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염소
본문: 마태복음 25:31-46
1964년 미국 뉴욕에서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라는 여인이 강도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건 초기에는 단순 강도살인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2주 뒤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가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미국 전역과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제노비스가 살해당할 당시 아파트에서 무려 38명의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격자들 가운데 그녀를 도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38명 중 누구 하나 신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사회는 경악했고, 전 세계인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분노하며 저마다 해석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에 주목한 사회심리학자들이 한 가지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실험 참가자들을 대기실에 앉혀놓고 통풍구를 통해 연기를 주입했습니다. 혼자 있었던 사람은 2분도 채 되지 않아 연기를 발견하고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혹은 세 사람, 그 이상의 그룹으로 있었던 사람들은 신고 시간이 현저히 늦거나 아예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방관자 효과라 명명했습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내가 말리지 않아도, 내가 나서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할 텐데 왜 내가 그 일에 끼어들어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심리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2021년 10월 13일 밤, 미국 필라델피아(Philadelphia) 교외 열차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한 여인이 노숙인 남성으로부터 약 8분간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 객차 안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그녀를 돕지 않았습니다. 말리지도, 신고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기까지 했습니다. CCTV로 상황을 살피던 직원이 경찰에 신고하여 사건이 일단락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미국 사회에만 일어나겠습니까? 우리 사회에도, 우리 주변에도, 나 자신이 방관자로 살아가는 일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종말 심판의 자리에서 양으로, 선을 행하지 않은 사람은 염소의 자리에 놓인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과연 나는 종말 심판의 자리에서 어디에 서게 될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양의 자리, 염소의 자리,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중간지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1)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종말에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하시는 일은 심판입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종말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 승천하신 이후 재림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천 년 동안 오지 않았는데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서 예수님께서 종말에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종말에 어떤 방식으로 심판하실 것입니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2-33)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예수님 당시 유대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돌보는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낮에는 양과 염소를 함께 섞어 방목합니다. 산과 들을 다니며 풀을 뜯어 먹도록 그냥 풀어놓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양은 양의 우리에, 염소는 염소의 우리에 각각 넣어둡니다. 생활습관과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양의 우리는 오른편에, 염소의 우리는 왼편에 두었습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오른편과 왼편을 구분했을까요?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정면을 동쪽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해가 뜨는 곳이 동쪽이기 때문입니다. 정면을 동쪽으로 보았을 때 오른쪽은 남쪽이 되고, 왼쪽은 북쪽이 됩니다. 양들은 남쪽 자리에, 염소는 북쪽 자리에 둔다는 뜻입니다. 남쪽은 상징적으로 따뜻하고 온화한 곳을, 북쪽은 차갑고 어두운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양들을 남쪽, 따뜻하고 온화한 곳에 두었을까요? 성경에서 양은 순결을 상징하며, 이사야 선지자 시절부터 양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Messiah)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양은 종말 심판의 오른쪽, 따뜻하고 온화한 남쪽의 자리를 차지하고, 염소는 북쪽의 어둡고 차가운 자리에 놓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양의 자리도 있고 염소의 자리도 있지만,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안전한 곳이 중간지대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한 채, 결정적인 순간까지 유보적인 자세로 살아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한쪽 발은 세상에, 한쪽 발은 하나님께 두고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세상에서 마음껏 즐기며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 종말이 올지, 지금 당장 역사의 종말이 임할지, 내가 지금 당장 하나님 앞에 갈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호령 소리와 궁중의 나팔 소리로 당장 공중 재림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스스로 결정할 때를 정해놓고 유보적 상태로 양다리를 걸치며 살겠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중히 선언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수 24:15)
여호수아는 하나님 곁으로 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면서 혼합 종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동시에 가나안 땅의 농경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도 섬겼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현실이 가슴 아팠습니다. 이제 곧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모든 백성을 불러 고별 설교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든지 이방의 헛된 신을 섬기든지 오늘, 지금 택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언제까지 판단을 유보하며 양다리를 걸치고 살려고 하느냐, 종말 심판의 때에는 양의 자리와 염소의 자리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다리를 걸치고 살다 심판이 임하면 하나님은 그런 자를 염소의 자리로 밀어놓으실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재물로 대표되는 것이 세상의 기쁨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며 양다리를 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결단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심판의 자리에 양의 자리도 있고 염소의 자리도 있지만, 중간의 자리는 없습니다. 양다리를 걸치는 자에게 우리 주님은 반드시 "너는 염소"라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양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참된 믿음이 빚어내는 자연스러운 행함
그렇다면 양과 염소는 어떤 기준으로 구별됩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5-36)
한마디로 잘 섬긴 사람, 선을 베풀고 행한 사람이 양의 자리에 선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염소의 자리에 서는 사람은 어떤 자들입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2-43)
선을 행하지 않은 자들이 염소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은 종말에 당할 심판을 다루는 본문입니다. 구원받는 자들은 양의 자리에, 멸망으로 가는 자들은 염소의 자리에 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본문이 행위구원을 긍정하는 것처럼 읽힌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바는 분명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셨고,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선언하셨으며, 사도 바울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증거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도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천명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왔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은 마치 행위구원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본문을 더 깊이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37-39)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어느 때에"라는 말씀입니다. 선을 행한 의인이 자기도 모르게, 내가 어느 때 누구를 도왔는지도 모르게, 그 도움과 행실이 자연스러웠다는 뜻입니다.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은 결코 숨길 수 없습니다. 걸어 다니면 삐져나오게 마련입니다. 어떤 공동체 속에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랑을 감출 수 없습니다. 눈빛으로도, 말투로도, 서로 간에 풍기는 분위기로도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임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도 감출 수 없고, 주머니 속 송곳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이 진짜라면,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행함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믿음, 가짜 믿음, 거짓된 믿음, 위선된 믿음은 밖으로 표현되지 않을 뿐이지, 참된 믿음이라면 우리의 삶을 통해 나눔과 섬김과 봉사의 손길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겉만 멀쩡하고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속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행실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의인으로 표현된 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원래 그 행실이 그러했던 것처럼 타인을 돕고 섬기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참된 믿음이라면 우리의 삶이 밖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 2:22)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알려면 성도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면 밖에 나가서 믿음의 백성답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내 믿음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구원받기 위해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타인과 대화할 때든, 누군가를 섬길 때든, 우리의 눈빛이나 말투나 행동을 통해 그 믿음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본문은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 양의 자리, 곧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기본이 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이 말씀을 기준으로 우리 믿음의 가치를 평가하고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의인은 주님을 도왔다고 하는데, 주님은 이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작 이 사람은 "내가 어느 때 주님을 도왔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사람은 과연 누구를 도운 것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두 가지 길
본문은 이어서 이 의인이 누구를 도왔는지를 밝혀 줍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0)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극히 작은 자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연약하고 가난하고 비루하며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을 포괄하는 말씀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넣어두셨습니다. 죄로 인해 타락하고 변질되었지만,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형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찬연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형상이 타락으로 가리워지고 어두워졌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상의 언어로 '장점'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에게는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점을 먼저 봅니다. "너는 그것 때문에 망할 거야", "너는 그것 때문에 이 모양이야"라며 단점을 가지고 사람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인간 이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것은 장점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장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만나는 가족, 믿음의 형제자매, 직장 동료, 함께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장점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장점을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장점이 단점을 덮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셨던 형상이 극대화되어, 그들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장점을 발견하지 않고 칭찬하지 않음으로써 지극히 작은 자를 짓밟고 무시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지극히 작은 자를 어떻게 섬길 것입니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의인처럼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주고, 목이 마르면 마실 물을 주고, 헐벗었으면 입을 옷을 주고, 병들었으면 돌봐주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실질적인 도움을 베풀어 복을 받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찌는 듯한 더위에 자기 집 문 앞에 앉아 있는데, 나그네 세 분이 사막을 가로질러 집 앞을 지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반사적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세 분을 자기 집 안으로 강권하여 모셔왔습니다. 발 씻을 물을 내어 놓고, 하인들에게 명하여 송아지를 잡게 했습니다. 고운 가루로 빵을 굽고, 엉긴 우유와 치즈를 대접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세 분 중 한 분이 하나님이셨고, 두 분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천사인지도, 하나님인지도 모르고 섬겼습니다. "내가 어느 때에 하나님을 섬겼습니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이 본문의 의인처럼, 아브라함도 지나가는 나그네를 섬겼는데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년 이맘때에 너희 가정에 자녀가 있으리라고. 가정에 가장 필요했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그렇게 응답받고 채워졌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요한이 가이오라는 장로를 칭찬합니다. 당시에는 순회 전도자들이 많았습니다. 목회자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예배 공동체는 많았기에 순회 전도자들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장로 가이오는 그 순회 전도자들을 물질적으로 돌보아드리고, 입을 옷과 먹을 양식을 제공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극진하게 칭찬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면, 주님의 백성이라면, 교회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2년여를 지나가면서 어려움에 처한 분들이 많습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들이 그들의 삶에 가득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돌보아 드리며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배고픈 자들을 먹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교회도, 하나님의 백성도 손을 움츠리지 말고 손을 펴서 그들의 삶의 자리에 함께하고 동참해야 합니다.
둘째,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갈급한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고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을 가장 헌신적으로 감당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 19:8-10)
바울이 에베소에 갔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쳤습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더 이상 회당에 있을 수 없어서 두란노 서원을 세웠습니다. 2년 동안 그곳에서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며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을 거쳐 갔고, 에베소 도시 전체가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중에는 주인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돌아온 오네시모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영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예수님도 아무리 피곤하셔도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설교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 주는 동시에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는 공동체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매 시간 전해지는 성경공부, 각 부서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말씀의 향연이 교회 공동체를 가득 채울 때 비로소 참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담대하게, 자신 있게, 어디서부터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여 그들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울 수 있는 역량과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종말 심판의 자리에서 따뜻한 남쪽, 오른쪽, 양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내 참된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섬기고 돌보아야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은 종말 심판의 자리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게 될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의 자리 아니면 염소의 자리, 둘 중 하나입니다. 양다리를 걸치며 판단을 유보하는 삶은 결코 안전한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나 양의 자리에 서는 것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머니 속 송곳이 숨겨지지 않듯, 참된 믿음은 나눔과 섬김과 봉사의 손길로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하나를 내 참된 믿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섬기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종말의 따뜻한 남쪽, 오른편, 양의 자리에 서는 길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양의 자리와 염소의 자리, 우리가 어느 자리에 서게 될 것인지를 깨닫게 하여 주셨습니다. 주님, 지금까지 우리는 판단을 유보하며 한쪽 발은 세상에, 한쪽 발은 하나님께 두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우리가 섬길 자를 택하라 하신 여호수아의 준엄한 소리를 들으며, 오늘 하나님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다시 잡습니다. 아버지, 참된 믿음이 자연스럽게 삶으로 승화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 주며, 또한 그들에게 영적인 갈급함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날, 우리가 양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