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3 / 부자와 나사로 (눅16:19-31)

부자와 나사로

본문: 누가복음 16:19-31

톨스토이(Tolstoy)가 쓴 단편소설 중에 「주인과 하인」(Master and Man)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주인공 바실리(Vasily)는 돈은 많으나 탐욕스러운 상인입니다. 그의 탐욕은 온 동네와 인근 각지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를 모시고 사는 하인 니키타(Nikita)는 더없이 선량한 사람입니다. 주인이 통상 임금의 절반만 주고 자신을 고용했는데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킵니다. 나머지는 주인의 집에 있는 음식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불만을 품지 않고 주인을 성실히 섬기며 지냈습니다.

어느 날 주인 바실리가 말합니다. 오래전에 흥정해 놓은 먼 곳의 숲이 있는데 그 숲을 사기 위해 길을 떠나자고 합니다. 니키타는 말을 준비하고 길 떠날 채비를 합니다. 바실리와 니키타가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가던 중에 눈보라를 만났습니다. 보통 눈보라가 아니었습니다. 인근의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잠시 눈보라를 피했지만,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바실리는 마음이 달았습니다. 계약 당사자가 마음을 바꿀까 염려하여, 아직 눈이 그치지도 않았는데 길을 재촉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을 부리고 길을 나섭니다. 하는 수 없이 니키타도 주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견딜 수 없는 눈보라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깊고 넓게 파인 구덩이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그 구덩이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런데 이미 니키타는 얇은 옷을 입고 있어서 탈진한 상태였고, 몸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습니다. 바실리는 하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말을 타고 떠나 버렸습니다. 하인이야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계약을 위해 말을 몰고 떠납니다. 곧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채찍질하고 눈보라를 헤치며 한참을 달렸지만, 결국 돌아온 곳은 하인이 쓰러져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른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바실리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러다가 길을 잃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인을 보니 이제 거의 숨이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바실리는 하인을 땅바닥에 평평하게 눕혔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엎드렸습니다. 평생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하인 위에 엎드려 자신의 체온으로 하인을 녹여주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눈보라가 멈추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살펴보니 바실리는 차갑게 굳어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에 있었던 하인 니키타는 체온도 맥박도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러시아 문학에서 대지에 엎드리는 행위는 순명과 속죄의 의미로 이해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타인을 위한 인생을 살지 않았던 바실리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이 짧은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우리 앞에는 항상 선과 악의 선택이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타인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 순간 타인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고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순간, 과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 예수님께서 주신 비유의 말씀도 바로 오늘, 현재적인 우리의 삶을 강조합니다. 이 순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고 있는가, 바로 이 순간의 결단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 천국과 지옥을 좌우할 것입니다.

껍데기 너머의 진실

오늘 본문의 비유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부자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눅 16:19)

예수님은 부자를 설명하실 때 옷을 통해 그의 신분을 드러내셨습니다. 자색 옷, 그리고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 자색 옷을 입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색 옷은 대단히 귀한 옷이기 때문입니다.

자색 옷감을 물들이는 염료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달팽이가 필요합니다. 달팽이가 내뿜는 맑은 액체를 효소와 함께 제조하면 로열 퍼플(Royal Purple)이라는 진한 보라색 염료가 나옵니다. 달팽이 약 12,000마리를 투여해야만 겨우 1.4그램의 염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대 로마(Roma)에는 이 때문에 왕립 공장이 있었습니다. 개인이 이렇게 달팽이를 가지고 염료를 생산하면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귀한 염료로 염색된 옷감은 왕이나 왕의 직계 가족, 혹은 전쟁에서 승리한 전승 장군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기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대번에 이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왕의 직계가족이거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구나. 그런 사람에게는 당연히 부귀영화가 따라옵니다. 날마다 호화롭게 즐길 만큼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또한 이 사람은 고운 베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친 옷감을 입었습니다. 양털이나 염소 털, 굵은 베로 된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만이 고운 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옷으로 부자의 부유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거지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눅 16:20-21)

거지의 옷은 아예 설명조차 하지 않습니다. 언급할 만큼 변변한 옷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몸이 헌데 투성이이고, 개들이 와서 핥고 있으며,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할 특징이 있습니다. 이 거지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반면 부자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어떻게 그가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요. 부모가 태어날 때 지어준 이름이었을까요. 부모가 있었다면 그가 이토록 비참한 상태로 동냥하고 있었겠습니까. 혹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지금 당신이 나에게 한 푼만 주시면 그것으로 연명합니다"라고 자기 입으로 되풀이하여 말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나사로라고 불렀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되었건 그에게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부자에게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셨지만, 거지에게는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부자에게 이름이 없었겠습니까. 당연히 이름이 있었습니다. 전승 장군이든 왕의 직계 가족이든, 대단한 권세를 가진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이름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성경은 의미의 책입니다. 시간을 기록하든,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든, 의미 있는 내용만 기록합니다. 수백 년, 수천 년의 길고 긴 기간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 아무런 의미가 없으면 단 한 줄도, 단 한 자도 성경에 기록하지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단 하루라 하더라도 의미 있는 사건이라면 성경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깊고 상세하게 기록하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1장, 이렇게 네 권의 복음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불과 3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3년의 기간이 이토록 상세하게 기록된 까닭은, 이 시기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사역의 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고하셨던, 창세기에서 약속하셨던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성경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단 한 자도 없습니다. 카이사르(Caesar)에 대한 기록도 성경에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를 대단한 제왕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의 역사는 죄의 역사요 악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역사였기에 기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을 기록할 때도 하나님은 같은 원칙을 적용하십니다. 의미 있는 사람의 이름만 기록하십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출 1:15-17)

애굽 왕의 이름이 없었을까요. 말씀을 자세히 보면 성경은 애굽 왕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애굽 왕의 대표 명사인 '바로'라고만 칭하지, 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의미 없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의 이름, 십브라와 부아라는 이름은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누가 더 높겠습니까. 히브리 산파는 존재감 없는 여인들입니다. 여인이고, 배우지 못한 노예이며, 식민지 백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 여인들의 이름에 가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애굽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셨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애굽 왕의 이름은 기억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부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으십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이름조차 부르지 않으십니다. 반면 거지의 이름, 나사로라고 분명히 기록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라고.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분을 나타내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날마다 귀한 잔치를 베풀며 사람들을 초대해서 배불리 먹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에게 매혹됩니다. 그러나 그 집 앞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는 거지 나사로, 우리는 오히려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가치가 옷과 권력에 달려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 요셉에게 채색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당시 채색 옷을 지어 입혔다는 것은 '너는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고, 동시에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열두 아들 중 너에게만 상속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장자권을 가진 아들이라는 표식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그렇게 확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입혀준 채색 옷을 하나님이 벗기십니다. 대신에 노예의 옷을 입히십니다. 대신에 죄수의 옷을 입히십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훈련을 마친 후에, 하나님은 그에게 이집트(Egypt) 총리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입혀주셔야 그 옷이 참된 옷이 됩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좋은 옷을 걸치고 다녀도, 제아무리 좋은 신분과 권력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천국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비록 헐벗고 가난하고 병들어 살아도,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시면 그 이름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더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껍데기에 매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내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그분을 사랑하며, 우리 스스로도 겉치레를 포장하려고 애쓰거나 노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더 소중한 것,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인가, 하나님이 내 이름 석 자를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하실 만큼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고 있는가, 이것을 기억하시고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뒤바뀐 운명, 닫힌 문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 16:22)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죽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부잣집 종들이 문을 열고 나와 보니 거지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잖아도 귀찮은 존재였는데, 매일 먹을 것을 달라고 해야 하고 걸리적거리는데, 잘 죽었구나 하며 얼른 가서 처리하고 묻어 버렸을 것입니다. 연고도 없고, 부모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반면 부자가 죽었습니다. 어떤 장례가 이루어졌겠습니까. 문전성시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왕의 직계 가족이든 전승 장군이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발 디딜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서도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던 사람이었으니, 죽어서도 그 권세와 위세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부의금 봉투가 오갔으며, 많은 이들이 그 가족에게 잘 보이려고 허리를 숙였을 것입니다. 화려한 장례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어떠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좋은 가문이구나, 훌륭한 공을 세운 이의 가시는 길이 저렇게 아름답고 화려하구나' 하고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지의 죽음을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말했겠습니까. "불쌍한 인생"이라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광경이 완전히 다릅니다. 거지가 죽었을 때 천사가 와서 받들어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천국으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심부름꾼 천사들을 보내셔서 그 영혼을 모셔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죽었을 때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저 '장사되매'라고만 기록됩니다. 사람들의 손에 의해 장사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이 죽음은 지옥의 문이 열린 죽음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매일같이 잔치를 즐기고, 매일같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자랑했지만, 그 옷이 천국을 보장하는 담보물은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서 비록 가난하고 병들어 개들이 그 헌데를 핥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나사로는 죽은 후에 천사가 그의 영혼을 받들어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했습니다.

부자는 지옥으로, 거지 나사로는 천국으로 갔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타는 열기 때문에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시켜서 손끝에 물 한 방울만 묻혀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거절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 16:25)

서양 사람들은 이렇게 불확실한 세상 가운데서 확실한 것은 딱 두 가지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세금, 둘째는 죽음입니다. 세금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죽음만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데, 죽음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건강하니까, 나는 아직 젊으니까,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가장 가까운 일가친척이나 가족이 세상을 떠나야 그제서야 죽음이 현실로 와닿습니다. 그러나 부자도 거지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 이후에 부자는 지옥으로, 나사로는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자가 악행을 행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가운데 부자가 악한 사람이었다는 언급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날마다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으니,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먹였을 것입니다. 동시에 거지 나사로가 선행을 베풀었다는 말도 단 한 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합니까. 천국은 선행을 쌓아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옥은 악행을 저질러서 가는 곳도 아닙니다. 지옥과 천국은 우리의 선행과 악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까. 나사로라는 이름에 그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나사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천국에 이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권력과 자기 생각과 자기 인생과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자는 도움받을 길이 없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을 의지한 거지 나사로에게는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후 1:9)

우리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형 선고를 받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고, 살면서 죄를 짓습니다. 그 결과는 결국 사형 선고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내가 나 자신을 의지해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말하지 않습니까.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그래야 구원받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구원받은 이유, 그가 천국에 들어간 이유는 사형 선고를 받은 자신의 인생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나사로라는 이름을 통해 그 진리를 깨닫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부자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자기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자색 옷을 의지했습니다. 왕의 직계 가족만 입을 수 있는 이 옷을,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자만 입을 수 있는 자신의 빛나는 과거를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원을 이룹니까.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진실로 붙잡고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이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닫고 하나님 한 분만 붙들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결단

부자는 한 번 거절당한 이후에 또 다른 청원을 아브라함에게 드립니다.

"이르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 16:27-28)

자신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미 지옥에 왔습니다. 그런데 제발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의 집에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형제가 다섯이 있으니,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형님이 지금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이 소식을 들려준다면, 그들 모두 구원받는 백성이 될 것이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탁을 받은 아브라함의 대답을 보십시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 16:31)

모세와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모세는 모세 오경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그 율법을 해석하여 선포하고 전하는 성경의 교사들을 말합니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있는데 그것을 읽지 않는 자, 선포된 말씀인 설교가 전파되고 있는데 그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 자, 현재 이 자리에서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데 그 말씀 앞에서 결단하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있다 할지라도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의미는 구원은 오늘, 현재적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부자가 살았을 때도 말씀이 있었습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쁨과 영화가 워낙 크고 놀라워서 구원이라는 데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살 줄 알았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1-2)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말씀이 선포되는 그 '지금'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흘려보냈습니다. 흘려보내고 지옥불에 떨어져서 후회하고 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전해지는 성경의 말씀, 그 말씀을 붙들고 회개하며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듣고 내일 실천하고, 내일 실천하지 않으면 1년 뒤에 실천하겠다고 미루어 둘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즉각 그 자리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즉각 그 자리에서 결단하고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주위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지금부터 기도하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그들에게 전하셔야 합니다. 미루어두면 그들의 영혼과 생명을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또한 이 말씀이 주는 깊은 교훈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돌이키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기적이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인생에 획기적인 기적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잘 섬기겠는데, 변치 않고 주님을 섬기겠는데, 믿음생활을 성실하게 감당하겠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 11:43-44)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요 11:53)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살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죽은 지 시간이 오래 되어 냄새가 났습니다. 돌문을 굴려 놓으라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예수님을 비방하던 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던 자, 모두가 그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돌이켜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들은 이 날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역사적인 기적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악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은 무엇입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선포된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쪼개져서, 그때 결단하고 그 순간 돌이키는 것, 이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적보다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결론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비유의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나는 오늘 이 순간을 붙잡고 있는가. 나는 말씀 앞에서 변화되고 있는가. 부자는 자기를 의지했기에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했고, 나사로는 하나님을 의지했기에 생명책에 이름이 남았습니다. 부자는 '지금'을 흘려보냈기에 후회만 남았고, 말씀보다 기적을 구한 자들은 끝내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을 근본부터 뒤흔들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돌아보며,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삶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는 진리의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부자처럼 하나님 앞에 의미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거지 나사로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름이 기록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가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있고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 땅에서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구원은 오늘 현재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루지 않도록 도우시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도, 전하는 것도 지금 이 자리에서 행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셨으니,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됨을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 온전히 변화된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