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13 / 스스로 돌이켜 (눅15:11-19)

스스로 돌이켜

본문: 누가복음 15:11-19

채만식(蔡萬植)은 1902년에 태어나 1950년까지 살았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소설가이자 지식인으로 살면서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 등과 같은 탁월한 역작을 여러 편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절이 시절인 만큼, 동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은 크게 세 부류 중 하나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째는 친일이고, 둘째는 항일이며, 친일과 항일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면 칩거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채만식은 춘원 이광수(李光洙)와 함께 대표적인 친일 작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는 1942년에 「아름다운 새벽」이라는 작품을 발표합니다. 그 소설에서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옹호했습니다. 조선의 청년들이 일어나서 태평양전쟁에 나가 황국신민으로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별개로 1945년 일제는 멸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조선은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크게 돌이키고 뉘우쳤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민족의 죄인」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합니다. 형식은 소설이었지만 내용은 수필에 가깝습니다.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고, 돌이키며, 지난날의 삶을 회개하는 모습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주변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도 하고, 타인에게 불편한 일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돌이키느냐, 돌이키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채만식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탕자였습니다. 철저하게 돌이키고 자신의 잘못을 민족 앞에서 사죄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버리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채만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키고 사죄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는 기다렸고, 아들은 돌아왔으며,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을 보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얼마만큼 멀리 떠나와 있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삶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키며,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울타리를 넘어선 아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1-12)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아들이 하는 말이 그리 틀린 말도 아닐 것입니다. 어차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신에게 주실 유산을 아버지 살아 계실 때 받아서, 이 돈을 밑천 삼아 열심히 벌어서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타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문화적·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이 아들의 말은 패륜입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만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화가 납니다. 기분이 나쁩니다. 더군다나 이런 요구를 했다는 사실이 동네 이웃들에게 알려지면 얼마나 손가락질을 받겠습니까? 패륜아라고 비난받을 것이 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들이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욕먹을 것이 뻔한데, 아들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들은 태생적인 한계를 느꼈습니다.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장남에게 돌아갈 몫의 절반밖에 받지 못하는 당시 율법 때문에 그는 태생적 한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신 21:16-17)

장자에게는 무조건 두 배의 몫을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아들이 보기에 형은 자기보다 잘난 것도 없습니다. 자기가 훨씬 더 똑똑하고, 훨씬 더 능력이 있는데, 형은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몫의 두 배를 받습니다. 크게 화가 납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기왕에 주실 것, 저에게 미리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가지고 가서 장사를 해서 열심히 벌어서 형보다 더 부자가 되어 오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형 앞에 멋지게 나타나고, 아버지 앞에 성공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싶었습니다.

이 아들의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상황을 처리하는 아버지의 태도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식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한다면 기분이 나쁘지 않겠습니까? 특히 그 당시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크게 꾸짖어서라도 안 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 푼도 주지 않고 집에서 내쫓는 한이 있더라도, 이웃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일만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어떻게 했습니까? 각각 몫을 나누어서 원하는 대로 해주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왜 이렇게 하실까요? 종종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런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까? "망할 것이 뻔한데 하나님은 왜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이대로 가면 실패할 것이 뻔한데 하나님은 왜 막지 않으시는가?"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안 된다고 하셔야 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냥 그대로 놓아두시는가?" 하나님이 무책임한 것은 아닌가 하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이런 불만과 질문을 가집니다.

여기 아버지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 번도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아들, 장사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아들, 아버지 집에서만 살던 아들이 이 많은 돈을 가지고 나가서 어떻게 돈을 벌어 오겠습니까? 세상에는 사기꾼들이 얼마나 많은데, 백 퍼센트 망할 것이 뻔한데 아버지는 그냥 내버려 둡니다.

우리는 이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그리고 오늘 이 세상까지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그 동산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먹게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한계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말씀 안에 있는 자유였습니다. 선악과 명령을 주셨습니다.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것, 곧 말씀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은 뛰어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테두리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만약 그 테두리를 뛰어넘어 가면, 하나님은 억지로 쫓아가서 가두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의 금지 명령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지 명령을 어겨서 말씀의 테두리를 뛰쳐나갔습니다. 그 다음부터 하나님은 놓아두십니다.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스스로 말씀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갔기 때문에, 죄 짓고 난 이후에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스스로 자기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을 운행해 오셨습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와서 왕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원래 계획, 원래 정치 체제에는 왕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각 지파별로 열두 지파가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성읍 마흔여덟 개에 레위 지파를 분산해서 배치하셨습니다. 레위인들이 제사와 율법과 신앙 교육과 재판을 도맡았습니다. 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펴보니, 왕이 있는 나라 백성들이 잘 삽니다. 부국강병했습니다. "우리도 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 왕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약 왕이 생기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삼상 8:11-12)

무슨 말입니까? 왕이 생기면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종처럼 부릴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딸도 끌고 갈 것이고, 너희 밭도 함부로 빼앗아 갈 것입니다. 악한 왕이 생기면 그때 어떻게 하려 하느냐고 하나님은 말씀의 울타리를 쳐두셨습니다. 그러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합니까? 계속 요구했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십시오, 왕을 주십시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삼상 8:19, 22)

사무엘에게 "백성들의 말을 들어서 왕을 세워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꺼운 허락입니까? 놓아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셨는데도 끊임없이 요청하고 끊임없이 요구하니, 하나님이 "그래, 이제는 네 멋대로 해 보아라"라고 그냥 펼쳐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를 빗겨 나가버렸습니다.

그 이후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악한 왕들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신 대로 그 왕들이 백성들을 압제합니다. 아들을 사로잡아 가고, 딸을 사로잡아 가고, 백성들의 밭을 함부로 빼앗아 갑니다. 그제서야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이 왕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늘의 둘째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요구하는 것이 패륜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문화적 관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요구했습니다. 말려도 되지 않을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기꺼이 기뻐하며 축복하며 흔쾌히 보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역시 같은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매달리며 떼를 써서 "하나님, 이것을 제가 하고 싶습니다" 했더니, 하나님은 "안 된다, 그것은 내 뜻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고 떼를 써서 억지로 얻은 것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하나님이 허락하셨는데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해 놓으시고 왜 책임지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오히려 따지고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꼼꼼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시 냉정하게 처음부터 과정과 지금까지의 결과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꺼이 허락하신 것인지, 하나님 말씀 안에서 내가 거래했던 것인지, 내 욕심은 거기에 없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즉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고도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과 평행선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궁핍과 열등감이라는 쓴 열매

이제 그렇게 길을 떠난 둘째의 삶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 15:13-14)

둘째도 나름대로 생각과 계획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도 이렇게 망하고 싶어서 떠났겠습니까? 보란 듯이 성공하고, 보란 듯이 형과 아버지 앞에 돌아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돈이 생겼습니다. 한번 멋지게 써보고 싶었습니다. 먼 나라에 갑니다. 거기서 낭비하고 흥청망청 지냅니다. 그리고 나서 사업 투자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경제가 얼어붙었습니다. 돈이 돌지 않습니다.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를 넘어가면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환경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둘째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아버지 품안에 있을 때는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순종만 하면 먹고살 걱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품을 떠나고 나니,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나니, 환경도 사람도 모든 것이 자기에게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가인을 보십시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했습니다.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유리 방황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내가 동생을 죽인 것처럼 누군가가 나를 죽일 것이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덴 동편 놋 땅에 갑니다. 성을 높이 쌓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는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고 믿고 자유롭게 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성을 쌓아야 합니다. 그래도 불안합니다.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오늘 이 둘째 아들 역시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를 떠나고 나니, 하나님의 품을 떠나고 나니, 그를 돕는 사람, 그와 함께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만 있습니다. 그의 돈을 빼앗으려는 사람만 있습니다. 결국 다 실패하고 궁핍해졌습니다. 여기서 궁핍하다는 단어에 헬라어 '히스테레오'(ὑστερέω)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은 '모자라다', '열등감을 느끼다'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집에 살 때에도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형에 대한 열등감입니다. 형은 잘나지도 못했는데 자기 몫의 두 배를 가집니다. 나는 절반밖에 가지지 못합니다. 돈 때문에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돈을 잔뜩 들고 여기서 떠나가면, 이 열등감에서 해방될 줄 알았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가득 채우면 열등감에서 벗어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전히 히스테레오입니다. 여전히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모자랍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열등감을 느끼고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서, 하나님을 떠나기만 하면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는데, 말씀의 울타리를 벗어난 인생 역시 히스테레오의 상태에 처해져 있습니다.

이런 둘째 아들의 삶이 실제로 오늘 우리의 삶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상황은 더 나빠집니다. 차갑고 냉혹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5-16)

돈이 많이 있을 때는 주변에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돈이 떨어지니 사람이 떠납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돼지를 치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깨우침, 즉각적 순종

이때 그의 마음에 불이 켜지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17-19)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역사하셨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구나. 하나님께도 큰 죄를 지었구나. 아버지 살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유산 달라고 요구했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성령께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해 온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 26:75)

베드로는 자신만만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단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주님께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주님을 부인합니다. 맹세하고 부인합니다. 저주하고 부인했습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때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에게 생각나게 한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깨닫게 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서, 말씀을 들을 때, 기도할 때, 성경을 읽을 때, 나를 깨닫게 하시고 나를 돌이키도록 자꾸만 죄를 지적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깨닫게 하셨다면 행동하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내가 행동해야 합니다.

탕자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달려간 것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성령께서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마음에 죄를 지적하실 때, 그때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도 걸림돌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 돌아가면 아버지가 용서하실까? 동네 사람들이 나를 패륜아라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을까? 형의 차가운 눈빛을 내가 어떻게 견딜까?" 그에게도 걸림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다음, 그 다음, 그 다음 문제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나에게 깨닫게 하시니 이제는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하는 그 결단 한 가지만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만약 그가 "하룻밤만 묵으면서 하루 이틀만 더 생각해보자,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까?" 하고 하룻밤 이틀 밤을 지냈다면, 평생 돌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망설이다 보면 그 안에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너를 받아 주지 않을 거야.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 형의 냉소적인 눈빛, 이것을 어떻게 견디겠느냐? 돌아가지 마라. 여기서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야." 사탄은 그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날수록 영원히 돌아갈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움켜쥔 손을 펴서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라는 깨달음이 마음속에 옵니다. 그러면 즉시 행해야 합니다. 하룻밤 지나고 나면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형편도 그런데 네가 누구를 돕는다는 말이냐?" 그러면 못하게 됩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다 보면 이제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결단이 생깁니다. 그러면 즉시 행해야 합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섬기는 것을 곧장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다 보면 사탄이 말합니다. "네 형편이 그런데 지금 무슨 봉사를 하고 누구를 섬긴다는 말이냐? 안 되는 일이야. 나중에 하면 돼." 그러면 우리는 그 목소리와 그 속삭임에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결론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즉시 행동하고, 돌이키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실제로 우리의 믿음 생활을 무디게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한편 생각해 보면, 우리가 코로나를 핑계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상황을 핑계 삼아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울타리를 넘어와서 너무 멀리 와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일어서게 하시는데, 코로나를 핑계 삼아 자꾸만 숨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이키고,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즉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감동 주시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지금도 원하시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대림의 시간은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계시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시 본질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즉시 돌아가는 결단과 즉각 행동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되 말씀의 울타리 안에서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의 울타리를 넘어가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허락하셨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울타리 안에 머물고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감동 주시고 깨닫게 하실 때, 그 감동과 깨달음대로 행동하고 결단하고 움직이는 믿음의 백성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돌아오라고 목놓아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께, 탕자처럼 둘째 아들처럼 돌아가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