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12 /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15:1-10)

예수님의 비유 12 -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본문: 누가복음 15:1-10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과거부터 외부의 침입을 빈번하게 받았습니다. 숱한 전쟁을 치렀고, 그 가운데 국토가 불타며 오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여러 외세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나라는 고려시대의 원(元)나라였습니다. 징기스칸(Genghis Khan)의 후예들이 세운 몽골 제국은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중국 대륙을 넘어 유럽까지 석권했습니다. 원나라와 고려는 국력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만만하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30년 동안이나 대몽항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고려는 원나라에 굴복하고 말았고, 그때부터 97년에 이르는 원 간섭기가 시작됩니다.

이 97년 동안 수많은 굴욕적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원나라 황제가 고려의 임금을 임명하는 일이었습니다. 왕으로 임명되면 원나라 황제에게 조공을 들고 가서 인사를 올려야 했습니다. 심지어 오랜 기간 원나라에 머물러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충선왕 같은 분은 재임 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기는 것은 세계사의 흐름이며,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약자가 강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현상이 역전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하늘에서 가장 강하신 하나님,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약한 사람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셨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에 달려 온 몸의 물과 피를 쏟아내셨습니다. 죄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온전한 산 제물이 되셨습니다. 가장 강하신 분이 가장 약한 인간을 위해 돌아가신 이 사건, 그 시간을 기다리고 묵상하는 것이 바로 대림절의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과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살고 있는지, 그 목적에 부합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벽을 쌓는 자와 벽을 허무는 분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주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뜻밖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 15:1)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로서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였습니다. 로마의 세금 제도는 독특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를 점령하면 그 지역의 원주민들을 세리로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정해진 세금만 거두어 바치게 한 뒤, 그 이외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두 배를 걷든 세 배를 걷든, 그것을 부의 수단으로 삼든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세리들은 로마에 바칠 세금만 거두어 바친 후, 두 배 세 배 혹은 그 이상을 거두어 자신의 치부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은 세리를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민족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한 자들, 로마의 앞잡이라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심지어 딸을 시집보내지 않았습니다. 혼인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자연스럽게 창기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 '세리와 죄인'이 쌍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죄인들이 바로 창기를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스스로 걸어 나왔습니다. 기적 같은 일입니다. 세리는 돈을 밝히는 자들이고, 창기는 자신의 욕망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제 발로 걸어 나오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세리 마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를 부르시기 위해 직접 찾아가셔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그 후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 창기들을 가까이하셨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 7:34)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지어준 별명입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 지은 별명이었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교제를 나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들을 가까이하시고 손을 내미셨기에, 세상 사람들이 벌레 보듯 하던 세리와 창기들도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자기 발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며 손가락질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과 예수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경계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벽을 쌓고 선을 긋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경계가 없습니다. 선이 없습니다. 오히려 벽을 허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벽을 쌓은 이유는 세리와 창기들이 자신들과 다른, 괴이한 삶을 사는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수많은 사람이 나와 다른 사람을 차별합니다. 함께하려 하지 않습니다. 과거 수십 년 전의 정치인들은 그래도 낭만이 있었습니다. 공통점 하나만 있으면 서로 동질하다 여겼고, 나라를 사랑하는 그 한마음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 현실은 어떻습니까. 조금만 달라도 분열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조금만 달라도 함께하지 않겠다고 뛰쳐나갑니다. 교회 안과 밖에서도 많은 사람이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금을 긋고, 선을 긋고, 벽을 쌓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대림절의 계절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서도 가장 소외받고 인간 대접받지 못하는 세리와 창기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대림절의 초입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도 벽을 쌓지 말고, 어떤 사람이든 용납하며 손을 내밀고 다가가는 믿음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기쁨

예수님 앞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세리, 죄인, 바리새인, 서기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눅 15:4)

양 백 마리를 가진 사람은 부자입니다. 그런데 아흔아홉 마리는 그대로 있는데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그 한 마리를 찾아내기까지 열심히 수색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라도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으면, 그 한 마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밤새도록 수색하며 찾아다닐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눅 15:5-6)

기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첫째, 이 사람이 자기 양을 돌보던 목자들을 전혀 야단치지 않습니다. 나무라지 않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너희는 눈을 뜨고도 양을 지키지 못했느냐, 양 한 마리가 왜 길을 잃었는지 소상히 밝혀라." 이런 질책이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지 책망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사람의 행동이 극도로 비경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양 한 마리의 가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벗과 이웃들을 모두 불러 모아 잔치를 벌입니다. 어쩌면 양 열 마리 혹은 그 이상보다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비효율적이고 상식 밖의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가 7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7)

기쁨 때문입니다. 즐겁고 행복해서, 기쁨에 겨워 정신을 잃을 만큼 기뻐서 종들을 야단치는 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양 한 마리의 가치보다 몇 배나 되는 비용이 든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고,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비효율의 복음, 사랑의 경제학

세상은 자본주의 경제 논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투입과 산출이 확실해야 하고, 투자 대비 효과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투자했는데 산출이 변변치 않으면 손절하고 빨리 정리하여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급변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고 자본주의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주님의 삶은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경제적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고치셔도 될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손가락질했고,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그 논쟁과 비난을 감당하는 데 얼마나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회당에 들어가 보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고, 당장 고쳐주고 싶으셨습니다. 그 병자에게 내일 오라 말씀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으로 몰려드는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지 않고는 마음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으셨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셨고, 논쟁에 시간과 열정과 정력을 소비하셔야 했습니다. 경제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을 끊임없이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찾아가셔서 자유를 선포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 율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마리아 땅을 통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일부러 그 땅을 찾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 세리와 창기들을 가까이하시고 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시자 사람들이 또 손가락질합니다. 칭송과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주님은 스스로 고난과 어려움의 길을 택하여 걸어가셨습니다.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영혼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도 자본의 논리, 효율성의 논리가 침투해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세련된 구호 중 하나가 '선택과 집중'입니다. 돈이 되는 것은 선택하고 집중하며, 돈이 되지 않는 것은 과감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로 따지자면 교회에서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것은 전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 말이 정확합니다. 전도만큼 비효율적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그리스도를 모르던 한 영혼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가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겠습니까. 남편이 기도하고, 아내가 기도하고, 자녀들이 기도하고, 그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 땀을 흘리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비효율적입니다. 수천 시간, 수만 시간을 그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 기도가 쌓이고 쌓여서, 사랑과 헌신과 희생이 누적되어 그 사람이 마침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교회에 발걸음을 했다고 곧바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발걸음을 내디뎠다면 목사는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심방합니다. 성경 공부를 인도합니다. 그분이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라 여기던 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실 때까지, 주인 바꾸기까지 오랜 세월 그분을 갈고닦고 훈련합니다. 남선교회와 여전도회 성도들이 함께 사랑으로 돌보아 줍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듯싶다가 다시 무너지기를 반복합니다. 낙심이 됩니다. 주변에서 그분을 돌보던 사람도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기를 한참, 긴 시간이 지난 후에 그 한 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사가 됩니다. 그 한 사람이 예수님의 훌륭한 정병이 되기까지,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인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전도의 미련한 것을 우리가 끊어낼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경제적 가치로 따지면 비효율적이고 손가락질 받을 일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 땅에 오셨고, 가장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시고, 주저 없이 심방하시고, 위로하시며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지 않고, 경제적 효율의 논리를 따지지 않으며, 영혼을 사랑하고 그 영혼을 위하여 울고 함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바로 그런 시간입니다.

수고가 빚어낸 천국의 잔치

예수님께서 이어서 두 번째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눅 15:8)

어떤 여인에게 열 드라크마가 있었습니다. 드라크마는 로마의 화폐로, 은으로 만든 동전입니다. 유대인의 화폐인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으며,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여인에게 이 돈은 결코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이 돈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낙심했는지 열심히 찾습니다. 본문에 '집을 쓸며'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에피멜로스(ἐπιμελῶς)'인데, 단순히 빗자루질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들춰보고, 뒤집어 보고, 탈탈 털어보고, 꼼꼼하게 살펴서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 정성을 기울여 찾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찾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소중한 자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찾아냅니다.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눅 15:9)

종잡을 수 없는 여인입니다. 이 돈은 자기 전 재산의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열 드라크마가 전 재산인데, 그중 한 드라크마를 찾았다고 벗과 이웃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잔치를 벌입니다. 이렇게 잔치를 벌이면 전 재산 열 드라크마를 다 써버릴 수도 있습니다.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0)

역시 동일합니다. 기쁘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에, 이 기쁨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전 재산을 탕진할 수도 있는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이 기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지금은 입시 시즌으로 합격과 불합격이 갈리는 때입니다. 합격하면 기쁘고, 떨어지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합격에도 차원이 다른 합격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시도에 바로 합격한 사람과, 두 번 세 번 떨어진 뒤에 합격한 사람의 기쁨에는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첫 합격도 기쁘지만, 두세 번 낙방한 후에 합격한 사람의 기쁨은 뼛속까지 사무칩니다. 수고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 동안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고생하며 눈물을 쏟았기에, 남들은 알 수 없는 나만의 수고가 쌓이고 쌓여 뼈에 사무쳤기에, 그 수고가 기쁨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양 한 마리 가치보다 수십 배 되는 잔치를 벌인 이 사람, 한 드라크마의 가치보다 전 재산을 기울여 잔치하는 이 여인—그만큼 수고했다는 증거입니다.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밤새도록 온 들판을 헤매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지도 모르고 열심히 뒤쫓아 다녔는데 양을 찾았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수고했기 때문에 양의 가치보다 몇십 배 되는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이 여인도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열심히 집안을 뒤지고 찾았습니다. 집에서 찾지 못해 골목까지 나가고, 온 동네를 샅샅이 뒤지며 찾았습니다. 그래서 기쁜 나머지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리와 창기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이 마음을 열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냉대받고, 멸시당하고, 문전박대당했지만, 주님은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시고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자기 발로 걸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왔습니다. 천국 잔치를 벌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천대받던 세리와 창기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왔으니,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모든 것을 쏟아 천국 잔치를 벌일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영혼을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땀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찾아가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냉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차갑게 식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영혼을 위해 수고한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는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는 이유는 영혼을 위해 애쓰고 분투하며 비효율적인 시간과 공을 들인 사람이 점차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더베—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자리를 떠나 2차 선교여행을 하던 중에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 들어와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들이 거짓 교사의 꾀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분노와 안타까움 속에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여 보냈습니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이루기까지 내가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노라고. 그 선언대로 바울은 2차, 3차 전도여행 때 그곳을 방문하여 다시 복음을 전하며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돌아오고 회복되었습니다. 수고했기 때문에,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쁨이 뼈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위해 교회학교 교사들이 그 맑은 눈망울을 바라보며 땀 흘리고, 수고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며, 말씀을 전해서 그들이 성장하고 자라 하나님 나라의 훌륭한 일꾼이 되는 것—그 과정은 경제적 가치로 따질 수 없습니다. 효율성의 잣대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세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구역장, 권찰, 새가족을 양육하시는 분들이 한 영혼이 하나님의 교회를 떠났을 때 가슴 아파하며 끝까지 쫓아가 돌봅니다. 기도하고 중보합니다. 그분들이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왔을 때, 다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을 때, 그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결론

이 기쁨을 경험한 사람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할 수 없습니다. 대림절의 시간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기를 바랍니다. 자본주의의 거센 흐름 가운데서도 교회가 그 흐름에 휩쓸리지 않도록, 우리 같은 작은 일꾼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주의 일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자본의 논리와 경제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비효율적이지만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으로 기뻐하며 천국 잔치를 벌일 수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대림절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발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은 한 영혼을 위하여 가장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인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손가락질합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잃은 양 한 마리 그 한 마리를 버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잃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고 잔치를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우리를 손가락질합니다. 주님, 세상의 흐름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지 않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선택과 집중, 자본의 논리를 말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대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교회를 세우며,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고 실천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세상이 악해져 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주님, 축복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