 우리는 극한의 상황에 몰려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자녀로 영적인 순결과 영적인 품위와 기품을 유지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삶을 봅니다. 지금 상황이 몹시 어렵습니다. 교회가 전부 다 손가락질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공동체, 직장, 가정, 일터, 동네 곳곳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영적 품위와 기품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뭔가 달라야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 것 아닙니까?
예수님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적 순결과 품위를 잃지 않아서, 그 선한 영향력이 사람들을 감동케 하는 귀한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여인들의 헌신
두 번째 십자가의 증인들입니다. 여인들입니다. 40절과 41절을 보시겠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께서 십자가 지고 돌아가시는 그 현장까지 함께 따라온 여인들입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정치범이었기 때문에 이 여인들도 사로잡히면 예수님처럼 죽임 당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이 위험한 이 자리까지 함께 와 있었습니다.
2-1. 은혜 입은 자들
왜 왔을까요? 이 여인들이 어떤 이유로 예수님의 곁을 끝까지 지켰던 것일까요?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중에 대표적인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보십시오. 누가복음 8장 2절을 보시겠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마리아는 변방의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여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 취급받을 수 있겠습니까? 남자가 아니라 여성이었고,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일곱 귀신 들린 미치광이였습니다. 사람 취급 받지 못합니다. 그대로 살다가 어디 가서 죽든지 없어지든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녀를 사람 취급해 주셨습니다. 사람으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이방인이고 여인이고 귀신 들린 여인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을 사람답게 살게 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귀한 은혜를 온몸으로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과 놀라운 사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 한 명뿐만이 아닙니다. 함께 그 자리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인 그 자리까지 온 모든 여인들은 주님과 깊은 사연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살려주신 주님, 내가 절망의 구덩이에 있을 때 나를 건져 주신 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고 있을 때 나를 살려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해 주신 우리 주님, 그 주님이 십자가 지고 돌아가시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주님을 따라온 은혜 입은 자들입니다.
2-2. 영적 의리
물론 은혜 입은 자들 중에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도, 도망가 버린 사람도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로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아니었다면 평생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예수께서 그를 불러서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치웠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은 은혜를 행량없이 입었지만 그들 중 한 사람도 여기 남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제자가 누구입니까? 진짜 예수님을 따르고, 진짜 예수님을 추종했던, 정말 참된 제자는 여인들 아닙니까? 이 여인들은 의리 있는 여인들이었습니다. 한 번 받은 은혜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서 십자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증인 된 여인들에게 주님은 귀한 특권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던 여인들, 부활의 참된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자들이 바로 이 여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각자는 지금 오늘 한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각자 주님을 만났던 그 날은 모두가 다 다릅니다. 어떤 분은 시골의 교회, 양철 지붕 아래 마룻바닥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가정에서 학대받고, 동네에서 아무도 나를 사람 취급해 주지 않는데, 교회에 가니 목사님, 전도사님, 교회 성도들이 나를 반가이 맞이해 줍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이 나를 반갑게 여겨 줍니다. 여름성경학교를 통해서 주님을 배웁니다. 예배당 마룻바닥에서 눈물을 흘려 기도하며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나의 죄성을 회개하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만났던 주님, 지금까지 그 주님 붙들고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를 죄악의 현장에서 건져 주신 주님, 나를 사탄의 종노릇 하던 그 자리에서 건져 주신 주님, 그 주님을 만나서 우리는 여기까지 와서 지금 한 교회 공동체에서 믿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욕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교회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통해서 내게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극진하고 놀라운지 너무나 많이 경험했기에,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나에게 부어 주신 크고 놀라운 은혜를 우리 다 몸으로 경험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영적인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 자리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등을 떠밀어도 우리는 그 받은 사랑이 너무 크고 극진해서 교회를 떠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영적인 깊이를 깊이 깨닫고 영적인 의리를 굳게 붙들고 지켜 나가시길 바랍니다. 가장 외로웠던 시절, 주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셔서 아무도 곁에 없었던 그 시각, 주님의 십자가 곁을 지킨 여인들, 주님께서는 그들을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도 함께 부어질 것입니다.
3. 아리마대 요셉의 결단
세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킨 증인입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공회원입니다. 정치적 입지가 있는 사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당돌히"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한 것은 그도 역시 예수와 같은 사람으로 몰려서 처형당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3-1. 위험을 감수한 헌신
그런데 그는 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했을까요? 46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 시체를 달라 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시체를 수습하지 않습니다. 그의 시체를 수습하는 자는 정치범으로 똑같이 몰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내가 수습하겠다고,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나마 스스로의 비겁함을 자책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살아가실 때 내가 예수께 나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땅을 치며,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난 후에라도 내 신앙을 고백하겠다고 결단하고 이 자리에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는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고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새 무덤에 주님을 모셨습니다. 아무도 쓰지 않은 새 무덤에, 돌을 판 무덤에 주님을 모셨습니다.
3-2. 부활의 확실한 증인
세마포를 사 왔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세마포를 예수님의 몸에 둘러쌌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를 자신의 새 무덤에 모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더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염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만져 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죽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이 판 그 무덤에서 걸어 나가셨습니다. 세마포를 벗어 버리고 예수님이 걸어서 나오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염할 때 예수님에게서 생명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서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십자가의 증인이 되었을 때, 그도 역시 부활의 참된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습니까? 우리가 만약 이 땅에서 생명이 다 끝나고 호흡이 끝나고 세상을 떠나고 난 이후에, 나를 아는 내 가족이나 아는 이들이나 내 친구들,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 것 같습니까? 돈에 눈먼, 탐욕에 눈먼 인간이었다. 명예를 좇아 사는 사악한 인간이었다. 가방만 들고 교회 왔다 갔다 하는 가짜 신자였다. 이렇게 평가받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낯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겉과 속이 일치한 사람이었고, 가난하고 연약하고 병든 자들을 향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나누는 사람이었고, 내가 그를 보니 참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겠다. 이런 고백과 칭찬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생명을 다해도 선한 영향력을 널리널리 끼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고, 우리도 여인들처럼, 우리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십자가의 증인이 되어서 영적인 의리를 굳게 지켜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적 품위와 기품을 잃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백부장이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주님, 오늘 우리의 삶이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 삶이, 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의 삶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놀라운 축복의 증인들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도 여인들처럼, 우리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영적인 의리가 있는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은혜 받았으니 그 은혜를 전하며 살도록 도우시고, 한 번 받은 은혜 절대로 그 은혜에서 끊어지거나 버리지 않도록 주여, 우리의 마음을 굳세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