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본문: 누가복음 15:20-32
구소련은 철저한 공산주의 사회였습니다. 공산 정권이 주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압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는 사회라면 어디에나 저항하는 이들, 항거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1962년, 소련의 문학 월간지 《노비 미르》(Novyi Mir)가 발간된 날, 이례적으로 매진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한 평범한 수학 교사가 그 잡지에 기고한 중편소설 때문이었습니다. 그 수학 교사는 훗날 반체제 인사의 대명사가 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이었고, 그가 발표한 작품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중편소설이었습니다.
1945년 어느 날, 솔제니친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탈린(Stalin)을 비방한 것이 검열에 발각됩니다. 그 일로 소련의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에서 8년 동안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출소 후 그는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 생생하게 담아냈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반이라는 주인공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적군의 포로가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포로에서 풀려났지만, 소련 당국은 그에게 간첩죄를 뒤집어씌웁니다. 그 때문에 10년 동안 수용소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솔제니친은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이 소설에 깊이 있게 녹여냈습니다.
이반은 수용소에서 하루에 500그램의 빵을 배급받았습니다. 그리고 멀건 강냉이죽과 양배추국을 배급받았습니다. 아침 식사 10분, 점심 5분, 저녁 5분이 전부입니다.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하루 단 20분의 식사 시간은 천국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솔제니친에 의하면 수용소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개걸스럽게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허겁지겁 배식을 기다리고, 남들이 먹다 남긴 국그릇을 핥아 먹으며, 남의 빵을 도둑질합니다. 부유한 죄수들 앞에 줄을 서서 빵 한 조각이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아첨합니다. 이반이 볼 때 이런 인간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였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삶에 초연한 자들이었습니다. 살려는 의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가 다 빠져서 딱딱한 빵을 잇몸으로 씹어 먹어야 하지만 그마저도 먹을 의욕이 없습니다. 남들이 자신의 빵을 훔쳐 가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죽든 말든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자들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삶에 아둔하지도, 삶을 초연하게 내려놓지도 않는 존재들입니다. 배고픔을 느끼지만 인간의 마지막 선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이반은 바로 이 세 번째 부류에 속했습니다.
솔제니친이 이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인간다움이었습니다. 인간다움을 유지하면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수용소를 나온 후에도 소련의 강력한 공산 정권 아래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소설을 통해 보여준 것입니다. 솔제니친의 외침은 오늘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무엇무엇다움'이라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들어왔습니까? 목사다움, 정치인다움, 성도다움, 직업인다움. 이런 '다움'의 삶을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맏아들다움을 상실한 한 불쌍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과연 그는 왜 맏아들다움을 잃어버렸는지, 오늘 우리는 그와 함께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며 영적인 맏아들다움을 유지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의 심장, 아들의 귀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미리 받아서 집을 떠났습니다. 잘될 줄 알았습니다. 부자가 될 줄 알았습니다. 돈을 많이 벌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흉년까지 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모조리 탕진해 버렸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께 돌아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살면서 내린 결정 가운데 가장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그가 돌아올 때 아버지는 이미 그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다만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지위를 회복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품꾼 중 하나로만 받아주시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맞아주셨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아들을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셨습니다. 오랫동안 그를 기다려 왔다는 절절한 사랑의 표현을 아들에게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아들은 황송했습니다. 아버지께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눅 15:21)
이것이 아들의 진심이었습니다. 본심이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큰 죄를 지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십니까? 저는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 차라리 저를 꾸짖어 주시고 때려 주십시오." 이런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준비한 것을 종들에게 가져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2)
옷과 가락지와 신발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체형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옷과 가락지와 신발을 미리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언제든 이 아들이 돌아오면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려고 미리 마련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이 우리의 통념과 다릅니다. 오늘날의 보편적인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반적인 아버지라면 먼저 아들을 앉혀 놓고 따져 물었을 것입니다. "얼마를 가져갔는데 얼마를 썼느냐? 전부 탕진했느냐? 반성하고 돌아온 것이냐? 여기 돌아온 목적이 무엇이냐? 형이 알면 뭐라고 하겠느냐? 동네 이웃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여기 머물려 한다면 각서를 쓰고 도장을 찍어라."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런 절차를 전부 생략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 아들이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을 모두 덮어 버리셨습니다.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김으로써 아들의 지위를 고스란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아버지는 우리가 잘 알듯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늘 아버지는 본질과 비본질 가운데 오직 본질만 중요하다고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숫자를 좋아합니다. 돈을 얼마 가져갔는데 얼마를 써버렸는지, 이 돈을 앞으로 어떻게 갚을 것인지, 주변 사람들의 평판은 어떠한지—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보실 때 전혀 본질적인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사람들의 평판과 손가락질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바로 그 아들의 존재 자체입니다. 아들이 돌아온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라는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어떤 죄에 빠져 살았든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세상에서 충분히 힘들었고, 충분히 고생했고, 하나님의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가야 하는 삶이 너무 험난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시는 분이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도 둘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돌아온 것으로 족하다고 여기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 15:23-24)
살진 송아지를 왜 잡았을까요? 아버지와 아들만 먹으려고, 그 집의 종들만 먹으려고 잡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즐거워하더라"에서 '그들'은 이웃들입니다.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아버지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인 이유는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아들은 패륜아였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나가 전부 써버리고 돌아온 자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아버지의 의도는 이러했습니다. 이웃들을 불러놓고 "이웃들이여, 내 아들을 용서해 주시게. 이 아들이 철없이 유산을 상속받아 나가서 전부 탕진했지만, 내가 이 아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했으니 당신들도 이 귀한 음식을 함께 나누며 내 아들을 동네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주시게." 이것이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이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 아들은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손가락질 때문에 살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나서서 아들을 이웃들에게 소개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이제 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이웃들과의 관계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참소하는 자의 속삭임
그런데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냥 기쁘기만 하겠습니까? 마냥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편한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 아들은 돌아올 때도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 집에 품꾼으로 사는 것으로 족합니다." 아버지를 만나서도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아버지 집에서 그저 얹혀사는 품꾼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크건 작건 마음속에 공로주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로주의란 무엇입니까? 잘한 것에는 상을 받고, 잘못한 것에는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잘하면 상 받으니 기분이 좋고, 잘못하면 벌 받고 회초리를 맞아야 속이 시원합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품꾼으로 사는 것이 마음 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심히 불편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참소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계 12:10)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 형제들을 밤낮 참소하던 자가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 마귀가 종국에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다는 말씀입니다. 참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우리의 자의식과 죄책감을 자극한다는 뜻입니다. 사탄이 둘째 아들에게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지금 네가 받고 있는 대우가 말이 되느냐? 너는 아버지께 죄를 지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형에게 죄를 지었고, 동네 이웃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마땅한데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느냐? 좋은 옷 입고, 손에 가락지 끼고, 좋은 신발 신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다니—이 상황이 말이 되느냐? 너는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서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 사는 것이 네게 어울린다." 사탄은 끊임없이 이렇게 참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해야 하겠습니까? 사탄이 이런 참소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퍼부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이 놀라운 구원의 사랑을 힘입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자의식을 자극하고 죄책감을 심어주고 공로주의를 자극할 때, 그때 사탄에게 외쳐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당장 나를 떠나가라!"
둘째 아들은 하나님 앞에, 아버지 앞에, 동네 사람들 앞에 모든 절차를 거쳐 믿음의 사람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맏아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맏아들이 문제였습니다. 형이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집에 돌아옵니다. 멀리서부터 풍악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고 야단법석입니다. 가까이 가서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 묻습니다. 종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눅 15:27)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눅 15:28)
상황을 전해 듣고 맏아들이 분노합니다. '노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오르기조마이'(ὀργίζομαι)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본문에서 수동태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그가 노하여"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의 의도대로 다시 읽으면 "그가 분노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그를 사로잡은 분노의 주체가 누구일까요? 다름 아닌 사탄 마귀입니다. 그는 자기가 분노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공로주의에 사로잡힌 사탄 마귀가 맏아들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화내고 분노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분노의 원천에는 사탄 마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그를 분노로 사로잡아 끌고 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20-21)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가르친 이유는 우리 분노의 원천에 사탄 마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성내기를 더디 하고, 온유함으로 모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 맏아들도 지금 이 순간 자기 스스로 분내고 화를 낸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사탄 마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맏아들이 분노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실 둘째는 아버지의 유산 가운데 자기 몫만 찾아간 것입니다. 그것을 전부 써버리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이후에 아버지가 그 써버린 유산을 보전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맏아들은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일까요?
그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아버지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29-30)
맏아들이 화내는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은 성실하게 아버지 앞에서 열심히 일했으나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둘째 아들 곧 자기 동생은 벌을 받아 마땅한데 아버지는 그의 죄를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맏아들이었다면, 그 현장에 있었다면, 이 아들이 하는 말이 그대로 인정되지 않겠습니까? 백 퍼센트 공감되지 않겠습니까? 이 맏아들의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오해가 빚어낸 비극
그런데 이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의 대답이 충격적입니다. 아버지는 두 가지 측면을 설명하십니다. 먼저 첫 번째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1)
아버지가 다정하게 맏아들을 부르십니다. "얘"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면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아들아, 네가 나를 오해하였구나. 너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항상 네가 원한다면 친구들을 불러다가 소를 잡든, 양을 잡든, 염소를 잡든 할 수 있었다. 내 것이 다 네 것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나의 자원을 왜 놀린 자원으로 두고 활용하지 않았느냐? 너는 왜 나를 오해했느냐?" 이런 뜻입니다.
맏아들은 아마 아버지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오해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을 오해한 것과 같습니다. 그 종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습니다." 그와 똑같이 맏아들도 아버지를 오해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열심히 일하면서도 아버지가 불편해서 무엇을 달라고 말 꺼내는 것 자체가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아버지께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자원을 자기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 불편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오해하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2)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양에게 풀밭과 물은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인 나를 먹여 살리시니 당신은 나에게 부족함이 없는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잘 이해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을 탐욕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아버지께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도우시고 채워 주신다는 신뢰, 아버지의 자원을 내 것으로 받기를 원하는 다윗의 순전한 고백이 시편 23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달라고 요청하고 계십니까? 탐욕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자원을 나의 자원으로 달라고 요청하고 구할 수 있습니다.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맏아들은 아버지를 오해했습니다.
이어서 아버지는 맏아들의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32)
아버지 말씀에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가"**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나와 너', 곧 아버지인 나와 맏아들인 너가 '우리'가 되어 동생을 맞아들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맏아들에게 두 배의 유산을 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가 부재할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동생들을 살피고 어머니를 모시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동생을 돌봐야 합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동생을 함께 아끼고 사랑하고 염려하고 걱정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맏아들은 어떠했습니까? 맏아들은 둘째 아들 곧 자기 동생과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시샘했습니다. 맏아들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동생이 집을 나갔을 때 걱정하고 염려하고 함께 기다려야만 했는데, 오히려 집 나간 동생이 돌아오자 시샘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생과 경쟁 관계에 있었던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맏아들다움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맏아들은 르우벤입니다. 그런데 르우벤이 맏아들다움을 유지하며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요셉을 시샘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집중되는 요셉을 시기했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파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막내 동생 베냐민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넷째 형인 유다가 나섰을 때 르우벤은 뒷짐 지고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축복의 물줄기를, 영적 맏아들의 계보를 유다에게 흘려보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영적 맏아들의 지위를 차지하고 누리고 계십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도 있고, 중직자도 있고, 새 가족도 있고, 영적 침체에서 회복된 분도 있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 맏아들이라면, 어떤 위치에 있든지 아버지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아끼고 사랑하고, 누구든지 가슴에 품는 자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적 맏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품지 않고, 아버지께 받을 유산만 탐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의 동생 둘째보다 훨씬 더 교만하고, 훨씬 더 완악한 존재가 바로 이 맏아들입니다.
결론
오늘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너희의 그릇과 마음을 넓혀 영적 맏아들의 지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부디 알아달라는 하나님의 호소가 이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를 오해하지 않고, 아버지의 자원을 누리며, 아버지의 심정으로 형제를 품는 삶—이것이 맏아들다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마음 안에 함께 거하시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맏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좁은 소견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 맏아들의 지위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질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둘째를 수용하고 받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된 후에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시켜 주신 이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여, 잔칫집에 들어가지 않고 분노하고 화를 내는 악한 자 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원을 충분히 이해하고, 우리도 하나님의 자원을 사용하는 지혜로운 자 되도록 도우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영적 맏아들의 지위를 온전히 깨닫고 회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