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1 / 입장차이 (눅10:25-37)

입장차이

본문: 누가복음 10:25-37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서 있는 자리, 곧 입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자리와 입장에 따라 말과 행동과 판단, 심지어 생각까지 다르게 나타납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딸을 가진 부모의 입장과 아들을 가진 부모의 입장이 다릅니다. 명절 당일에 딸을 가진 부모는 딸과 외손주들을 보고 싶지만, 아들을 가진 부모는 며느리를 친정에 보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같은 내용을 바라보는 서로의 입장 차이가 이처럼 극명하게 갈라집니다. 정치적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이슈를 바라보는 여당과 야당의 입장이 다릅니다. 여당이었을 때 찬성했던 것을 야당일 때는 반대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논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늘날까지 유명한 것이 예송(禮訟) 논쟁입니다. 이른바 예절 논쟁이라고도 하는데,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의 어머니 조대비가 상복을 몇 년 동안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오랜 시간 대립했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서인 세력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사대부의 예만 갖추어 어머니 조대비가 1년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남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허목(許穆)을 중심으로 한 남인 세력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의 정통성을 계승했기 때문에, 어머니라 할지라도 신하의 예를 갖추어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두 입장이 극명하게 대립하여 오랫동안 다투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쓸데없는 상복 논쟁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서인과 남인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었습니다. 서인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싶었습니다. 왕권의 약화를 통해 신하들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상복을 1년만 입게 함으로써 왕권이 별것 아닌 것처럼 백성들에게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반면 남인은 달랐습니다. 새롭게 왕이 되는 자를 등에 업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여 자기 정파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송 논쟁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예송 논쟁 가운데 백성이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백성의 의견은 외면당했고, 정파의 이익과 붕당의 이익만을 위해 다툼을 반복했습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들의 삶에 무엇이 유익한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자기 입장에 매몰될 때 나타나는 폐해입니다.

시험의 의도, 본질의 망각

오늘 본문을 보면 한 가지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입장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나의 입장도 너의 입장도 아닌, 각자가 속한 공동체의 입장도 아닌, 하나님의 입장 곧 본질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들려주고 계십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5)

이 사람이 찾아온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시험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크페이라조'(ἐκπειράζω)로, 접두사 '에크'가 붙어 '철저하게 시험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발가벗기고, 수치와 무안을 안겨주려는 의도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고 율법교사가 파견되었고, 그는 바로 그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 속에는 유대인들이 지닌 구원과 영생에 대한 생각과 개념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어떤 일을 해야, 어떤 행위를 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구원과 행위를 강하게 연결시켰던 것입니다.

순수한 의도가 아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나온 자들을 다루시는 예수님의 방법은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그가 율법교사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7)

정확한 대답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율법의 내용과 정신, 그 핵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십계명의 두 돌판 가운데 첫째 돌판이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 돌판이 이웃 사랑임을 그는 정확하게 알고,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통해 돌려놓고 싶으셨던 것은 본질이었습니다. 영생을 물었지만 예수님은 다시 본질로 돌려놓으셨고, 그 본질이란 다름 아닌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나왔기에,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눅 10:29)

이것은 뜬금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웃의 범위를 자기들 나름대로 정해 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이웃이라고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할례받지 않은 사람은 이웃의 범주에 포함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로마인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식민지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할례받은 백성으로서의 선민 의식을 강하게 품고 있었습니다.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웃이란 그들 동족인 유대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은, 평소 예수님의 성품과 행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웃의 범위를 확장하시면 그것을 빌미로 걸고넘어지려는 의도였습니다. 주님은 이 질문을 받으시고 역시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붉은 바위의 길, 드러난 시대의 민낯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0)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말레 아둠밈'(Maaleh Adummim)이라고 불렀습니다. '붉은 바위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아둠'이라는 말 자체가 '붉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그 땅은 산화철 성분이 많아 토질이 붉게 보이고, 바위도 붉은 빛깔을 띱니다. 그래서 그 길을 '붉은 바위로 가는 길'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시 과학적 지식이 없었던 사람들은 강도가 출몰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당한 사람들의 피가 땅을 적시고 바위를 적셔서 붉은 바위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이름은 역설적으로 그 시대 그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가난했습니다.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강도가 되었습니다. 길을 떠나는 여행객들의 재물을 빼앗고, 돈이 없으면 사람을 찔러 죽이거나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 시대가 이처럼 혼란스러웠다는 증거입니다. 반면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권력자들은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헤롯(Herod) 권력과 로마(Rome) 권력에 기생하며 살았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힘들고 어려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레 아둠밈'이라는 그 길의 이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시대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실 때,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피부에 크게 와닿았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 길을 여행하다 강도를 만나 재물을 뺏기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칼에 찔리기도 하고, 거의 죽게 된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율법의 울타리에 갇힌 자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거의 죽게 된 사람 곁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지나갑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1-32)

우리는 이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면서 분노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이 죽었으면 가까이 가서 사망했으면 가족을 찾아주고, 가족이 없으면 장례를 지내 주는 것이 제사장과 레위인의 의무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그 생명을 보전해 주고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 제사장과 레위인의 의무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두 사람 모두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며 우리는 이 사람들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그러나 레위인과 제사장, 그때 그 곁을 그냥 지나갔던 두 사람을 오늘 이 자리에 불러놓고 "당신 왜 이런 행동을 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이 사람들은 당당하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잘못이 없습니다. 율법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레 21:1)

죽은 자를 만짐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레위인 중에서 제사장이 세워지기 때문에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모두 이 율법의 적용을 받았습니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나 이 율법대로 행한 것입니다. 혹시 다가가서 이 사람이 죽은 시체이면, 사망한 상태이면, 그를 만져서 자신이 부정해질 수 있기 때문에, 율법 때문에 하지 못했다고 그들은 항변할 것입니다.

그가 살아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으나 죽은 상태라면 문제가 더 심각해집니다. 사망한 상태라면 레위기 율법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아론의 자손 중 나병 환자나 유출병자는 그가 정결하기 전에는 그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의 부정에 접촉된 자나 설정한 자나 무릇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벌레에 접촉된 모든 사람과 무슨 부정이든지 사람을 더럽힐 만한 것에게 접촉된 자 곧 이런 것에 접촉된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니 그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그 성물을 먹지 못할지며" (레 22:4-6)

부정한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중에 시체에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 자는 저녁까지 정결함을 얻지 못하고, 물로 정결 예식을 갖춘 후에야 성물을 먹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 길을 지나가고 있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공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면, 예루살렘에서 임무를 받고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면, 길가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만졌는데 그가 사망한 사람이라면, 그날 하루 일정을 모두 망쳐 버리게 됩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여리고에 가서 사명을 받은 일이 있는데, 시체를 만짐으로써 어떤 일도 행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하루 일정을 온전히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물을 먹지 못하고 성물에 손대지 못한다는 것은 제사장으로서 레위인으로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유히 그 자리를 빠져나갔습니다. 어떤 양심의 가책도 가지지 않은 채, 어떤 마음의 짐도 지지 않은 채 지나간 것입니다. 말씀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으니까, 나는 제사장이고 나는 레위인이기 때문에, 저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길을 가는 것이 훨씬 이롭고 유익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나 버린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이들은 제사장 집단, 레위인이라는 집단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편적 인간의 가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가치, 예수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사랑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집단의 편견과 그 가치에만 사로잡혀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 입장에서 보면, 레위인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사람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편견을 깨고 본질로 돌아간 사람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유유히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지나갑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3-35)

사마리아 사람은 어떤 자였습니까? 역사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벌레 취급, 개 취급을 당했습니다. 같은 동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 비극 때문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기원전 721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Assyria)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그때부터 혼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째로 차단해 버렸습니다. 남쪽 유다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북쪽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북쪽 사람들도 남쪽 유다로 올 때 아무리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오염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전하시던 그때까지 약 750여 년 동안 사마리아 사람들은 멸시받고 천대받으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사람이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을 구해줄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멸시당하고 지금도 멸시받고 있는 처지에, 750년 동안의 한과 설움이 뼈에 사무치게 서려 있는데, 이 사람을 왜 도와주어야 합니까? 사마리아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도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돕다가 시간을 지체하다 근처에 숨어 있는 강도들에게 다시 표적이 될 수도 있는데, 빨리 지나가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았습니다. 보편적 사랑에 입각하여 그 사람을 돌보고, 가까이 가서 주막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살펴주었습니다. 데나리온 둘을 주었습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가 뼈 빠지게 이틀 동안 일한 모든 돈을 주막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치료비로 쓴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부탁합니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십시오. 돈이 더 들면 내가 다시 돌아와서 그 돈을 갚겠습니다." 이렇게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하고 싶으셨던 말씀은, 우리에게 각자가 처한 입장과 위치와 자기 자리가 있으나 그 자리의 틀을 깨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가 한 자리에 서 있다 보면 그 입장과 시각에서만 세상을 보고, 사태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편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스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자기도 알지 못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편견인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편견인데, 정작 본인은 편견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들은 제사장 집단과 레위인 집단이라는 동류 의식에 빠져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편견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말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피해를 당해온 사마리아인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적대시하는 그 편견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는 편견을 깨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랑의 가치에 입각하여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랫동안 그 집단과 그 자리에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편견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지도자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하루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던 베드로가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을 봅니다. 보자기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여러 짐승이 있었습니다. 네 발 달린 짐승도 있고, 기는 것도 있고, 날개 달린 짐승도 있었습니다. 공통점이 있었는데, 레위기 율법에서 부정한 짐승이라고 먹지 말라 금지한 짐승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일어나 잡아먹으라." 베드로가 거절합니다. "하나님, 저는 한 번도 부정한 짐승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유대인입니다. 절대로 먹지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소리가 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데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4-15)

베드로는 이 일 후에 고넬료의 집에 갑니다. 이방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설교하고 말씀을 전하고, 성령이 임한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베드로는 뼛속 깊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였습니다. 그가 이런 편견을 가지고 목회를 했다면 그 교회는 유대인 공동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누구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음을 하나님께서 이 환상을 통해 보여주시고, 그가 가진 유대인으로서의 편견의 틀을 깨게 하셨습니다. 너는 유대인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이요 목회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목회를 오래 하다 보면 목회자로서 가지고 있는 시선과 편견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자의 눈으로만 성도들을 바라보면 그 안에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헌신을 강요하고 봉사를 강요하고 헌금을 강조합니다. 성도들이 이 어려운 세상과 시기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피지 않고 눈여겨보지 않은 채 여러 가지를 강조하다 보면 그 안에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랫동안 중직자로서 교회를 섬기다 보면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 초신자들의 신앙의 모습이 탐탁치 않습니다. 정죄하기 쉽습니다. "나는 처음 믿었을 때 저렇게 살지 않았는데, 나는 청년 때 저렇게 나태하게 하지 않았는데"라며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다가 결국 문제가 커집니다. 시어머니의 시각에서 며느리를 보면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며느리 시각에서 시어머니를 보면 세상에 그렇게 완고한 사람이 또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입장과 자기 위치를 내려놓고, 본질인 사랑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원만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시는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난하기 위함도 아니요, 실천을 강조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우리의 껍질을 깨고 본질인 사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다 보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과 함께 믿음으로 동행하다 보면 영생은 당연히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는 질문은 본질이 뒤바뀐 질문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던 제사장과 레위인, 그 공무를 수행하는 것은 잘했을지 몰라도 앞뒤가 바뀌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그들은 행하지 못했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36-3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말씀은 본질적 가치, 복음의 입장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살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위치와 입장의 편견을 내려놓고 복음과 본질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처럼 그들의 동류 집단의 가치에 매몰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가졌던 편견과 자기 주장의 틀을 깨게 하옵소서. 사람을 볼 때, 상대를 볼 때, 세상을 볼 때, 교회를 볼 때 오직 사랑의 가치로, 본질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가 지금까지 편견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시고, 이제 우리가 다시 복음의 본질과 가치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