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강 / 믿지 아니하니라 (16:9-14)

믿지 아니하니라 (막 16:9-14)

어른들이 요즘 자주 하시는 말씀 가운데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세상이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습니까? 아니면 과거에 있던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습니까?

한 유튜브 채널 이야기를 소개하려 합니다. 이 채널에 들어가 보면 모든 영상이 먹는 영상입니다. 유독 먹는 소리를 강조해서 부각시켜 놓았습니다. 케이크 먹을 때 나는 소리, 과자가 부서질 때 나는 소리, 라면 먹는 소리, 우유 마시는 소리, 아이스크림 먹는 소리, 사탕을 깨물어 먹는 소리, 이런 소리로만 이 채널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채널의 구독자 수가 무려 수백만 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구독자 수가 많으니 당연히 광고가 붙을 텐데, 광고로 인해서 벌어들이는 월 매출이 수억 원 이상이 넘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할머니가 저에게 늘 하셨던 말씀이 밥상머리에서 음식 소리 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식사 예절을 가르치실 때 항상 밥상머리에서 음식 먹는 소리를 내면 상대방이 불쾌하니 절대로 음식 먹는 소리를 내지 말라고 늘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채널에 나오는 유튜버는 얼굴도 보이지 않습니다. 입만 보입니다. 일부러 소리를 극대화시킵니다. 그래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세상이 변해도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한 일간지에 어린 유튜버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어린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튜브 채널인데, 이 채널은 구독자 수가 굉장히 많아서 월 광고 수입이 수십억 원에 해당한다고 밝혔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청담동에 100억 원 이상이나 되는 건물을 샀습니다. 그다음 날 지상파 광고 전체를 담당하는 한 광고 담당자가 자기 블로그에 글을 남겼습니다. "참담하다. 나는 평생 동안 지상파 광고에 몸담았고, 우리 회사는 약 1,700여 명이나 넘는 직원을 두고 있는데, 우리 회사의 광고 매출보다 훨씬 더 많은 광고 매출을 저 어린아이가 올린다고 하니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참담하고 암담하다." 그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의 과거 경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오늘날 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험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과거의 경험을 오늘에 되살려 오늘을 설계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거 경험에만 발목 잡혀 있다 보면 미래를 향하여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활,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내 경험에 의하면 이러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러할 것이다, 이런 추론은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병폐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자신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부활 사건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부활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부활을 나타내고 설명하십니다. 오늘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 살펴보고, 우리의 경험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으로 찾아오시는 그분을 다시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두려워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째 되던 날, 안식 후 첫날 세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대책이 없었습니다. 돌문을 굴려줄 사람도 없었고, 돌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에 대한 대책도 없었습니다. 무작정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경비병도 없었습니다. 한 청년이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천사였습니다. 그가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제자들에게 가서 그가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을 알리라." 여인들은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활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범주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워합니다.

16장 8절 말씀입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여인들의 심리 상태가 어떻습니까?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몹시 놀라 떨며 두려워했습니다. 도망 나와 버렸습니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들의 이런 상태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믿음이 없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걸 믿지 못하다니, 이렇게 두려워하다니, 믿음이 없구나." 우리는 그렇게 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1-1. 나타나신 주님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들 중 대표격인 막달라 마리아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여인들에게 "너희들 믿음이 없구나" 책망하고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직접 나타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마라. 겁내지 마라. 너희들 무서워하지 말고 도망가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했던 예수다. 주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왜 이 여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일까요? 주님이 이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 없음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도저히 인간의 연약한 심성으로는 자신의 경험의 범주를 벗어나는 어마어마한 부활 사건을 받아들일 수 없는 여인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보여주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1-2. 실제적인 신앙

기독교 신앙은 실제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애매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을 마음에 있는 부활로, 기억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활은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살아가시면서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왔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네 인생 그대로 수용하고, 안타깝지만 어떻게 하겠느냐, 그대로 살아가라" 말씀하시고 그저 위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중풍병자가 찾아왔습니다. 중풍병자를 주님은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찾아왔습니다. 주님은 그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38년 동안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누가 그를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낫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방황하고 배회하고 있었던 38년 된 병자에게 주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오려고 하면 돌을 쳐 죽이려고 했던 나병 환자들, 주님은 그들을 만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실제적인 치료의 주님이시고 부활의 주님이심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 이전에 경험하게 하시고, 믿음이 연약한 자를 믿음 위에 굳게 세우는 확실하고 실제적인 신앙입니다. 이른 시간 주님을 만났던 빌립은 주님을 만나고 확신했습니다. 내 친구 나다나엘에게 주님을 전하면 참 좋겠다. 그래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가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우리 선생님이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정말 메시아를 내가 만났다."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 사람이라면서? 나사렛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때 빌립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46절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빌립이 딱 한마디 했습니다. "와서 보라." 무슨 말입니까? 경험해 보라. 나도 너처럼 그런 생각을 가졌는데 경험해 보니 이분이 메시아다. 너도 와서 경험해 보라. 그러면 너도 확신할 것이다.

똑같은 이야기가 요한복음 20장 27절에 나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네 손을 가지고 나의 못 박힌 손을 만져 보라. 네 손을 내밀어서 창이 들어갔다가 나온 내 옆구리를 만지고 넣어 보라.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성으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한 것으로 주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겠거든, 내 손도 만져 보고 옆구리에 네 손도 넣어 보라. 그래서 경험해 보라. 나는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니, 나를 만지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믿는 자가 되라. 믿음을 위해서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주님은 그렇게 여인에게도 그리고 도마에게도 나타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주님 저는 경험에 매여서 저의 경험을 뛰어넘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도마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내 손도 만져 보고 내 옆구리에 손도 넣어 보라",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다시 부활한 예수이니 나를 보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망가지 마라" 말씀하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찾아오셔서 우리의 믿음 없음을 책망치 않으시는 놀라운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누리시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실망한 자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 번째 찾아가신 사람들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이 두 사람은 누가복음 24장의 기록에 의하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입니다. 이들은 왜 낙향하여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었을까요?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들은 실망을 가득 안고 고향으로 가고 있는 길입니다.

이들이 왜 실망했을까요? 이들이 예수님을 어떤 이유로 따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이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기고 로마를 극복하실 분으로 알고 따라갔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통해서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큰돈을 벌겠다고 생각하고 주님을 따랐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통해서 이 악한 세상을 개혁하고 새로운 개혁 군주로 주님을 모시겠다는 마음을 가졌는지,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을 따랐는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실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다 끝났구나,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유독 이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을까요? 그것은 이 두 사람이 실망한 모든 사람들의 대표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다가 실망한 사람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님을 제자로 따르다가 실망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실망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구나. 이제 나는 주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났구나"라고 생각하는 이 두 사람에게 주님은 나타나셔서 "이제 끝이 아니다. 내가 부활했으니 이 부활로부터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다" 말씀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2-1. 예수를 떠나는 자들

오늘도 예수 믿다가 실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인생 역전을 꿈꾸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건강이 회복되기를, 사업이 번창하기를, 가정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내 인생의 획기적인 전기가 예수를 통해서 마련되기를 꿈꾸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오래 해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건강은 자꾸 나빠지고, 가정에 문제는 생기고, 사업은 자꾸 기울고, 그래서 주님을 떠나버립니다. 실망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이렇게 믿고 열심히 따랐는데, 주님 저에게 아무것도 해주시는 것이 없군요." 사랑하는 사람 데려가시고 내 사업은 자꾸만 내려앉고, 그래서 주님을 떠나는 자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이 예수 정신으로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서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세계 질서는 바뀌지 않고, 이 나라는 여전히 악의 구렁텅이로 달려갑니다. 그래서 예수를 떠나는 사람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통해서 새로움을 도모하고,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가 세상보다 더 악합니다. 세상의 각종 악한 것들이 교회에 다 집합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사람들 사이에 시기와 질투와 반목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모든 것이 다 투명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보고 무력감을 느낍니다. 교회가 이렇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구나. 그리고 스스로 교회를 떠나고 주님을 떠납니다.

이 모든 실망한 자들에게, 어떤 이유로 실망했든지, 이 모든 실망한 자들의 대표 선수로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2-2. 다른 모양의 의미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예수께서 이들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는 공생애 때 활동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는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누가복음 24장 27절을 보십시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주님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셨습니다. 길을 같이 걸어가셨습니다. 식탁 교제도 하셨습니다. 길을 가시면서, 식사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이 오로지 말씀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만약에 공생애 때 활동했던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셨더라면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었는데, 분명히 돌아가셨는데." 이런 모습으로 다가오신 주님에게 정신이 팔려서 말씀의 위로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모세의 글에서부터 시작해서 구약이 말한 바 예수님 이야기,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고 다시 살아나실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하나 성경 공부시켜 주셨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누가복음 24장 32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속에 뜨거운 무엇인가가 가득 차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그들은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풀어주실 때, 성경을 알려주실 때, 주님은 실망해서 주님을 떠나 내려가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2-3. 사명의 현장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자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사명의 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찾아와 주셨구나.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구나, 나를 뜨겁게 하시는구나." 솟구쳐 오르는 그 감동을 가지고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주님의 훌륭한 제자로 성실하게 마지막 사명을 감당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주님에게 실망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주님에게 화가 나 있으십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소원하고 원했던 이 모든 것이 하나도 이루어진 일이 없을 때, 우리는 주님께 실망하지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에서 더 이상 희망을 바라볼 수 없을 때 우리는 주님께 실망하고, 사람에게 실망하고, 환경에 실망하고, 상황에 실망하고, 모든 것에 실망해서 주님을 떠나간 분들에게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다른 모양으로 찾아오십니다.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시든지 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먹여주실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불붙게 하고,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용솟음치는 주님의 말씀의 은혜 아래 잠기게 한다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내 마음이 뜨거워서 견딜 수 없게 한다면, 그때 깨달으셔야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구나.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의 위로로 나를 찾아오셨구나."

그때 우리는 주님께 고백하셔야 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제가 사명의 현장을 떠나서 다른 길로 가려고 했던 저를 다시 불붙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열심히 주님과 함께, 이것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과 새로운 시작임을 믿고 깨닫고 이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셔야 됩니다. 실망해서 내려가는 자들, 이 모든 자들에게 주님은 오늘도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는 사실, 그 말씀하시는 분이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위로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완악한 자에게

세 번째로 주님께서 찾아가신 사람들은 11명의 남겨진 제자들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은 나머지 열한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앞서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대하신 것과 사뭇 다르게 대하십니다. 이들을 꾸짖고 책망하셨습니다. 왜 이들을 꾸짖고 책망하셨을까요?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주님이 계신 모습 그대로 보여주셨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는 차근차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일러서 마음을 뜨겁게 역사해 주셨는데, 왜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열한 명의 제자를 찾아가서 책망하신 것일까요?

3-1. 책망하신 이유

이것은 이들이 3년 동안이나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3년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 고난받을 것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과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고 와서 알려준 막달라 마리아의 말도 믿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와서 제자들에게 들려준 그 말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호되게 꾸짖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의 부활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일까요? 14절 말씀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서였습니다.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있고 완악해서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 완악한 마음을 로마서 2장 5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고집"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완악한 것과 고집은 헬라어로 어원이 같습니다. 스클레로테스(σκληρότης), 굳은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콘크리트 바닥처럼 굳은 마음, 이 고집스러운 마음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완악한 마음으로 굳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3-2. 경험에 갇힌 마음

그들은 무엇에 완악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고집스러운 마음으로 회개하지도 않고 돌이키지도 않았을까요? 자기들 경험으로는 지금까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믿고 따라갔던 우리 선생님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그분도 결코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3년 동안 우리에게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내 경험으로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바로는, 부활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은 완악해져 있었습니다. 고집스럽게도 그 마음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온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부활을 증거해 줘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이 그들을 호되게 책망하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는 무엇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까? 21세기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된 이런 세상에 2천 년 전 성경 이야기는 하나도 믿지 못하겠다, 그런 마음으로 완악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경험상 절대로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주권자이십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어떤 일도 주님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일어나는 일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고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내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믿지 않고 있다면 주님이 오셔서 책망하실 것입니다.

결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라

주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울고 있는,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부활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은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고 실제적으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 실망해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고 내려가고 있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는 주님이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나하나 풀어주셨습니다. 3년 동안 그토록 따라다니고도 믿지 못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있던 제자들에게는 주님이 찾아오셔서 책망하고 꾸짖어 주셨습니다.

각양 다르게 나타나셨지만 중심은 단 한 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건, 우리가 어떤 믿음의 상태에 있건,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마음을 기경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찾아오시면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시고 만나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우리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어 나가시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과거 경험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을 우리는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열한 명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각양 다양하게, 각자의 형편에 따라 주께서 우리의 믿지 아니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오셔서 때로는 보여주시고, 때로는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어떤 이에게는 책망하시고 꾸짖어 주시면서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주님, 이 놀라운 구원의 주님이 오늘 우리를 찾아오실 때, 마음 문 열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는 믿음을 허락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과 함께 우리의 무너진 인생을 새롭게 세워가며, 우리의 연약한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