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강 /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15:1-5)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본문: 창세기 15:1-5

태조 이성계는 1392년에 조선을 창건했습니다. 고려 말기의 복잡하고 어지러운 국내외 정세를 조선 창건이라는 일대 사건으로 희망의 시대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희망도 7년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이성계의 여덟 아들 중 막내를 세자로 책봉했고, 이에 반감을 품은 이방원과 그 일당이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왕자들 사이에는 반목이 깊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이성계는 함흥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 역시 평생을 전쟁터에서 싸우고 피 흘린 장군이었습니다. 나라를 세운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함께 피 흘렸던 공신들이 자기 아들의 칼에 죽어 나가고, 아들끼리 서로 죽이려고 다투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 수 없어 함흥으로 떠났습니다. 함흥에 들어온 그는 소나무를 지극히 아꼈습니다. 소나무와 말을 나누고, 소나무 옆에서 활을 쏘기도 하고 활을 걸어두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함흥 본궁송'이라 불리는 나무입니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이 함흥 본궁송을 멋지게 그렸습니다.

아무리 멋진 소나무라 하더라도 말할 수 없는 식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위대한 장군도 사람을 믿을 수 없고 신뢰하지 못해서 소나무와 소통했던 이 웃지 못할 일이 오늘 우리에게도 왜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 실망하고 때로는 배신당하며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인생이 오늘 우리 가운데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람도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불안의 근원을 해소해 주시며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위대함과 극진한 사랑이 오늘 우리 삶에도 그대로 임하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불안 속에서 드린 기도

소돔 땅에 살고 있던 롯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왕들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포로가 되었고 재물을 빼앗겼습니다. 롯 입장에서는 재앙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롯을 사랑하셔서 그를 향한 놀라운 구원 계획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한 번에 망쳐버렸습니다. 그가 들어가서 전쟁을 하고 롯과 롯의 가정을 구출해 나오고 재물을 찾아주었습니다. 아브람의 기대는 한 가지였습니다. 롯을 다시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재물을 찾아준 것이 역효과가 나서 롯의 가정은 소돔 땅에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롯의 가정을 위해서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는데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허무감이 몰려왔습니다. 오히려 두려워졌습니다. 보복당할까 봐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돌라오멜과 그를 둘러싼 일당들이 아브람과 동맹한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그돌라오멜과 그의 동맹군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아브람과 318명의 전사들이 가서 승리하고 돌아왔으나, 전면전을 일으키면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떻게 싸워 이기겠습니까? 아브람은 이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보복이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불안과 초조,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십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하나님이 이런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나는 너의 방패가 되고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환상 중에 보여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환상은 기도하는 자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환상이 보이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오늘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엎드려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오시고 나타나십니다. 그중 한 가지가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지금 불안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제가 몹시 불안합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저의 불안을 거두어 가 주시고 저를 이 불안에서 건져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 시대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여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행 11:5)

베드로가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뼛속 깊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 취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중에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옵니다. 보자기를 열어보니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음식이 가득 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일어나 잡아먹어라." 베드로가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유대인으로 살면서 이 부정한 음식들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내가 정하다 하였으니 너는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을 멀리하지 말라, 교회 공동체 안에 이방인들을 환대하고 받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본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갔고,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을 만나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아브람도 불안해서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친히 찾아와 주셨습니다.

사람들마다 불안에 대처하는 방식이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을 합니다. 열심히 돈을 벌고 일을 하면 불안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은 모았는데 내 몸은 피곤하고, 일이 끝나고 나면 공허가 몰려옵니다.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불편하고 여전히 두렵고 걱정이 차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만납니다.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십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걱정 근심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 친구와 헤어지고 나면 더 큰 공허가 내 마음속에 찾아옵니다. 여전히 불안하고 불편하고 걱정 근심이 나를 짓눌러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불안의 근원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불안합니까? 사람들이 불안한 이유는 내 능력 밖의 일이 나에게 곧 닥치고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왜 불안하겠습니까? 해결하면 그만인데 왜 불안하겠습니까? 나의 능력으로는, 내 물질로는, 내 경험으로는 도대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브람 개인의 힘으로는 다가오는 보복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그는 불안과 두려움과 초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자이신, 전능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 밖의 일은 내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나를 지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손을 내밉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불안하니 하나님 친히 찾아오셔서 이 불안의 근원을 해결해 주십시오." 그래서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살다 보면 내 능력 밖의 일을 얼마나 자주 만납니까? 많이 만나지 않습니까? 될 대로 되라지 하고 그냥 던져두면 우리는 세상 세파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잡고 기도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주겠다. 막아주겠다.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 인생에 기도하는 자에게 친히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음성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집니다. 아브람의 상태가 과연 하나님께 이렇게 뻔뻔하게 기도해도 되느냐,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의 기도도 들으시고 친히 찾아오시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을 망쳐 놓지 않았습니까? 롯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아브람이 끼어들어가서 하나님이 롯을 건져오는 그 상황을 휘저어 놓고 말았습니다. 즉 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그가 망쳐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의 기도도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시는가, 이런 상황에도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아브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찾아오셨지 않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겠다." 좋으신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입술을 벌려 기도하기만 하면 아버지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건져주시는 분입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 14:29-31)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 건너 물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예수님께서 "걸어오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일으키는 풍랑이 베드로를 두렵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시선과 베드로의 시선이 마주쳐 있었을 때는 물 위를 걸어갔지만 시선이 흔들립니다. 바람이 일으키는 풍랑을 보고 마음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물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께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런데 예수님은 "너 왜 나를 의심했니? 왜 내 시선을 피했니? 너는 물 먹을 만큼 먹고 죽지 않을 때쯤 되어서 내가 너를 건져 주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의 손을 잡으시고 건져주셨습니다. 의심한 베드로도, 예수님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해서 물속에 빠져들어간 베드로도, 도와달라고 부탁만 하면 청원만 하면 우리 좋으신 주님께서 직접 손을 내밀어 즉시 건져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건져주시는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어떠함에도 상관없이, 우리가 죄가 있건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에 틀림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고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기만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시고 살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부디 이 기도의 능력을 믿고, 우리 마음속에 힘든 일이 있을 때, 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을 때, 하나님께 도움의 손길을 기도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미성숙한 믿음의 자화상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창 15:2)

아브람이 말하는 뉘앙스가 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직접 찾아와 주시고 "내가 너를 건져주겠다"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방패가 되고 상급이 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브람의 말에 가시가 있습니다. 볼멘소리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하신 두 가지 말씀 중 한 가지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의 방패가 되겠다. 내가 너의 큰 상급이 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방패가 되겠다는 말씀은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돌라오멜에게서 아브람을 지켜주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에게는 지금 상급이 아직까지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아들이 없지 않습니까? 자식이 없지 않습니까? 그의 인생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약속하셨는데 큰 민족은커녕 지금 자식 하나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지금 이 사단이 벌어진 것 아닙니까? 자녀를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롯을 자기 자녀로 삼겠다고 생각했고 롯에게서 미련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롯은 완전히 소돔 땅에 정착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말합니다. "내 종들 중에 똘똘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성실하고 말 잘 듣는 아이가 있습니다. 다메섹 출신인데 엘리에셀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세워서 내 후계자로 삼겠습니다. 나의 상속자로 삼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창 15:3)

아브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나를 탓하지 마십시오.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아브람을 어떻게 파악하고 계십니까? 이런 아브람은 어떤 모습입니까? 마치 철없는 아이가 부모에게 한 가지 때문에 부모를 욕하고 부모에게 서운한 말을 쏟아내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부모가 이 아이를 낳아서 길러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학교 보내주고 건강하게 돌봐주고 따뜻한 집에서 키워주고 여기까지 오게 했는데, 딱 한 가지 자녀가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을 이루어 주지 않았다고 해서 부모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쏟아내고 원망하는 자녀. 부모가 그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화나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내가 너에게 어떤 은혜를 주었는데."

지금 아브람이 꼭 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아브람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어떻습니까?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그를 건져주셨습니다. 죽은 동생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 하란 땅에서 그를 약속의 땅으로 건져주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견디지 못하고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와 롯이 공모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내를 빼앗기고 큰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고 아내를 다시 되찾아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고 아브람을 그 전쟁에서 다시 건져주시고 구출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돌아보면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가 만 가지, 천 가지입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나에게 자식 하나 주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까지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지금까지 만 가지 은혜를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이렇게 크고 놀라운데, 오직 딱 한 가지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이건 하나님 탓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씨를 주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는 아브람. 오늘 우리와 너무 닮아 있지 않습니까? 성도들 중에도 성숙한 성도가 있고 아직까지 미성숙한 성도도 있습니다. 미성숙한 성도의 특징은 피해 의식이 굉장히 많습니다. 받은 은혜가 많고, 교회 공동체가 그분에게 쏟아부은 사랑이 많고, 많은 분들이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해주고 돌봐주고,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도록 극진한데, 한 가지 문제에 걸리면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교회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믿음을 버리고 그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성숙한 성도는 반대로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공동체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먼저 세어보는 분들입니다. 지난 2월 셋째 주일 우리 교회 창립 기념주일이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지 못해서 선물을 드렸습니다. 일회용 미역국과 햇반을 담아서 드렸습니다. 교회 마당에 오시는 분들이 가족 수대로 받아가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 어느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딱 하나만 받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집에 식구가 여럿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쫓아가서 물었습니다. "몇 개 더 가져가십시오. 넉넉히 준비했습니다. 식구 수대로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랬더니 "저는 하나만 가져가서 우리 영감님하고 나눠 먹겠습니다." "아닙니다. 더 많이 가져가셔도 됩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만 가져가고 혹시라도 모자랄 수 있으니까 아이들이 넉넉히 먹을 수 있도록 남겨두고 싶습니다. 그래도 남으면 동네 이웃들에게 나눠주십시오." 그리고 극구 하나만 가져가셨습니다.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들이 우리 교회를 65년 동안 이렇게 든든하게 세워오셨구나. 이런 분들이 이렇게 헌신하고 성숙한 성도들이 교회를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세워오셨구나.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물론 반대의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돈의 팔촌급까지 가져가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숙한 성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 그 어르신이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뭇별을 보라, 시선의 전환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는 예수님이 오심을 기억하고 기대하고 그 고난을 함께 참여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지 않습니까? 그 아들은 죄가 없었습니다.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매 맞았고, 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렸고, 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바로 우리 때문에, 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사실은 내가 죽어야 되는데,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그 죄 때문에 죽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온전히 내어 주셨습니다. 더 이상 뭐가 더 필요합니까?

우리는 구원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아들까지 내어 주셨는데, 모든 것 다 주셨는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 더 달라고 떼를 씁니다. 하나님은 다 주셨는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물질이 부족하다고 물질 달라고 하나님께 떼쓰고, 우리 자녀들이 성공해야 된다고 성공을 위해서 부르짖고 떼쓰고, 그것 이루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마치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 화내고, 하나님께 볼멘소리하고, 가시 돋힌 말을 쏟아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브람은 아직까지 성숙하지 못하고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솔로몬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전 3:14)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 위에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완벽하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마땅하다. 솔로몬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완벽하게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아직까지 우리가 기도하고 원하는 것 이루어 주지 않는 것은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직까지 자녀를 주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때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기다려보시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미성숙한 아브람을 교육시켜 나가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4-5)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날 자가 분명히 너의 상속자다 말씀하시고 아브람의 손을 이끌고 밖에 나가서 저 하늘의 별을 보라 하셨습니다. "뭇별을 보라." 그 당시는 공해가 없는 시절이니 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이 많았지 않겠습니까? 저 하늘의 수많은 별들처럼 너의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렇게 시청각 교육을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특별한 교육입니다. 시선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시선을 바꾼 것은 여기가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롯이 떠난 후였습니다. 롯이 떠난 후에 실의에 빠져서 롯이 떠난 그곳만 바라보고 고개 숙이고 있던 아브람을 하나님이 찾아가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하시고 "종과 횡으로 행하여 다녀보라" 하셨습니다. 오늘 여기가 두 번째입니다. 역시 자신의 부재와 부족한 것, 아직 응답되지 않은 것만 바라보고 있는 아브람에게 "너는 그것만 바라보지 마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뭇별을 바라보라. 저 하늘에 별들처럼 내 후손이 많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시선을 바꿔 주심으로 그의 믿음을 확장시켜 주시고 큰 스케일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훈련시켜 가실 때 환경을 바꾸시거나 시선을 바꾸어 주십니다. 모세에게도 그랬습니다. 모세가 초기 40년은 애굽의 궁궐에서 살았습니다. 모세는 공주의 양자였습니다. 그도 왕위 계승 서열에 있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어디에 꽂혀 있었겠습니까? 바로의 보좌에 꽂혀 있었습니다. "내가 잘하면 애굽의 왕이 될 수 있겠구나." 그가 탁월하고 특별했기 때문에 정적들이 많았습니다. 그의 시선이 여러 정적들에게 꽂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내몰아 가셨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그곳에는 바로의 보좌도 없고 정적도 없습니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별이 있습니다. 사막이 있고 모래가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그가 돌봐야 하는 가축이 있습니다. 그의 좁은 믿음이 큰 스케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의 부재된 것, 네가 가지지 못한 것, 응답받지 못한 것, 이루어지지 못한 것, 그것만 바라보고 나를 향하여 원망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건 내가 때가 되면 채워줄 테니 하늘의 별을 보라. 만드신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너의 가정에 자녀 하나 주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의 전능을 보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라. 너의 가정에 이 부족한 것 내가 채워주지 못하겠느냐."

오늘 우리가 부족한 것만 바라보다 보면 원망만 쌓일 뿐입니다. 응답되지 않은 것만 바라보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뭇별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피조 세계를 보십시오. 얼마나 위대한 능력인지.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세상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채우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큰 믿음을 가지시고, 보다 큰 스케일을 가지시고, 하나님 안에서 원망 없이 신실함으로 살아가시는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우리를 훈련시키고 교육시키고 뭇별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브람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시고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일러 주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안할 때 아버지께 기도하고 간구하여 불안의 근원적 문제를 해소하게 하옵소서.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문제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성숙한 상태로 머물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의 뭇별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창조주이신 하나님, 온 세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한 것 채우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하신 사랑을 기억하고 깨닫고, 하나님의 모든 손길 앞에 우리의 존재를 드리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