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자
본문: 마태복음 13:1-23
1597년 7월 15일, 칠천량 앞바다—지금의 거제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게 참패를 당합니다. 당시 지휘관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었습니다. 16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원균은 전사하고, 겨우 열두 척의 배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게 당한 첫 패배였으며, 그 참상은 심각하고 참혹했습니다. 그 무렵 이순신(李舜臣)은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은 충격에 빠졌고, 감옥에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하여 내려보냅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두 달이 지난 1597년 9월 16일, 울돌목 앞바다—지금의 진도 앞바다 명량(鳴梁)—에서 위대한 해전이 벌어집니다. 이순신은 열두 척에 한 척을 더하여 열세 척의 배로 왜적 133척, 3만여 명의 군대와 맞서 싸웠습니다. 전투 결과 31척을 침몰시키고 8천여 명의 적병을 수장시켰습니다. 위대한 전과를 올린 것입니다.
두 달 전과 두 달 후에 달라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상황은 오히려 더 열악해졌습니다. 원균은 160척을 이끌고 싸웠고, 이순신은 13척으로 싸웠습니다. 군사도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도망쳐 흩어진 뒤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승리했고 원균은 패배했습니다. 그 사이에 신무기가 개발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원균에서 이순신으로 지휘관 한 사람이 바뀌었을 뿐인데, 하늘과 땅 차이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도, 사회에서도 흔히 목도하는 현상입니다. 조건은 동일하고 구성원도 같은데, 지휘관 한 사람이 바뀌면 조직 전체의 성과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현대는 기술 문명의 시대이고,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삶을 주도하는 세상입니다. 로봇이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로봇을 만들고 프로그래밍하는 주체는 결국 사람입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말씀을 듣는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본문에는 무리도 등장하고 제자도 등장합니다. 주님은 무리에 머물러 있지 말고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이 아직 무리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제자의 삶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리의 마음, 제자의 마음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마 13:1-2)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전하실 때는 대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학자 등 특정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나와 질문할 때에도 그 사람에게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다릅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무리는 이처럼 예수님께 모여 말씀을 듣기도 하고, 기적을 행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로는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쫓아다녔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바로 그런 주님을 바라고 무리는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오늘 본문의 무리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무리를 대상으로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한편, 본문에는 무리만이 아니라 제자도 등장합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비유의 말씀을 풀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 13:10-11)
제자들에게는 비유를 하나하나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지만, 무리에게는 알듯 말듯한 비유만 들려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제자들과 늘 함께 다니시고, 함께 먹고 주무시며,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길러가기 위해 주님은 숨기시는 것이 없었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시려고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복음서에서 무리와 제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27절, 33절은 무리와 제자가 얼마나 다른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5-27)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33)
한마디로, 제자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혈연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십자가를 반드시 져야 하며,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기준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무리에 가까운 사람입니까, 제자에 가깝습니까?
사람은 혈연을 버리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추석이나 설 명절이 되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형제와 가족을 만나러 달려갑니다. 그 혈연의 끈을 어찌 끊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거추장스러워합니다. 섬김의 자리, 봉사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귀찮고, 그것 때문에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모은 소유를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목표를 정해놓고 "이만큼 모을 때까지 신앙은 잠시 접어두겠다"고까지 말합니다. 사람의 소유에 대한 집착은 그처럼 강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 우리도 제자보다 무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를 대상으로 설교하시면서도 관심은 제자들에게 두셨습니다. 주님은 본문을 통해 무리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시며, 이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제자의 마음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분주함이 빼앗은 말씀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 13:3-4)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말씀을 전하시는 분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께서 전하시는 말씀입니다. 씨앗 속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시는 말씀 가운데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설하셨습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마 13:19)
길가와 같은 마음에 예수님께서 생명의 씨앗을 뿌리셨는데,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여기서 새들은 '악한 자'라고 예수님이 설명하셨습니다. 이 악한 자는 흉기를 든 흉악범이나 불량배가 아닙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분주한 곳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 그 자체가 악한 자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는데 그 말씀을 돌보고 가꾸어 뿌리 내리게 하고 성장시킬 여력이 없는 우리의 상태, 바로 그것을 악한 자요 새들이라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바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쁘다고 합니다. 성도 가운데 목사에게 와서 "시간이 남으니 무슨 일이든 시켜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분은 없습니다. 모두가 바쁘다고 합니다. 실제로 살펴보면 몹시 바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길가와 같은 바쁜 일상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정착시키고 뿌리 내리게 가꿀 여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시간이 남아서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시간은 남지 않습니다. 시간을 내야 합니다. 시간을 할애하고, 우선순위를 정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익히고 뿌리 내리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연초에 창세기부터 성경 읽기를 시작합니다. 창세기는 재미있게 읽습니다. 출애굽기도 20장까지는 읽을 만합니다. 그런데 그 뒤로 넘어가면 내용이 난해하여 읽기가 어렵습니다. 레위기나 선지서로 들어가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덮어버리고 포기합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교회에서는 여러 성경 공부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성경 공부에도 힘쓰지 않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시간만 내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데도, 게을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다른 일에는 성실하면서 말씀 읽는 데는 성실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되어 새들이 말씀을 먹어버리고 악한 자가 말씀을 빼앗아가도 평소에는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 큰 어려움이 밀려올 때 그것은 금세 드러납니다.
인생의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합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을 찾아다니고, 돈줄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을 붙잡고 이겨내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위기에서 승리하게 하고 이겨내게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위기가 닥쳤는데 붙잡을 말씀이 없습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악한 자가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생각나는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할지, 어떤 말씀을 위로로 삼아야 할지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인생에서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사울이 그를 쫓아다녔고, 십수 년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가 지은 시편의 상당수는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 광야에서 지은 것입니다. 그 시편은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아름다운 시를 지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올려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해박하고, 그 말씀을 마음 깊이 품고 있었던 다윗이었기에 인생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 그 말씀을 붙잡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없을 때가 진짜 위기입니다. 돈이 없어서 위기가 아니고, 몸이 아파서 위기가 아니며, 관계가 무너져서 위기를 겪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없어서 위기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되어 늘 바쁘고 분주하다는 핑계로 말씀을 후순위로 밀어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이후에 진짜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것이 무리의 비참한 영적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말씀을 준비하고 되새기며 제자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뿌리 없는 삶의 허무함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 13:5-6)
흙이 얕은 돌밭의 특징은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싹은 금방 나오지만 금방 말라버립니다. 예수님은 흙이 얕은 돌밭을 이렇게 해설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 13:20-21)
뿌리의 위치와 기능을 생각해 봅시다. 뿌리는 흙 속에 있습니다. 식물 가운데 흙 위에 있는 것은 모두 사람의 눈에 드러나 보이지만, 뿌리는 흙 속에 묻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합니다. 뿌리는 사람에게 심장과 같은 구실을 합니다. 심장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듯, 뿌리가 없으면 식물은 생존할 수 없습니다. 양분을 빨아올리고 물을 끌어들여 줄기와 가지와 잎과 열매로 공급하는 역할을 뿌리가 담당합니다.
뿌리가 없다는 말, 흙이 얕은 돌밭에 뿌려진 씨앗 같다는 말은 뿌리에 집중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참으로 중요한 가치는 무시한 채 눈에 보이는 세상 풍조와 가시적인 것만 쫓아 살아가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얼마나 유혹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본질적인 뿌리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 뿌리는 내팽개치고 아름다운 꽃만 피우기를 원하며 탐스러운 열매만 맺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꽃을 원하고 튼실한 열매를 원한다면, 역설적으로 뿌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뿌리를 잘 가꾸면 꽃과 열매는 저절로 따라오는 법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자유가 없습니다. 이미 뿌리를 깊이 내렸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옮겨 다닐 수가 없습니다. 불편하고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가뭄이 와도 걱정이 없습니다. 시냇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에서 물을 끌어올리고 양분을 끌어올려 나무를 튼튼하고 푸르게 만들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거칠게 돌아가도 그 나무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뿌리가 튼튼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는 자유롭습니다. 창공을 떠돌며 마음대로 날아다닙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으므로 열매도 없습니다. 뿌리 없는 인생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흙이 얕은 돌밭의 뿌리 없는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 세상의 가치, 세상의 풍조를 쫓다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보이지 않는 영적 투쟁 가운데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염려가 삼켜버린 열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 13:7)
식물이 자라려면 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시떨기 속에 씨앗이 떨어집니다. 가시떨기의 기운이 강하여 씨앗이 뿌리 내리고 자라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마 13:22)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염려합니다. 걱정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 위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걱정은 물질 걱정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합니다.
삼사십 년 전에는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먹고살 끼니가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그런 걱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걱정은 무엇입니까? 더 잘살 걱정을 합니다. 재테크 걱정을 합니다. 지금 가진 것을 더 불려서 자녀들에게 화려한 미래를 물려주려 합니다. 투자를 걱정하고, 투자와 투기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에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걱정의 끝이 어디인지를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보여줍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0)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창 13:13)
롯은 농사짓기 좋고 목축하기 좋은 땅을 원했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소돔 땅으로 미련 없이 떠나버렸습니다. 성경은 소돔 사람이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롯에게 그것은 아무런 장애 요소가 되지 않았습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목축만 잘 할 수 있다면, 인생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걱정만 해결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돈은 벌었습니다. 목축도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식 농사를 망쳤습니다.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그의 두 딸이 소돔 땅의 문화에 중독되었습니다. 아버지와 동침하여 자녀를 낳으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죄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쫓아갔다가 자녀들의 영혼이 망가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에 멸망할 때 그 땅을 빠져나오다가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물질 문명에 중독되고, 딸들은 음란한 문화에 중독되고, 그 가정은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물질에 대한 걱정, 재물에 대한 유혹을 해결하겠다고 소돔 땅에 들어갔지만, 결국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염려와 걱정의 끝이 이것이라면, 우리는 왜 염려합니까?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지금의 삶이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염려해야 할 것은 재물에 대한 유혹이나 먹고살 걱정이 아니라 영적인 염려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땅을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백 년 남짓한 인생을 살다가 이 땅을 떠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달란트도 주고, 교회 공동체도 주고, 섬길 수 있는 직분도 주었는데, 너는 얼마나 성실하게 믿음의 삶을 감당했느냐?"
달란트를 받은 것도 사실이고,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를 받은 것도 사실이며, 직분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살다가, 홀연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나를 이 땅에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드릴 것인가—이것을 염려하면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다른 것은 못해도 이것 하나만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준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한 염려가 아니라, 가치 있는 인생의 염려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좋은 땅, 제자의 마음
예수님은 이어서 비유를 통해 무리의 영적 상태가 아닌, 제자의 마음 상태를 말씀하십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8)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 13:23)
좋은 땅은 어떤 땅입니까? 길가와 같은 분주함이 정돈된 땅입니다. 흙이 얕은 돌밭에서 돌을 다 기경하고 끄집어낸 땅입니다. 가시떨기를 모두 뽑아내고 깨끗하게 정비한 땅입니다. 제자의 마음은 무리의 마음을 정리하여, 하나님께서 말씀의 씨앗을 주실 때 그 씨앗을 받아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게 하는 땅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땅을 원하십니다. 수많은 무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 같은 마음이라면 주님은 그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열두 명뿐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좋은 땅, 제자의 마음이라면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농사를 짓자면 여러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농부가 경험 많은 노련한 농부여야 합니다. 천기를 분별하고, 좋은 씨앗을 가려내며, 씨 뿌리는 시기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씨앗도 좋아야 합니다. 가라지나 쭉정이가 아닌 생명력 있는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땅도 비옥해야 하고, 비가 적당히 오며 일조량도 적절해야 합니다.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될 때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유독 땅만 문제 삼으십니다.
생각해 보면 답은 하나입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는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완벽한 농부이십니다. 하나님도 완벽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도 완벽하십니다. 흠잡을 데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씨앗은 생명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쭉정이가 아니라 모든 말씀이 알곡이며, 모든 씨앗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환경을 주관하십니다. 농사짓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유독 한 가지, 사람의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마음밭, 그것이 사람의 영역입니다. 결국 내가 문제입니다. 농부도 완벽하시고, 씨앗도 완전하며, 환경도 완벽합니다. 나만 잘하면 됩니다. 내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왜 나의 인생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 돌아보면 하나님도 문제가 아니고, 말씀도 문제가 아니며, 환경도 문제가 아닌데 결국 내가 문제였습니다. 분주하다는 핑계로 길가와 같은 마음을 내버려두었고, 뿌리에 집중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았으며,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에 말씀을 멀리하며 살았습니다. 결국 내가 문제였습니다.
나만 잘하면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
결론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 13:9)
수많은 무리 가운데서 알아들을 수 있는 자만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비유는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입니다. 나의 마음밭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분주함에 잠식당한 길가입니까,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돌밭입니까, 세상 염려의 가시떨기가 무성한 밭입니까?
완벽한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생명력 넘치는 말씀의 씨앗을 뿌려주시고, 최적의 환경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밭입니다. 무리의 마음을 정리하여 좋은 땅을 일구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에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완벽한 농부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력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환경도 안전하고 정확하게 주관해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었습니다. 길가와 같이 분주했고, 흙이 얕은 돌밭같이 뿌리가 없었으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하느라 말씀을 가꾸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는 말씀 앞에 우리의 마음밭을 좋은 땅으로 일구어, 귀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무리의 마음이 아니라 제자의 마음이 되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에서 꽃 피우고 열매 맺도록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