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본문: 창세기 15:6
사랑의 유효기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미국 코넬대학의 신시아 하잔 교수는 약 5천 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사랑의 유효기간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면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생성되는데, 연구 결과 약 18개월에서 30개월까지 도파민이 지속적으로 생성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사랑의 유통기한은 길어도 900일, 30개월 정도가 전부라는 뜻입니다. 이 연구를 들어보고 지난 삶을 한번 살펴보면 수긍이 되기도 합니다.
남녀가 만나 뜨겁게 사랑할 때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10초 만에 금방 답이 옵니다. 하루에 서너 번을 만나도 전혀 질리지 않고 지루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전화하고, 헤어져도 밤새도록 보고 싶다며 전화기를 붙들고 있어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릅니다. 보아도 보아도 또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쯤 지나면 시들해지고 시큰둥해집니다. 잘 반응하지도 않고, 귀찮아지기 시작합니다. 이쯤 되면 이별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계속 만나야 하나, 아니면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나 고민의 갈림길에 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통계에 의하면 아무리 길어도 유통기한이 30개월이라고 하는데, 30개월 넘게 교제하고 사귀던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습니까? 만약 이 통계가 100% 진실이라면 사람들은 결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파민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는데 어떻게 결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이루어지고 가능한 이유는 사랑의 비대칭성 때문입니다. 비대칭성이라 함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더 많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흥미를 잃어도, 상대방이 문자 메시지에 늦게 답해도, 별 반응이 없어도, 내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아끼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도파민도 크게 의미가 없고 통계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이 가능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는 별개로, 또 다른 의미에 있어서 사람들은 지속성이 떨어집니다. 공부하는 학생을 떠올려 보십시오. 중간고사 시험을 망쳤습니다. 그때 한순간은 열심히 공부해서 기말고사에는 성적을 끌어올려야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습니다. 삼사 일이 지나면 다시 제자리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결심은 하는데 이것을 실천해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박 중독에 빠진 가장이 자신의 도박 때문에 가족이 피폐해지고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봅니다. 다시는 도박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사람은 결심하지만 지속성이 떨어집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한때 뜨겁게 봉사하고 뜨겁게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그토록 많이 울부짖고 기도했는데, 어떤 계기로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그런데 거기에 발맞추어 하나님도 우리를 모른다 하시면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비대칭성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흥미를 잃지 않으시고 여전히 사랑하시며 여전히 보호하시고 여전히 아끼십니다. 그래서 구원이 가능합니다.
오늘 읽은 이 짧은 한 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진심을 이해하시고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진수와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사랑을 덧입고 있는지, 이렇게 사랑을 받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깨닫고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 그 진심을 알아보시는 하나님
롯이 소돔 땅에 살고 있었는데 왕들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고, 아브라함은 롯과 그의 가족과 재물을 다 건져주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롯을 다시 데려오고 싶었는데, 재물까지 다 찾아준 이후에 롯은 재물과 가족과 함께 소돔 땅에 정착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실패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정신을 차리고 나니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돌라오멜과 그 일당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보복할 것입니다.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셨고, 나는 너의 방패가 되고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방패라는 말씀은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데, 지극히 큰 상급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자녀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큰 상급은 필요 없고 아들 하나만이라도 주셨으면 좋으련만, 자녀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볼멘소리를 합니다.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 우리 집에서 기른 이 종이 나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내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사가 될 것이라 말씀하시고, 손잡고 밖에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보여주십니다. 저 하늘의 별들처럼 너의 후손을 많게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하늘의 별을 만드신 분이 너의 가정에 자녀 하나 주지 못하겠느냐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로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이 짧은 한 절 말씀이 기독교 신앙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정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질문거리가 생깁니다. 오늘 우리가 세 가지 질문거리를 가지고 함께 찾고 답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했는데, 그러면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아니라,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몸에서 날 자가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 저 하늘에 별들처럼 너의 후손을 많아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는데 그 믿음을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에게 뭇별을 보여주시고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말이라도 하나님께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그 믿음이 생겨서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기만 했는데, 그 믿음은 가슴속에 있기만 하고 마음에 품기만 했는데, 하나님은 어찌하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속들이를 살피고 돌보시며 중심을 들여다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 마음에 품은 것을 다 그대로 나타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예물을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만 해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수십 년 동안 길들여진 습관이 있습니다. 마음에 품었다면 표현하라고 배웠습니다. 사랑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어떻게 내 사랑을 알겠습니까? 말로 표현하고 고백해야 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됩니다.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표현해야 됩니다. 맛있는 것을 사주든지,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대접하든지, 그가 꼭 필요한 것을 채워주든지, 그래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입증해 보여야 됩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믿어줄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렇게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분명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자꾸만 뭔가를 표현하려고 합니다. 행동하려고 하고 행위로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과 마음 중심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각만 해도 그 생각이 진심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 생각이 진심인 것을 아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겉모습만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속사람과 생각을 다 읽어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 겉모습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우리도 마음을 다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위로가 되는 말씀이지요.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이켜 생각하면 훨씬 더 부담이 됩니다.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겉으로 표현하기는 쉽습니다. 기준만 채우면 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옷 입고 경건한 척하고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사람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중심을 보고 마음을 보시며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속마음을 속속들이 다 살펴보고 계시는데, 우리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믿음이 하나님 보실 때 의로 여기시도록 괜찮은 믿음이고 순전한 믿음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기준을 정해 놓으면 훨씬 쉽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기준을 정해 놓으시고 시간을 정하시어 천 시간만 열심히 봉사해라, 그러면 내가 너의 믿음을 인정하마 하셨다면, 우리는 그 천 시간을 열심히 채우면 됩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그 천 시간만 채우면 내 믿음이 입증되는데, 그것은 못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물질의 기준을 정해 놓으시고 얼마의 물질을 드리면 난 너의 믿음을 인정하겠다 하셨다면, 우리는 열심히 벌어서 그 물질의 기준만 채우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까다로운 분인지 모릅니다.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런 것 하지 않아도 좋으니 너 마음 중심만 나에게 바르게 행하라, 그러면 내가 너의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하마 하십니다. 기준이 없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드러난 행위에 집중했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됩니다. 예배드리는 나의 내면, 섬기고 봉사하는 나의 내면, 말씀 공부하는 나의 내면, 사람을 대하는 내 중심을 보아야 됩니다. 진심인가? 하나님 앞에 진심인가?
아브라함이 뭇별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순간 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순간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부디 이제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 앞에 진심인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행동보다 행동을 좌우하는 우리 마음의 진심을 순간순간 살피고 들여다보시며,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참된 믿음을 가지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믿음의 본질
두 번째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이 과연 순수한 믿음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왜 드리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지금 상황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상황이 벼랑 끝에 몰려 있습니다. 절체절명입니다. 그돌라오멜과 그의 일당들이 분명히 아브라함을 쳐들어올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동맹한 세 명의 동맹자들과 318명의 군사들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두렵습니다.
그들이 쳐들어오면 아브라함이 그들을 막아낼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롯을 그의 후계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롯이 떠났습니다. 믿는 구석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삶의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목숨 건 벼랑 끝에 지금 서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뭇별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래서 평가절하합니다. 상황이 긴박하니까 어쩔 수 없어서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믿은 것 아닌가? 이 믿음을 순전한 믿음, 순수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평상시에 할 때 제대로 믿어야 그것이야말로 진짜 믿음이라고 사람들은 평가절하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위기에 빠진다 하더라도 그 모든 사람이 그 순간 하나님을 붙잡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위기에 빠져도 다른 길을 모색하는 자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위기에 빠졌습니다. 블레셋 5부족 연합체가 함께 몰려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때 사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답을 알려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울은 무당을 찾아가고 말았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삼상 28:5-7)
이런 위기 상황,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사울은 무당을 찾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더 간절하게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옳았건만 그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상황에 제가 어떻게 해야 답을 찾겠습니까, 이렇게 엎드렸어야 했는데 그는 오히려 무당을 찾아가고 말았습니다. 위기에 처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도 그랬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치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 심히 찔림이 옵니다. 양심의 가책이 됩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은 삼십을 가져다가 성소에 던져 넣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하고 그의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 벼랑 끝에 섰을 때, 잘못했다고 느껴졌을 때, 주님께 나가서 회개하고 제자들을 만나서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해야 옳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이 문제를 짊어지고 책임지려고 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위기를 겪습니다. 우리의 진짜 믿음은 위기 상황에 시험받습니다. 평상시에는 이분이 믿음 생활을 다 잘하는 줄 압니다. 신앙생활 다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풍파가 오고 위기 상황이 닥칠 때, 그때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이 분별되고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진심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위기 상황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평상시에 마음을 다잡고 결단하고 계셔야 됩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내 믿음 변치 않길, 어려움이 오고 위기가 올수록 나는 하나님 붙잡고 그 앞에서 엎드려 무릎 꿇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며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걸어가기를 결단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 순간의 진심을 붙드시는 하나님
세 번째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여기서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을까요?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2)
15장이 지나서 바로 16장이 되자마자 아브라함은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15장에서 뭇별을 보여주시고 저 하늘에 별들처럼 너의 자손을 많아지게 해주겠다, 내 몸에서 날 자라야 네 후손이라고 말할 것이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순간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심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로 뒤돌아서서 15장이 지나서 16장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습니다. 이럴 거면 도대체 그의 믿음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믿음의 민낯이 이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허무하게 그의 믿음이 박살 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믿음이 정점을 찍다가 바로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 했는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나는 의로 여겼다는 말을 취소한다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너의 믿음이 이 지경이니 내가 너를 잘못 봤구나, 이제 나도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 그렇게 하셨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냥 그대로 아브라함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 1:1)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2-3)
신약성경의 문을 여는 마태복음 첫머리, 첫 시작의 첫 단어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는 그 첫머리에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두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로마서에도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적이 없다 말씀하셨고, 오늘 읽은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믿어주셨기 때문에 복음서에서도, 서신서에서도, 지금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동의 오르내림에 대해서 일절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떠날 때도 있고, 하나님을 실망시킬 때도 있고, 하나님께 잘못할 때도 있고,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라함을 믿어 주셨습니다.
사람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이 정점을 찍다가도 한순간에 어떤 사건으로 밑바닥으로 추락하기도 합니다. 뜨겁다가도 갑자기 식어 버리기도 합니다. 교회 일을 혼자 다 할 것처럼 열심을 내다가도 어떤 일이 있으면 차갑게 뒤돌아서기도 합니다. 이것이 연약한 우리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우리 인생의 신앙 그래프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한때 뜨거웠던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한때 열정적이었던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눈물로 기도하고, 눈물로 마룻바닥을 적시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온종일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인생 전체를 드렸던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식어버렸습니다. 이제는 겨우 숨만 쉬고, 이제는 겨우 믿음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향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때를 회복하기를,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면서 하나님은 참고 참고 또 기다려 주십니다.
그런데 사탄이 여기에 개입합니다. 절대 돌아갈 수 없다고, 하나님은 너를 이제는 포기하셨다고, 너는 이제 끝난 인생이라고,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너는 세상의 연락과 기쁨과 낙을 즐기고 즐겁게 인생을 마무리하라고 사탄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그런 사탄의 궤계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거짓말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서 다 써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안아줍니다.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것도 살찐 송아지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잔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그가 애굽에 내려가서 하나님을 속이고 거짓말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를 기다려주셨습니다. 롯을 향한 원대한 구원 계획에 아브라함이 끼어들어가서 방해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환상 중에 그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순간 그 신앙 고백, 그 하나만을 보고 기다려 주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장점 한 가지만 보고 여전히 기다리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 이 순간의 진심을 보셨기 때문에 그의 평생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셨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백 가지, 천 가지를 다 해주셨는데, 한 가지 이루어주지 않은 것 때문에, 자식 문제 해결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께 볼멘소리를 하고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 장점 한 가지만 보고 지금도 기다려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부인했고, 저주하며 부인했고, 맹세하고 저주하고 부인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은 찾아가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베드로의 신앙 고백 때문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그 신앙 고백, 그 순간 진심이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베드로의 그 눈빛과 그 말을 통해서 그의 진심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신앙 고백한 베드로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해도 분명히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또 찾아가시고 신임하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점 한 가지만 있어도 그것 하나 붙들고 기다리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처럼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 장점 한 가지만 있으면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를 그 한 가지 때문에 지금도 사랑하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음에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이 진심이 의로움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코너에 몰려서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위기 상황에 그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주여, 우리도 어려움을 겪을 때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의 믿음이 오래가지 못하고 때로는 바닥을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기다려 주시고 다시 돌아오기를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우리 이웃과 주변 사람들을 이렇게 오래오래 참아주는 사랑을 가지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