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 15 - 포도원 품꾼
본문: 마태복음 20:1-16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는 한국에서 200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입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제목 그대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려면 구성원들에게 합당한 자원을 분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당한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샌델 교수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흐름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공리주의적 입장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지향합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사회의 몫을 분배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부유한 이들에게 적은 몫을 나누어주면 그들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지나치게 많이 나누다 보면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줄어들어 그들의 삶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둘째는 자유주의적 모델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시장의 원리에 맡기자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자율 경쟁 체제에서는 정보와 지식을 풍부하게 갖춘 부유층이 더 많은 것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고, 가난한 이들은 가진 것이 없기에 무한 경쟁 체제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부와 가난은 대물림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 때문에 샌델 교수는 제3의 원리를 제안합니다. 공동체주의 원리로, 부자와 가난한 자,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함께 합의하여 꼭 필요한 곳에 자원을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본래 탐욕적인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 자신의 몫을 선뜻 내놓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모습을 살펴보면, 모든 기관에 n분의 1로 균일하게 분배하신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몸무게에서 뇌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2퍼센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뇌는 공급되는 에너지의 20퍼센트를 사용하고, 산소의 25퍼센트를 소비하며, 몸에 흐르는 혈액의 약 20퍼센트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인체가 뇌에 에너지와 산소와 혈액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뇌가 그만큼 중요한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렇게 창조하셨습니다. 만약 인체의 모든 기관에 '공평'이라는 이름으로 자원을 균등하게 나누어 버렸다면, 그것이야말로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결과를 초래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해 가시는 방식이 사람의 관점에서는 정의롭지 않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구원의 참된 정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구원의 원리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되새기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마 20:1)
이 말씀의 머리와 꼬리만 끊어서 읽으면, "천국은 집 주인과 같다"는 선언이 됩니다. 여기서 집 주인은 두말할 것 없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다시 읽으면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와 같다"가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천국을 죽어서 가는 피안의 세계, 저 멀리 있는 공간적 세계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죽은 후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경 곳곳에서 천국을 공간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죽어서 가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논리를 따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진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구약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깊은 사랑을 받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채색 옷을 지어 입히고, 노동을 면제시키고, 모든 것을 물려줄 적자로 일찍이 결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데다 요셉은 항상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형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 버립니다. 은 이십에 인력 시장에서 팔려간 그는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됩니다. 노예가 되었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고 그곳에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가 되어 모든 제반 사무를 관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탄이 시험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믿어 주고 아껴 주었던 보디발과의 의리와 신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하여 감옥에 들어갑니다. 노예였다가 다시 죄수가 된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은 요셉 인생의 밑바닥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열한 번째 아들이 한순간에 노예로 팔려 가고, 믿음을 지키다가 다시 죄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보다 더한 밑바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요셉에 대해 성경은 놀라운 반전을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2)
이 말씀은 요셉이 노예로 살 때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다음은 죄수로 있을 때를 요약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창 39:21)
두 말씀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말씀과 오늘 본문 1절을 함께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기에 요셉은 비록 노예로 살았으나, 비록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믿음으로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노예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천국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억울한 일을 당해 감옥에 죄수로 갇혀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이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논리를 따르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바로 천국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2년째를 지나고 있는 지금, 지난 2년 동안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컸습니까? 인생의 깊은 나락에 빠져 있거나,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힘들고 어려운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 나가고 있는 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기만 하면 이 상황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희망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시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된다는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과제가 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북쪽으로 가시는데 내가 남쪽으로 가면서 동행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밖에 없습니다.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하며 엎드려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를 굳건히 붙잡을 때,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천국을 누리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디 이 어려운 시기에 요셉처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 알며,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천국의 삶을 누리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구원의 주관자, 하나님
이제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비유의 말씀을 펼쳐 주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구하러 나갑니다. 포도원에 시킬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인력 시장에 나간 주인은 사람들을 불러 포도원에서 일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마 20:2)
일상적인 계약입니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계약을 맺고, 하루종일 열심히 일하면 해 질 무렵에 임금을 지불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세 번에 걸쳐 또 다른 일꾼들을 구해 옵니다. 제삼시, 제육시, 제구시에 나가서 다시 일꾼들을 데려옵니다. 유대인의 시간에 6을 더하면 오늘날의 시간이 됩니다. 제삼시, 제육시, 제구시는 각각 오전 9시, 낮 12시, 오후 3시를 의미합니다. 주인이 이렇게 세 번이나 더 나가서 일꾼들을 데리고 온 이유는, 포도원에 일할 것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에 보낸 일꾼들만으로는 그 일을 다 감당할 수 없었기에,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하면 훨씬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벌어집니다.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마 20:6-7)
제십일시는 오후 다섯 시입니다. 통상적으로 오후 여섯 시에 해가 지면 그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시점입니다. 고작 한 시간을 시키려고 사람을 데려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시간까지 인력 시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도 쓸모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런 사람들까지 데려다가 포도원에 보내셨습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하루의 노동이 끝나고 임금을 결산할 때 벌어졌습니다.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마 20:9-10)
맨 마지막에 온 사람들,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에게 주인이 한 데나리온씩을 지불했습니다. 이른 새벽에 온 사람들의 기대감이 한껏 고조됩니다. 비록 한 데나리온으로 계약했지만, 저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니 자신들에게는 최소한 다섯 데나리온 정도는 주겠거니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셨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 20:11-12)
이 정도의 불평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지 않았겠습니까? 어떻게 이것을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인이 이 사람들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대답하십니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 20:13-14)
주인은 두 가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한 데나리온으로 계약하지 않았느냐, 그 계약대로 이미 받았으니 무엇이 문제냐는 것입니다. 둘째, 나중 온 사람들에게 내 돈으로 내가 주고 싶어서 한 데나리온을 주는데, 왜 그것을 문제 삼느냐는 것입니다. 이 대답에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반박할 방법이 없습니다. 주인의 말이 옳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신 이유는 구원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일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그 다음 날부터 이 주인은 일꾼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른 새벽에 갈 필요 없이 오후 다섯 시에 가면 한 데나리온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원의 주관자가 누굽니까? 구원의 주체가 사람입니까, 아니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 새벽부터 와서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늦게 발만 들여놓았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시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거기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많은 성도의 임종을 맞이합니다. 이따금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믿음생활을 잘하신 것 같은 분인데, 목사가 가서 "집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수고를 내려놓으시고 평안하게 눈감으십시오. 천국에서 눈 뜨실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면, 불안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한 일이 별로 없어서요.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듣는 목사는 마음이 무너집니다. 구원을 자신의 헌신과 수고의 대가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땀 흘리고 수고한 대가로 받는 것이 구원이란 말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의 주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우리뿐 아니라 과거 바울이 목회하던 시절에도 인간의 열심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할례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고,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야말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경 말씀을 깊이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원의 본질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 여행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나아가 선포합니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고백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후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들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였습니다. "할례 받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바울을 재판하라"는 아우성이 일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가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행 15:11)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받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헌신이나 수고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고, 타인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집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침에 온 자를 구원하시든, 해 질 무렵에 발만 들여놓은 자를 구원하시든, 그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인간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 때문에 이단들이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천지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지금도 내세우며, 그 숫자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집을 팔고 일을 그만두고 열심을 내라고 종용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단이 뿌리를 내리는 이유는, 공로주의가 알게 모르게 독버섯처럼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결코 인간의 헌신이나 수고나 봉사의 시간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주관자는 오직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한 분에게만 달려 있습니다. 또한, 새벽부터 와서 열심히 일한 사람이 "저 사람은 왜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까? 저 사람은 왜 구원받습니까?"라고 말할 자격조차 갖지 못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이며, 제3자가 거기에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새벽 품꾼의 참된 보상
이렇게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슴속에는 여전히 하나의 의문이 남습니다. 새벽부터 와서 열심히 일한 사람들에 대한 손해 의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왜 저를 새벽 일찍 부르셨습니까? 새벽부터 와서 열심히 일하느라 세상의 낙을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실컷 놀다가 세상의 온갖 기쁨을 다 누리고, 세상 떠나기 일 년 전에 와서 하나님 믿고 구원받으면 되었을 텐데, 왜 저를 일찍 부르셨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올 법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죽기 전 일 년 전에 와서 믿음생활 하면 된다고 안이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시간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재림주로 보내시고, 천사장의 호각 소리와 나팔 소리로 구름 타고 공중에 재림하시면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건강하더라도 내일 당장 하나님께 부름받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포도원 주인이 새벽 여섯 시에 종들을 불러 일을 시키다가 열 시에 문을 닫으면 그만이고, 일곱 시에 문을 닫아도 그것은 주인의 결정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해 질 무렵까지 시간을 연장해 주신 것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팔십까지 살 테니 일흔아홉에 하나님을 믿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장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첫째 날 빛을 만드신 그 순간부터 시간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 안에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내 삶의 끝이 언제가 될지, 우리가 언제 하나님 앞에 부름받을지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섬김과 봉사의 시간을 주실 때, 우리는 그때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새벽에 나와서 성실하게 일한 사람은 남들이 알 수 없는 큰 기쁨과 보람을 이미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 오십 년, 육십 년을 한 교회에서 섬긴 어른들 가운데, 나이 칠십이 되고 팔십이 되어서 "목사님, 저는 후회됩니다. 왜 이렇게 열심히 섬겼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분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권찰로 섬기고, 구역장으로 섬기고, 교회학교 교사로 섬기고, 성가대로 섬기고, 주방 봉사로 섬기고, 교회에서 부탁한 일은 열심히 했는데, 그래도 남는 건 후회밖에 없습니다. 더 열심히 못 해서, 더 성실하게 감당하지 못해서, 지금은 몸이 늙고 병들어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 없으니 아쉽습니다. 그때 더 열심히 할 걸요."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전에서 어린 영혼들을 수십 년 동안 돌보신 분들, 그 안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 어린 영혼들이 성장하고 자라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구원받고 변화되어 믿음의 가문을 이루는 것을 보면,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기쁨입니다. 구역장으로 봉사하면서 비록 연약하지만 그 가정을 위해 기도했을 때, 가정이 변화되고 병든 문제가 낫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놀라운 은총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로 성실하게 섬기면서 그 찬양하는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기쁨,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적 기쁨입니다.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받을 상급과 선물을 열심히 일하면서 보람 가운데 이미 누린 자들입니다. 주인에게 나아와 "새벽부터 일했는데 왜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느냐"고 원망하는 자들은 성실하게 일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새벽에 주인의 부름을 받았지만 주인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에서 낮잠이나 자던 자들, 이런 자들이 원망하는 것입니다. 보람을 누리지 못했기에, 그 안에 영적인 기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론
오늘 이 말씀이 주는 귀한 의미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한가운데를 걸어가더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새벽에 부름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붙잡은 은총이며, 동시에 지금까지 성실하게 일하면서 우리는 이미 큰 상급과 기쁨과 보람을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구원의 은혜 앞에서, 주어진 시간을 감사함으로 붙잡고, 성실한 섬김 속에서 넘치는 기쁨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 여러 가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공간이 아니라, 고난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그곳이 천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상황은 어렵지만, 아버지의 뜻을 묻고 기도하며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과 함께 걷는 천국의 삶을 누리게 하옵소서. 구원은 인간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말씀하셨사오니, 그 은혜를 입은 자로서 새벽에 부름받은 자로서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 감당하게 하옵시고, 그 가운데 느끼는 보람과 기쁨으로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