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목격하다 (막 16:1-8)
혈통을 분류하는 전통적인 구별이 있는데, 두 가지 혈통의 구별은 직계와 방계입니다. 직계는 조부모, 부모, 우리 자신, 우리 자녀 세대로 내려가는 직접적인 혈통의 계승을 의미하고, 방계는 직계에서 갈라져 나온 혈통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형제, 자매, 조카 등의 관계가 방계 혈통이라고 부릅니다.
직계와 방계를 왕실 직계, 왕실 방계로 가져가면 구별이 이렇게 됩니다. 왕실 직계는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을 왕실 직계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왕실 방계는 왕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왕실 방계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모든 나라들이 왕실 직계를 세자로 세우고 왕으로 책봉하는 일을 더 선호해 왔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당시에 왕실 직계 가운데에 후손이 없으면 왕실 방계도 그 순서가 되고 당연히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가운데에 왕실 방계가 왕이 된 경우는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첫 번째 왕실 방계로서 왕이 된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 임금이십니다.
선조 임금보다 앞선 왕, 13대 왕이었던 명종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아들이 그만 열네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 이후로 명종은 후사를 가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직계 후사를 얻지 못했습니다. 명종에게는 배다른 형제가 있었는데, 바로 덕흥대원군이었고 그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명종은 결심했습니다. 덕흥대원군의 세 아들 가운데 하나를 왕실 방계 중 하나로 왕으로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하루는 그 세 아이를 한번 불렀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합니다. 왕이 업무를 볼 때 항상 쓰고 다니던 익선관이 있는데, 명종은 익선관을 내려놓고 "너희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써 보아라. 누가 가장 잘 어울리는지 보자"라고 말했습니다. 첫째가 익선관을 씁니다. 둘째도 차례대로 익선관을 썼습니다. 그런데 셋째 막내였던 하성군은 한사코 사양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신하인 제가 어찌 감히 임금님의 익선관을 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차마 이 일을 할 수 없겠습니다." 명종의 마음이 흐뭇해졌습니다.
명종은 이어서 세 아이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임금과 부모 중에 누가 더 중요하냐?" 첫째와 둘째가 대답을 했지만 신통치 않았습니다. 셋째 하성군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임금과 부모는 엄연히 다르지만 충과 효는 하나라고 배웠습니다." 명종의 마음이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래서 명종은 하성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훗날 선조가 됩니다.
선조는 사실 방계 혈통이었고, 그중에서 가장 막내,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조선의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겸손과 탁월했던 지혜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어떤 불가능한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의 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 사람에게 타고난 그 무엇인가가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시 그런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 부활의 첫 증인들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 사건은 역사상 가장 놀라웠던 사건입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분 버림받으신 예수님께서 단 한 분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죽음과 사망 권세, 그리고 죄의 권세를 다 깨트린 분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의 증인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백부장이 있었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있었습니다. 여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세 명의 여인이 어떻게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그 비결을 깊이 배우고 묵상하며, 우리도 이 여인들처럼 함께 되기를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보시겠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1-1. 사랑의 열정
여인들 세 명이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신 지 3일째 되던 날,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이 여인들은 왜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갔을까요?
3일 동안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에 들어가신 그 3일 내내 여인들은 울며불며 통곡하며 가슴 아파하다가, 충동적으로 "우리가 주님의 시체라도 한번 다시 봐야 되겠다" 하는 충동적인 마음으로 주님의 무덤을 향하여 달려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7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예수님께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것을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때부터 그들의 마음속에 "우리가 반드시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그 무덤을 향하여 한번 가 보겠다"는 결단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결코 3일 내내 울다가 충동적으로 일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갔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이 이야기도 살짝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어떤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순전한 나드 한 근을 다 부어드렸습니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의 향유를 다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여인을 책망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해 주셨습니다. "여인을 가만히 두어라. 그런 이상 괴롭게 하지 마라. 이 여인이 나의 장례를 준비하였다."
여인의 순전한 나드 한 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장례는 충분히 준비되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그는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서 수습합니다. 새로운 세마포를 가지고 와서 주님의 시체를 감쌌습니다. 그리고 그는 향품을 충분히 예수님의 시체에 발라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예수님의 시체는 더 이상 향품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인들은 왜 예수님의 무덤에 이렇게 열정적으로 달려간 것일까요? 한 가지 이유밖에 남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뜨거운 열정, 그 열정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 때문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무덤을 향하여 달려간 것입니다.
1-2. 죽음 앞의 두려움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나와 충분히 대화하고 사랑의 온기를 나누고, 손을 잡아서 체온을 함께 주고받았던 사람들, 눈빛을 서로 교환하고 서로의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고 주고받았던 사람이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사건을 겪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버리고 나면 따뜻한 체온과 온기를 주고받았던 온몸은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따뜻하게 말하고 인사하고 주고받았던 눈빛은 더 이상 말할 수 없고, 눈빛을 전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죽음 앞에서 절망합니다.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죽음은 이제는 더 이상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두려움과 절망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렵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절망이 죽음 앞에서는 우리 전체를 감싸고 짓누르는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요한복음 20장 19절이 설명합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여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때 제자들은 문들을 꼭꼭 걸어 잠그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불빛이 새어 나갈까 봐 캄캄한 감옥 안에서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 모여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문을 닫고 있었을까요? 방향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동서남북 다니셨습니다. "너희가 이쪽으로 오라" 하시면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남쪽으로 가자" 하시면 제자들은 주님 따라 남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방향을 제시하고 일러 주시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무력해 보이는 죽음 앞에서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잡혀서 자기들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에 처할까 봐 그대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두려워서 숨어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죽음은 이렇게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겁나게 하고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1-3. 사랑이 두려움을 이김
그러나 여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이 이 여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열정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고 달려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여인들도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떨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모르고 달려간 것입니다.
왜 달려간 것일까요?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보려고, 예수님의 무덤이라도 한번 더 보려고 그들은 어둠과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울고 있지 않고 방향을 잡고 달려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인들이 훌륭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계신 그곳, 방향을 예수님을 향하여 설정하고 그것을 선택하여 달려간 것,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내가 잘못해서, 내가 죄를 짓거나, 내가 실수해서 문제가 생겼다면 그건 내가 감당해야 됩니다. 내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못하고 환경이 나를 이렇게 짓눌러서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가운데 들어 있다면, 이건 우리가 견디기에 무척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청년들은 취업하기가 더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금리는 자꾸만 떨어지고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한번 실직한 사람은 재취업하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사업을 하시거나 영업하시는 분들은 사업 길이 다 막히고 돈줄이 막히고 자금줄이 막혀 있는 이런 상황, 주변에 혹 계시진 않습니까?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경제적인 문제와 인간관계의 문제, 건강의 문제, 수많은 고통스러운 문제가 우리를 힘겹게 하고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절망 가운데 앉아서 제자들처럼 문을 걸어 잠그고 거기서 두려워하고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덤이라도 주님 계신 그곳을 향하여 달려갈 것인가입니다. 제자들처럼 그냥 머물러 있는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여인들처럼 떨치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에서부터 새로운 부활의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여인들은 방향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 주님을 향하여 일어나 달려가는 여인들처럼 오늘 우리의 믿음이 떨치고 일어나는 믿음, 주님을 향하여 발걸음 옮기는 사랑의 열정의 믿음이 우리의 뜨거운 믿음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대책 없이 달려간 믿음
여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 발걸음 가운데, 그들은 사실은 아무런 대책이 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세 여인들이 앞다투어서 달려가며 서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의 돌문을 굴려 주리요?" 이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2-1. 아무런 준비 없이
유대인들의 무덤은 오늘 우리의 무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산비탈에 자연적으로 생긴 굴을 무덤으로 삼습니다. 거기에 시신을 안치합니다. 그리고 그 굴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아서 둡니다. 한 사람을 거기에 묻고, 다음에 또 다른 가족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돌문을 굴려 내고 다시 거기에 시신을 안치합니다. 그런 식으로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그렇게 커다란 돌문을 굴려 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럴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65절과 66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빌라도가 이 무덤을 가만히 둘 리가 없습니다. 경비병을 두었습니다. 돌문을 굳게 닫고 인봉해 버렸습니다. 누군가 와서 시신을 훔쳐 갈까 봐 단단히 조치해 두었습니다.
여인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람을 모아서 돌문을 굴려 줄 힘센 남자들을 대동하고 가지도 않았고, 무기를 든 남자들을 대동하고 가서 경비병과 함께 싸워서 그들을 제거하고 예수님의 시신을 만져보려고 그들은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냥 달려간 것입니다.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여인들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정말 대책 없는 여자들이구나. 차라리 이렇게 할 거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는 게 나았지. 이렇게 달려가서 시신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경비병들에게 체포될 것인데 왜 달려가는 것인가?" 우리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2-2. 완벽주의를 넘어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도 똑같이 완벽주의 콤플렉스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완벽해지지 않으면 일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모든 걸 완벽하게 다 이루어 놓아도 잘 되지 않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A부터 Z까지 모든 걸 완벽하게 다 이루고 나서 그다음 일을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왔던 인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절대로 일이 그릇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작은 데서 문제가 생기고 작은 구멍이 생겨서 일 전체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 적이 없으십니까?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경주하고 준비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누수가 생기고 문제가 생겨서 일을 그르친 경험을 누구나 다 여러 번 해보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벽하다는 건 내 경험상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준비한다는 것, 내 경험상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자신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방향을 주님을 향하여 잡고 달려갔습니다. 아무런 대책 없이. 그런데 그 대책은 주님이 준비하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마음이 중요합니다. 방향이 옳다면 완벽하지 않더라도 한번 도전해 보는 것입니다. 방향이 분명하고 이것이 옳다면 완전하게 준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님, 저는 주님을 믿고 한번 달려가 보겠습니다. 주께서 알아서 해 주십시오" 그리고 도전하고 달려가는 믿음, 그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여인들은 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훌륭한 믿음이었습니다.
2-3. 주님이 예비하심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4절에서 6절을 보십시오.
"눈을 들어 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님께서 돌문을 굴려 놓으셨습니다. 천사를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키실 때 그들의 수가 엄청났습니다. 남자만 60만 명입니다. 여자, 노인,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200만 명이 넘는 대부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을 인도하는 모세조차도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수많은 사람들 어떻게 먹이실 겁니까? 한 끼 식사만 하더라도 엄청날 텐데 이들을 어떻게 먹이려고 하십니까? 양식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왜 묻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멸망시킨 10가지 재앙을 그들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식량이 없어도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 가나안 땅이라는 방향이 올바르고 우리가 그 땅에 순종해서 그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리고성 전투를 떠올려 보십시오. 여리고성은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매일 하루에 한 번씩 성을 돌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돌게 하셨습니다.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완벽하게 승리했습니다. 인간의 전쟁 역사상 가장 완전하고 가장 완벽한 승리가 여리고성의 전투 승리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그 일에 순종하고 걸어가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 백성들을 구원해 내라." 기드온이 군사들을 모았습니다.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다 떠나가게 하고 300명만 남깁니다. 하나님은 300명에게도 무기를 지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지급한 것은 딱 세 가지입니다. 항아리, 횃불, 나팔.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도구로, 칼이나 창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넉넉히 건지고 구원해 내었습니다. 방향이 옳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나머지 면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결하셨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는 오늘 준비되지 않아서 나는 할 수 없다고 그냥 앉아 있지는 않으십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런데 방향이 옳다면 마음을 다해서 전심전력을 다해서 달려가 보십시오. 대책이 없더라도 그 대책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실 것입니다.
2-4. 극소수의 믿음
그런데 이렇게 행하는 사람은 소수 중에 극소수입니다. 벳새다 들녘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사건을 행하실 때 주님께 떡과 물고기를 얻어먹은 사람들이 몇 명입니까? 남자만 자그마치 5,000명입니다. 노인, 여자,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약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떡을 주실 때,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실 때는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에 주님을 향하여 방향을 잡고 떨치고 일어나 무덤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은 단 세 명, 여인 세 명이었습니다. 제가 퍼센트로 계산해 보았더니 0.00015%입니다. 이렇게 극소수에서 이 방향과 열정을 가진 여인들만이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방향이 옳다면 달려가 보십시오. 주께서 예비하시고 준비하실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우리 교회는 많은 성도님들에게 좋은 영적인 공급을 해 주었을 것입니다. 전체 예배 시간을 이용해서 좋은 강사 분들을 모시고 신앙 성장과 성숙을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준비한 것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찬양대를 위해서, 교회학교를 위해서,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 자녀들을 돌보고 기르는 부모들을 위해서.
그런데 지금은 모이는 것이 금기시 되는 시대가 되어서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여기 앉아서 그 우울감에 사로잡혀서 "이제 우리는 예배 이거나 붙들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발버둥치고 영적인 성장과 영적인 뿌리내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이 영적 창고를 짓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전국에 있는 좋은 강사들, 그분들에게 부탁해서 영상을 찍어서 그 영상을 가져와서 온라인 영적 창고에 올려놓습니다. 여러 분야의 좋은 강사들을 모아서, 성도님들이 거기에 접속해서 각자가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은혜도 받고, 우리의 각 분야의 신앙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도 영적 창고를 충분히 활용할 것입니다. 물론 위험 요소도 굉장히 많습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어려운 시대에 과연 이것이 먹힐까? 성도님들이 얼마나 많이 여기에 호응할까? 교회가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 재정을 투입해야 하는데 이 재정 투입한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일을 해야 되는 이유는 방향이 옳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방향을 가지고 달려가 보는 것입니다. 한번 던져 보는 것입니다. 대책 없이 달려가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기름 부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셔서,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 만나고 기쁨을 누리고 모든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놀라운 발전이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의 삶이 불확실한 삶이라 하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그 방향을 제대로 잡고, 그리고 떨쳐 일어나 달려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인들처럼.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소식, 참 사건을 통해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 여인들이 그냥 자기 집에 앉아서 울고불고 통곡하고 "이제는 끝났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부활의 첫 증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경험적으로 알 수도 없었고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들이 일어나 달려갔기에 그들은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3. 먼저 예비하시는 주님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7절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먼저"라는 단어입니다. 먼저. 우리 주님은 먼저 여인들보다 가셔서 돌문을 굴려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천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 계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따라오라고. "내가 먼저 돌문을 굴려 놓을 테니 울지 말고 일어나서 나를 향하여 달려 오라고. 내가 천사를 준비할 테니 너희들이 달려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어라고. 내가 먼저 갈릴리로 가 있을 테니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주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우리가 떨쳐 일어나지 않으면, 방향을 주님을 향하여 정하고 달려가지 않으면, 먼저 일하고 계신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정체되고 신앙은 자꾸만 떨어지고 주님은 나에게서 자꾸만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일으키시는 죽음의 기운, 이 음침한 기운, 사방이 다 막혀 있어서 죽을 것만 같은 이 암담한 기운에서도 방향을 잡으십시오. 예수님을 향하여 방향을 잡고 달려가고 또 달려가시면, 우리 주님이 먼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놀라운 특권과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 부활의 놀라운 기쁨이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향하여 방향을 잡겠습니다. 여인들처럼 대책이 없다 할지라도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겠습니다. 우리가 달려가고 우리가 방향을 잡으면, 돌문을 굴려 놓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경비병도 사라지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부활의 소식을 주는 분도 주님이시고, 먼저 갈릴리에 가서 기다리는 분도 주님이심을 믿사오니, 주님, 우리가 방향을 정하고 달려갈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제자들처럼 사방이 막힌 곳에서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있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이런 상황일 때라 할지라도, 완벽하지 않다 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방향이 옳다면 그 길을 향하여 전심전력해서 달려나가는 믿음의 백성으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 주시고, 부활의 첫 소식, 부활의 첫 열매, 첫 기쁨이 되시는 주님을 만나뵐 수 있는 귀한 역사를 우리 인생에 부어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