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막 16:14-20)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 어느 누구도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자랄 때까지 부모의 돌봄을 받습니다. 성장하며 주변 사람들과 선생님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상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아무리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재능을 알아봐 주고 꽃피우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그 재능은 사장되고 맙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재능을 활짝 꽃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을 꽃피웠던 미켈란젤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어머니는 몸이 몹시 약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여섯 살 때 유모의 손에 맡겼습니다. 유모는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시골에 가서 키웠습니다. 그런데 유모의 남편이 채석장에서 일하는 석수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미켈란젤로는 조각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예술혼이 살아 있음을 그는 어려서부터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열 살이 지나서 그는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옵니다.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피렌체가 당시 상업과 금융업이 활발했던 도시였기 때문에 아들이 금융업을 통해서 돈을 많이 벌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가 예술적인 재능을 풍성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린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메디치 가문의 적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은 유럽 전체에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가문은 유럽 전체의 금융업과 은행업을 한 손에 쥐락펴락하는 가문이었습니다. 이 가문의 로렌초가 바로 미켈란젤로의 후원자가 됩니다. 놀랍게도 그는 열다섯 살인 미켈란젤로를 그의 가문의 양자로 받아들입니다. 이때부터 미켈란젤로의 인생에 탄탄대로가 열렸습니다. 마음껏 후원해 주었습니다. 마음껏 배우도록 해주었습니다. 원하는 만큼 조각하고 원하는 만큼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뒤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결과 미켈란젤로가 만들어낸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비드 상이 그러하고,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그러하고,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인 천지창조가 역시 그렇습니다. 만약에 미켈란젤로의 인생에 로렌초가 없었더라면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위대한 예술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그의 재능을 알아봐 주고 마음을 다해 후원해 준 로렌초 데 메디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이렇게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도우심을 받게 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도우시고 함께 역사하신 이야기의 기록입니다. 마가복음의 첫 시작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의 시작을 마가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복음의 시작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마가복음 1장 12절에 보면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셔서 그분을 훈련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은 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끝나는 16장에 보면, 그렇게 보냄 받으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함께하겠다고. 그 함께하시는 역사가 바로 오늘 말씀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복음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신 것처럼, 오늘도 부활하신 권능의 주님께서는 교회를 보내시고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오늘 그 과정과 역사의 기록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주님의 책망
먼저 14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러라."
이 말씀은 지난주에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을 왜 꾸짖고 책망하셨을까요? 마음이 완악한 것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다는 것은 부활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상 부활하신 분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마음이 완악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심지어 부활을 경험한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찾아오셔서 열한 명의 제자들을 아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1-1. 책망의 의미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왜 제자들을 책망하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떤 자들을 책망하실까요? 가능성 없는 자들은 아예 책망하지 않습니다. 고쳐서 사용하기 원하는 자들을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아직도 희망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그들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심판 중에 가장 무서운 심판이 어떤 심판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1장 2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마음에 상실한 마음대로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래, 너 뜻대로 해라. 너 원하는 대로 해라. 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니까 그냥 그대로 살아라." 하나님은 그렇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것이 심판 중에 가장 무서운 심판, 바로 유기의 심판입니다.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냥 던져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꾸짖고 책망하셨습니다. 가능성을 보시고 고쳐서 사용하시려고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1-2. 책망을 받는 태도
그런데 그다음 문제는 이제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그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면, 마음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요? 예수님은 베드로도 책망하셨고 유다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책망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까지 책망하셨습니다. 아주 심한 책망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책망입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의 책망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훗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난 이후에 닭이 세 번 울자, 그는 곧 통곡하고 엎드립니다. 그리고 돌이킵니다. 주님의 책망이 그의 삶에 약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돌이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책망을 받고 꾸지람을 받고 다시 돌이켜 회복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반면 유다는 달랐습니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고자 하는 마음, 돈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그릇에 나와 함께 손을 넣는 자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몰랐지만 유다는 알았습니다. 자기가 그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돌이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암시와 그 말씀을 애써 부인하고 무시합니다. 그리고 자기 원하는 대로 해버렸습니다. 무시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을 팔기로 결정하고 은 삼십을 받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이 그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받아들이는 자의 태도에 의해서 이렇게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1-3. 말씀을 통한 책망
그러면 오늘 한 가지 질문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님은 직접 책망하셨습니다. 찾아가서 책망하시고 부활하셔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게 책망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순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한 가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매일 책망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존재 자체가 완악하고 연약하고, 사탄이 우리를 죄로 이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찔림을 받지 않으면, 말씀의 거울에 나를 벌거벗겨 놓고 그 말씀의 거울 앞에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 버릴지 모르는 그런 연약한 인생입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말씀 듣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한 달에 한 번 말씀 들어서는 부족합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마음이 완악해져서 말씀에 예민하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찌르는데도 그 찔림이 내 영혼 깊숙이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같이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세워야 됩니다. 지난 하루 내가 어떻게 잘못 살았는지 말씀으로 나를 복종시키고, 얼룩이 묻어 있으면 얼룩을 닦아내고, 기우뚱한 모습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그 모습을 다시 곧추세우고, 바르게 세워서 주님 앞에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살 길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책망하십니다. 그 책망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해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복음 전파의 사명
주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이유가 바로 15절에 나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것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을 세워서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도록 사명을 주시기 위한 것, 오직 이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제자들을 꾸짖지 않고 책망하지 않아서 그들이 삐뚤어진 상태로, 영적으로 어긋난 상태로 파송받았다면 하나님의 복음 자체가,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복음이 왜곡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반듯하게 세우기 위해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꾸짖으십니다. 반듯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2-1. 제자 훈련의 목적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삼 년 동안 하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역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 사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입니다. 십자가를 온전히 지셨습니다. 두 번째 사명은 제자들을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삼 년 동안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은 제자들을 훈련시킨 일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자들을 불러내셨습니다. 그다음부터 그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주님의 훈련의 목적은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기 좋아하는 제자들, 서로 누가 크냐 싸우는 제자들을 낮은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제자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어린아이, 늙은 여인들, 세리, 창녀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낮은 자들,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오셨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하늘나라, 천국 말씀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가족관, 물질관, 종말의식, 이 모든 것들을 제자들에게 말씀을 담아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훈련시켰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지어서 파송도 했습니다. 나가서 전해 보라,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해 보라, 두 명씩 두 명씩 짝지어서 세상 가운데로 능력을 주어서 보내셨습니다. 연습시킨 것입니다. 예행연습 시켰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삼 년 동안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수렴되어 있습니다.
2-2. 교회의 사명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가져다줍니까? 주님께서 이들을 훈련시킨 이유와 목적은 단 한 가지, 복음 전도자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교회가 섬세하고 교회가 정교하고 교회가 알차게 성도들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가운데로 보내야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는 적어도 제자들처럼 이렇게 훈련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누구나 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무나 전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거듭남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이 생명의 말씀을 감히 입에 담아서 저 이웃들에게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크고 귀하고 놀라운 사랑을 내가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영혼에 대한 간절함과 소중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역사 속으로 우리 교회들의 삶을 보면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배당을 크게 지어 놓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가서 누구나 데려오십시오. 아무나 데려오십시오. 예배당을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나 데려오십시오." 그랬더니 아무나가 아무나를 데려왔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습니다. "내가 체면이 있으니, 내가 교회 충직인데 제발 내 얼굴을 봐서라도 교회 가서 1시간만 앉아 있어 주십시오. 내가 일당을 쳐드릴 테니 교회 가서 1시간만 앉아 있어 주십시오." 이런 헤프닝,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교회 공동체 안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가짜 복음, 사이비 복음, 싸구려 복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이비 이단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교세라고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풀려진 교인들을 교회의 자랑거리로 여기고 지금까지 그것을 붙들고 살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복음 전도자,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열두 명을 부르셨는데 한 사람은 실패했습니다. 남은 열한 명을 위해서 주님은 찾아가서 그들을 심하게 질책하고 꾸짖고 다시 반듯하게 세워서 세상 가운데로 보내고 계십니다. 이것이 복음 전도자를 세우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교회도 역시 이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아무나 전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전도할 수 있지만, 적어도 주님을 만나고 바르게 훈련받고 반듯하게 인격을 가진 사람이 주님의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으로, 삶으로 전할 때 그때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3. 능력의 약속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3-1. 열매의 부담을 내려놓으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제자들에게 사역의 열매에 부담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희들은 훈련받았고 책망받아서 반듯하게 되었으니, 나가서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결과는 나에게 맡겨라.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구원 받을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 받을 것이니, 너희들은 열매를 신경 쓰지 마라. 누가 어떤 열매를 가지느냐, 어떤 사람이 큰 교회를 개척하고 큰 교회를 만들어 가느냐, 여기에 신경 쓰지 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사역자로 보냄을 받으면 부담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이런 부담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후원을 받고 선교 사역에 헌신했는데, 빨리 가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크게 지어야 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아 부담이 몹시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파송의 정신은 원래가 이런 정신입니다. 부담 갖지 마라. 너는 가서 복음을 전하기만 하라. 열매는 내가 책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셔서 우리에게 부담을 갖지 않도록 말씀하십니다. 이 마음을 우리도 함께 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2.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
이어서 주님은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7절과 18절을 보십시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한마디로 말하면 능력을 주시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에게 능력을 줄 테니 이 능력 받아서 마음껏 복음 전도에 사용하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부담 갖지 말라 하시고, 능력 주겠다 하시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3-3. 생활의 염려를 버리라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빠져 있다는 걸 느낍니다. 아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었던 제자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느끼지 못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무엇이 빠져 있습니까? 예수님이 끝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그들의 생활에 대한 책임입니다. 너희들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쓰임받을 때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무엇을 입을 것인지, 어떤 집에서 잘 것인지, 어떤 것을 마실 것인지, 너의 후원자는 누가 되어 줄 것인지, 주님은 이 약속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샅샅이 살펴보고 다 읽어 보아도 이 말씀을 주님은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왜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주님은 왜 복음 전도자의 후원 문제를 단 한 번도 거론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거론할 이유조차, 거론할 가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보내신다는 전제 속에 내가 너를 책임진다는 것이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부담 갖지 말라 말씀하시고, 능력 준다고 말씀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 잠잘 곳, 너의 후원 문제는 주께서 전혀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누구나 염려가 됩니다. 걱정이 됩니다. 어떻게 하지? 가라고 하시니까 가기는 가야 될 텐데, 그런데 어떻게 먹고 살까? 출애굽하고 파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역시 그것이 고민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을 자기들 눈으로 직접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대국 애굽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어떻게 심판하셨는지를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마른 땅이 되어서 그 땅을 밟고 건너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홍해가 닫혔습니다. 뒤쫓아 오던 애굽의 군대가 거기에 수장되었습니다.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홍해가 닫힌 이후에 단 삼 일 만에 그들은 마실 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에서 24절입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마라의 물이 썼습니다.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지 삼 일 만에 그들은 모세를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6장에 보면 먹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들의 문제, 인생의 문제는 먹는 것 마시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출애굽하게 해주신 것은 너희의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맛있는 것, 다 포괄적으로 책임진다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고 때마다 심하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고,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고, 제자라고 자처하는 나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30절과 31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들풀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어지는 32절에 보면 이 모든 것들은 이방인이 염려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은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좋은 집에 사는 것, 좋은 차를 타는 것, 앞으로 어떻게 더 좋은 것을 먹을까, 더 많은 것을 가질까,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복음 전도자들에게 먹는 것, 입는 것, 맛있는 것을 염려하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내보내실 때는 분명히 책임진다는 전제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3-4. 교회와 성도의 사명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귀중한 교훈을 깨닫습니다.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걱정해야 됩니까? 어려운 상황을 통해서 교회가 재정을 걱정해야 됩니까? 교회 돈 문제를 걱정해야 됩니까? 교회가 걱정해야 될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인가?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발버둥 치고 분투하고 있는 교회인가? 그 일을 위해서 우리 교회가 쓰임받고 있는가? 교회는 한 가지만 고민하면 됩니다. 그 일을 고민하고 복음 사역을 위해서 성도들을 훈련하고 파송하고 길러내고,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애쓰고 힘쓰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먹이고 입히고 돌보실 것입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고 성도입니다. 성도가 먹는 것, 입는 것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살고 있는가? 말씀 붙들고 나아가고 있는가? 오직 그것 한 가지만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우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능력과 이 놀라운 복음의 능력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주님의 말씀의 능력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함께 역사하시는 주님
제자들은 주님께서 보내신 그 보내심을 믿고 파송받았습니다.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나신 후에 제자들은 파송받아서 나가서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록합니까? 주께서 함께 역사하셨다고. 승천하신 주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대로 반듯하게 훈련받고 책망받아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함께 역사하셨습니다. 포괄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역사하셨을까요? 건강이 약한 자들에게는 건강의 축복을, 물질이 없는 자들에게는 물질의 복을,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는 능력의 복을,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통해서 함께 역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무일푼으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울을 후원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후원했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서도 빌립보 교회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복음 전도자로 살았지만 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넘치게 그를 후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받은 후원금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기근을 구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헌신된 자에게 주님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제자들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마가복음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아들은 성령을 통해서 광야에서 훈련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을 삼 년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고, 그들을 책망해서 반듯한 인격의 사람을 만들어서,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은 우리를 훈련시킵니다. 교회를 훈련시킵니다. 이 악한 세상에 우리 교회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도록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내가 너와 함께 역사하겠다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악한 세상에 주님은 우리 각 성도들을 훈련시킵니다. 주님이 함께 역사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세상 가운데로 나가서 복음 전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입을 열어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훌륭한 전도자의 사명을 믿음으로 잘 감당하시는 모든 성도님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