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
본문: 누가복음 12:13-21
추수감사주일이면 한국교회는 한 해의 수확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추수감사주일이 지나면 대림절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다가옵니다. 추위는 모든 사람에게 춥지만,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감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한층 더 매서운 계절입니다. 우리나라는 OECD 37개국 중 상대적 빈곤율이 4위에 해당하는 국가입니다. 수치로 따지면 16.7퍼센트, 약 100명 중 16명이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상대적 빈곤이란 일반적인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질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OECD 평균이 11.1퍼센트이고, 북유럽 선진국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상대적 빈곤율은 약 3배에 달합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절대적 빈곤 국가였습니다. 한국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지나면서 모두가 가난했습니다. 그때는 나도 가난하고 옆집도 가난했기에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나는 이렇게 사는데 옆집 사람은 다른 생활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쓰라립니다. 그래서 분노가 생기고, 사회적 공정과 정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행복지수라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OECD 37개국 중 뒤에서 세 번째입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꿈꾸기 위해 공산주의 사회는 부자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역사적으로 이미 실패한 실험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상대적 빈곤을 느끼고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인간의 탐심에서 찾고 계십니다. 그 탐심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소유 속에 갇힌 영혼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 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주님, 내 형을 명하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해 주십시오." 가정 가운데 유산 분쟁이 생긴 것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유산이 남았는데, 형이 유산을 독차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의 마음과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호소했지만, 주님은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의 마음 중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 12:14-15)
주님은 이 사람 마음속에 있는 탐심을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입니다. 이 사람이 나와서 형을 탓하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탐심이 바로 문제라고 주님께서 꿰뚫어 보시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의미심장한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생명'은 헬라어 '조에'(ζωή)로,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영혼을 의미합니다. '소유'로 번역된 '히파르콘타'(ὑπάρχοντα)는 처분 가능한 재산을 뜻합니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 내가 원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반면 소유는 처분 가능한 재산으로, 내가 원하고 뜻하면 처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와 자기의 생명을 분리하지 못합니다. 소유 속에 생명을 가두고, 곧 물질 속에 영혼을 가두어 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과 소유를 철저하게 분리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 많으면, 물질이 넉넉하면, 먹고 살 만하면 영혼의 자유를 느끼고, 해방감을 느끼며,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소유가 적으면, 가진 것이 없으면, 그때부터 영혼이 피폐해지기 시작합니다. 물질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꼬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소유 속에 자신의 영혼을 가두어 버리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누리고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고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당장 내일 먹을 양식이 부족하면 우리의 영혼은 물질 속에 속박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행복하려면 소유와 영혼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긁어모으는 부자의 어리석음
이 말씀이 어렵기에 주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의 주인공은 한 부자입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눅 12:16-17)
부자도 걱정이 있습니다. 원래 재산이 많은 부자이니 창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해에 농사가 풍성하여 소출을 쌓아둘 장소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걱정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이 부자에게는 큰 걱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자를 손가락질하며 구두쇠라고 욕심쟁이라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도 이 사람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부자가 아니라서 그렇지, 돈이 많아져서 이 사람과 같은 입장이 되면 똑같이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이것을 고민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이 있으면 어디에 투자할지, 어떻게 투자하고 어떻게 돈을 굴려서 더 많은 부를 창출할지를 고민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부자들에게는 투자할 곳을 찾는 것이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더 많이 불릴 수 있을까, 이것이 고민입니다. 2천 년 전 이 부자와 똑같은 고민을 오늘 우리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8)
이 부자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쌓아 두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나고'(συνάγω)는 '긁어 모으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을 상상하지만, 원어의 의미는 갈고리로 긁어 모으는 것입니다. 자기 창고가 작으니 그것을 헐고 더 크게 지은 다음, 그해에 거두어들인 소출을 갈고리로 긁어서 자기 창고에 넣어두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결정하고 흐뭇했을 것입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모습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갈고리로 모든 소출을 긁어 모아 쌓아두려는 이 부자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쌓아두려 하는 것입니까? 왜 긁어모으려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쌓아두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나눌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다 내 것인데 왜 남과 나누어야 합니까? 내가 수고하고 고생하고, 내 가족이 애써서 모은 것인데 왜 나누어야 합니까? 나눌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 것이니까, 왜 나누고 왜 흘려보내야 하느냐며 사람들은 쌓아둡니다. 썩어 없어지더라도, 썩어서 못 먹게 되더라도 일단 쌓아두고 봅니다. 내 것이니까 말입니다.
둘째, 그보다 조금 더 지혜로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다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넉넉하지만,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이 날 가능성이 있으니 쌓아둡니다. 지금 내 때에는 이렇게 부자로 살지만, 내 자식, 그 자식의 자식, 3대 4대가 살기에는 이것도 부족하다며, 최대한 많이 쌓아두어 자손의 자손까지 행복하게 하고 땀 흘리지 않고도 먹고살게 하려 합니다. 이 두 가지 이유 외에는 다른 이유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지혜로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쌓아두지 말고 남겨두라
하나님께서는 쌓아두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출 16:19-21)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던 현장입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그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으니 목축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가롭게 짐승들에게 풀을 뜯어먹이며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기 위해 하늘 문을 여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하늘에서 고기가 내리고, 과자 같은 것이 내립니다. 이것이 그들을 먹이고 살찌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가족이 먹을 것 이상으로 욕심을 내어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장 내일 또 내려주실 것이니 먹을 것만 거두라 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욕심껏 거두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하나도 먹을 수 없어 다 버려야 했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반복하게 하셨습니다. 안식일 전날에는 두 배를 주셨지만, 40년 동안 매일같이 꼭 필요한 것만 가지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인간의 탐욕이라는 것이 40년 동안 이렇게 훈련받지 않으면 결코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는 것을 경험했음에도, 오늘 다시 긁어 모아서 창고를 가득 채우고 또 채우려 합니다. 갖다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끊임없이 긁어 모으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끊임없이 훈련시키셨습니다. 40년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래도 탐욕의 쓴뿌리와 깊은 인간의 욕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신 24:19-21)
남겨두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감람나무를 딴 후에 다시 돌아보지 말라, 포도를 딴 후에 다시 따지 말라, 밭에서 곡식을 추수하다 무언가를 남겨두었거든 다시 가져오지 말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가져가도록 남겨두라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꼭 필요한 것만 가지게 훈련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쌓아두면 반드시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벌레가 들끓고 썩어가는 악취가 풍길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모인 곳에 다툼이 있고, 물질이 쌓여 있는 곳에 인간의 온갖 추악함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가는 것은 권력 이면에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썩어가는 냄새가, 탐욕이 부패하는 냄새가 진동하는데도, 사람들은 쌓아놓기를 좋아합니다. 다 흩어버리라 하셨고, 다른 사람들이 먹게끔 남겨두라 하셨는데, 사람들은 갈고리처럼 긁어모아 자기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의 참뜻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표현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입니다. '우리'의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의 범위가 '나' 하나에서 나가지도 못합니다. 나 하나 먹고 나 하나 잘 사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조금 성숙하면 가족이 눈에 들어옵니다. 거기서 믿음의 뿌리가 더 내려가면 옆집 사람이 보이고, 공동체가 보이고, 교회 식구들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마음이 조금 아프고 찔리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믿음이 더 넓어지면 북녘 땅에 있는 동포들이 생각납니다. 이 추위에 그들은 어떻게 살까 걱정이 됩니다. 조금 더 지경이 확장되면 대륙을 넘어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떠오릅니다. 마실 물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는 그들을 생각하면, 나는 배부르게 먹고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는데 저 가난한 아이들은 오늘도 굶고 있다는 사실에 목이 메여 음식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개념이 믿음의 깊이와 성장에 비례하여 점점 확대되어 갑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하루에 꼭 필요한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필요한 양식을 넘어 3대, 4대가 일하지 않고도 먹고 남을 양식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하루에 필요한 양식이면 충분하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잉여의 것들은 남겨두라 하시고, 나누고 베풀고 흘려보내라 하십니다.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공동체를 위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매일같이 외우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주기도문을 외우며, 주기도문이 우리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기도문의 삶을 살지 못합니까? '우리'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살고,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몇 대가 먹고살 양식을 구하며, 탐욕과 탐심으로 일관되어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 본문의 부자는 바로 그러한 악한 자로 서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기를 칭찬합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19)
이 부자가 착각한 것이 있습니다. 영혼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 영혼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자기 것입니까? 생명이 자기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흙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인간의 재료를 땅의 흙에서 가져오셨으니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인간의 몸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으니, 인간의 영혼 역시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몸도 내 영혼도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내 것이었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몸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짓습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하는데 남이 왜 참견하느냐며 음란을 위해 내 몸을 내어주고, 이 손으로 악한 일을 하며, 내 발로 악한 곳을 다니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몸은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너희 몸을 거룩한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은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이 몸을 사용해야 합니다. 영혼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는 그날까지 내 몸에 담겨 있는 것뿐입니다.
오늘 이 부자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니 영혼까지 자기 것이라 여겼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일갈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0)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영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내 영혼'이라고 했으니, 그래 '네 영혼'이라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영혼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뜻입니까?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영혼이라고 생각하며 먹고 마시고 쉬고 즐기자 했지만, 사실 그 영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수도 있고 하나님이 찾으실 수도 있으니,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 영혼을 찾아가시면, 이 사람이 지금까지 행복하고 즐거워했던 것, 자기 창고를 헐고 다시 크게 짓고 그 안에 곡식을 긁어모아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것은 다시 누구의 것이 됩니까? 한 번도 써보지도 못하고, 한 번도 자기 뜻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한 채,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구두쇠 소리 듣고 욕심쟁이 소리 듣고 살았던 그 사람은, 하나님이 오늘 밤 그의 영혼을 취하시면 하나님 앞의 죄인으로 불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질문으로 마치셨습니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탐심을 가지고 나온 사람에게 스스로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결론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1)
'부요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형용사 '플루테오'(πλουτέω)는 '흘려보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흘려보내 주신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육체도, 영혼도, 빈손으로 이 땅에 왔는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환경이 하나님께서 흘려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려면, 우리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감사하지 못합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고, 내가 노력했고, 내 능력으로 다 가졌다고 생각하기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 몸도 내 것이 아니었고, 영혼도 내 것이 아니었고, 원래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흘려보내 주셔서 이만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감사한 사람만이 나눌 수 있습니다. 감사해야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 부자처럼 움켜잡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이만큼 성장하고 자라게 된 것은 우리가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흘려보내 주시고 부유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재직들의 결의에 따라 선교헌금 5천만 원을 어려운 교회들에 나누었습니다. 노회 안의 미자립교회의 절반, 코로나가 시작될 때 어려웠던 대구·경북 지역의 교회, 수해를 입은 교회들에 그 절반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가슴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들을 살펴보니, 코로나를 처음 겪을 때 있었던 교회가 2년여 시간을 거치면서 문을 닫은 곳이 여럿 있었습니다. 교회가 힘들어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어 문을 닫았습니다. 성도들이 흩어지고 목회자가 더 이상 생활할 수 없어 교회의 문이 닫혔습니다. 그 2년의 기간 동안 우리가 다 흘려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쌓아두려 하고 긁어 모으려 했기 때문에, 문 닫은 교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비전센터 건축을 앞두고 있어 쓸 곳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누고 흘려보내는 이유는, 애초부터 우리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보내주신 것이기에, 우리 또한 감사하며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러하고, 성도의 삶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추수감사주일을 허락해 주시고, 원래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 것이라 생각했기에 어리석은 부자처럼 창고를 헐고 새로 짓고, 긁어모으고 쌓아두려 하는 악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여,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육체도 내 것이 아니었고, 영혼도 내 것이 아니었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감사하고 나누게 하여 주옵소서. 끊임없이 흘려보내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쌓아두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셨사오니, 나누고 흘려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