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 여인 하갈
본문: 창세기 16:1-3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생충은 숙주가 필요합니다. 기생충이 숙주 안에 들어가면 자리를 잡고 숙주와 공생합니다. 기생충은 결코 숙주를 죽이지 않습니다.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함께 사멸하기 때문입니다. 파나마 지역에서 주로 서식하는 '개미 선충'이라는 기생충이 있습니다. 개미 선충의 목표는 새에게 먹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생충이 어떻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에게 먹혀 그 뱃속까지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개미 선충은 중간 숙주를 이용합니다. 바로 개미입니다.
일단 개미에게 먹히고 나면 개미 뱃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개미의 배를 사정없이 긁어댑니다. 그러면 개미의 배가 빨갛게 부풀어 오릅니다. 파나마 지역에 사는 새들은 빨간색 야생 딸기를 좋아하는데, 멀리서 보면 개미의 부풀어 오른 붉은 배와 빨간 야생 딸기가 잘 분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들이 쏜살같이 내려와 개미를 집어삼킵니다. 그 순간부터 그 새는 개미 선충에 감염됩니다. 개미 선충은 새의 뱃속에서 자리를 잡고, 단백질을 섭취하며, 알을 낳습니다. 새는 자신이 기생충에 감염된 줄도 모릅니다. 죽지는 않으나 이전과 같지도 않습니다. 멀리 날지도 못하고 오래 살 수도 없습니다. 평생 단백질 공급원의 역할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기만 전술로 개미 선충이 새의 뱃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악한 사탄 마귀는 우리를 기만하여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고,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면, 악한 사탄 마귀가 던지는 미끼를 덥석 물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욕에 찌들어 있어서도 안 되고, 영적으로 바로 서서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과 사래가 사는 가정에 악한 사탄이 미끼를 던졌습니다. 그들은 그 미끼를 물었고, 결국 화를 입게 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창 16:1)
아브라함의 집에 한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종의 출신이 애굽 여인입니다. 이름하여 하갈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애굽 출신 여종이 왜 들어와 있는 것일까요?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창 12:15-16)
사탄이 던진 미끼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선물한 것 중에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노비가 있었고, 이 노비들 중에 하갈이 섞여 들어온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래와 롯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까지 왔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근을 훈련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바로의 고관들과 바로는 사래의 미모를 보고 후궁으로 삼으려고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선물 중에 노비가 있었고, 그 노비 중에 하갈이 딸려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 아브라함의 가정을 축복해 주시고, 그들을 사랑하셔서 사래를 건져주셨습니다. 사래가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사래를 보낸 대가로 받았던 물질을 다시 돌려보내야 정상이 아닙니까? 사래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 물질을 가지고 살아도 되겠지만, 사래를 돌려받았으니 물질도 돌려줘야 합니다. 그런데 물질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바로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온 집에 큰 화를 내리셨습니다. 바로가 깜짝 놀라 물질도 가져가고 사래도 데려가고 얼른 이곳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과 사래와 롯은 수지맞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내도 되찾고 물질도 그대로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런데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 물질이 큰 화근이 될 줄을 몰랐습니다. 이 물질 때문에 그의 집에 평지풍파가 일어납니다. 롯을 잃어버렸습니다. 롯의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롯은 애굽에 갔다 온 이후로 부자가 되었고, 그 돈을 더 크게 만들고 불리기 위해서 소돔 땅으로 떠나갑니다. 아브라함이 목숨을 걸고 전쟁까지 했지만, 롯을 다시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롯과 롯의 가족은 소돔 땅에 정착하고 맙니다. 결국 이 물질 때문에 사랑하는 조카 롯과 그 믿음과 그 자녀와 가족까지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쯤 되면 아브라함과 사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면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돌려보내지 못한 게 무엇이 있는지, 물질은 롯이 다 가져갔다 할지라도 노비가 있으면 이 노비들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물질과 원치 않는 노비를 내가 데리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편하기 때문입니다. 여종이 없던 시절에 사래는 잘 살았습니다. 여종이 없어도 잘 살았습니다. 사래가 직접 일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노비가 없어도 아브라함이 일하며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노비가 생겼습니다. 사래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는 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말만 하면 됩니다. 편안해서 좋습니다. 몸이 편안해서 좋습니다. 이제는 돌려보내기 쉽지 않습니다. 노비가 이 땅에 없으면 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도 알고 사래도 압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가난했던 시절에 가난한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대로 사람입니다. 비록 물질은 없고 가난하지만 가족들끼리 행복하게 서로 오손도손 살아가며,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섬기며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돈이 생깁니다. 부자가 됩니다. 물질이 생깁니다. 이 물질을 버리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죽을 것만 같습니다.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물질 중독입니다. 권력을 가집니다. 권력이 없을 때도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번 권력을 손에 움켜쥐고 나니까 이것이 없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권력 중독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래도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이미 몸이 편해져 버렸습니다. 사탄이 그 가정에 미끼를 던졌고, 그들은 미끼를 물어버렸습니다. 이제 하갈은 그 가정에서 시한폭탄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큰 폭발력을 가지고 가정을 박살 낼 수 있는 시한폭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갈이 말도 잘 듣고, 사래의 몸종으로 여종 노릇을 잘하니까 그냥 그대로 둔 것입니다. 위장된 사탄의 계략인 줄 모르고 그냥 그대로 두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회복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특별히 물질 회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돈을 잃으면 사람들은 돈을 다시 되찾고 싶어합니다. 주식투자로 원금을 잃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원금을 다시 되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패가망신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동산 투자를 했습니다.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원금이 아깝고 죽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원금을 다시 되찾고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화병에 걸려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회복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회복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영적 회복을 위해서는 때때로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의 영적 회복을 위해서는 물질도 포기하고 노비도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불편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신다면, 우리의 영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불편해도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고, 내가 이것 때문에 다시 새롭게 될 수 있다면 포기할 수 있고, 버릴 수 있고, 끊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래는 전혀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딤전 3:8)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출 18:21)
첫 번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를 세울 때 더러운 이를 미워하는 자, 탐하지 않는 자를 리더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출애굽기 말씀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도와서 공동체를 이끌어 갈 리더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울 때, 그 세우는 자격 조건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리더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두 말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더러운 이, 불의한 이익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내가 노동하지 않았는데, 열심히 땀 흘려 수고하지 않았는데, 응당 내가 수고해서 받아야 하는 물질 말고 그 이외에 사탄이 주는 미끼를 물어버린 것, 이것이 더러운 이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특별히 교회 공동체의 리더가 될 자들은 이런 이익을 취하는 자들을 결단코 세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경은 불의한 이익이라고 말했고 더러운 이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수지맞았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래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수고하지 않았는데, 노동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았는데, 불로소득으로 얻은 것을 가지고 우리는 수지맞았다고, 오히려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뒤집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아브라함 가정에 던져준 미끼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제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들을 드러내고 정리해야 합니다. 그것을 정리하지 않고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보면, 내 마음속에, 우리 가정 속에, 우리 공동체 가운데, 특별히 우리 교회 안에도 우리가 수고하지 않았는데 사탄이 던져준 것인데, 이것을 붙들고 축복이라고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것을 정리해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래는 불행하게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가정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가둔 불신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2)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래에게서 두 가지 잘못을 발견합니다. 사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여기에 심각한 사래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사래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한 것입니다.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정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로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의 기본 단위입니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는 하나님 창조의 원리입니다.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해서 하나님이 주신 가정 공동체, 천국 같은 가정을 세워 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그 가정에 하갈을 집어넣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깨뜨려 버렸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내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여기서 '내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몸만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결혼하면 한 몸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 몸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을 동등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사래를 통해서 가정의 후사를 주겠다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셨는데, 사래는 그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불신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브라함과 사래는 믿음이 대단히 좋은 분들입니다. 우리가 볼 때도 이 정도 믿음이 있을까 할 정도로 대단한 믿음을 가진 분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불렀습니다. 가나안까지 갔습니다. 하란에서 다시 불렀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하나님 말씀 따라 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분들입니다.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주셨습니다. 바로의 손에서도 건져주셨습니다.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을 때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셨습니다.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을 잡으라 하시고 반으로 쪼개라 하시고, 타는 횃불이 되어서 하나님은 저주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래와 계속해서 함께하셨습니다. 이른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체험 신앙을 경험한 분들입니다. 하나님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이런 식으로 무너질 수 있을까요?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이렇게 믿음이 좋은 분들이 무너진 그 비밀이 3절에 나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창 16:3)
십 년 후였습니다. 이것 때문입니다. 십 년 동안 아브라함과 사래는 자녀 때문에 열심히 기도했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래가 열 살 차이이니까, 그때 사래가 65세입니다. 십 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85세입니다. 사래는 75세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평균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더 길었다 할지라도, 여성의 나이가 75세가 되면 이제는 자녀를 낳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사래는 자기의 몸을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그 십 년 동안 좌충우돌했지만,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탄식으로 애타게 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에 매여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엎드려 울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몸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래가 자기의 몸을 가장 잘 압니다. 나는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구나. 이제 나는 불가능해졌구나. 그런데 내 남편은 지금 이 시기를 넘기면 이제 영원히 우리는 자녀를 볼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하갈을 통해서 자녀를 낳아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한 것 아닙니까?
사실 사래 입장에서 말하면, 사래가 이렇게 한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자기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 년 동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자녀를 주지 않으니까, 이번에 하나님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십 년 동안 기도하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는데 자녀가 생기지 않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포함해서 아브라함과 사래를 비난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저주 언약의 당사자가 되셨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서서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손가락질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한 가지 간절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십 년 동안 구한 적이 있습니까? 그 한 가지를 가지고 죽을 만큼 하나님께 엎드려서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분이 있다면, 그런 분이야말로 이들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대부분은 한두 번 기도하고 안 되면 포기해버립니다. 길어봐야 일이 년 기도하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적어도 십 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자기 인간의 한계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다. 하나님이 나에게 자녀를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이니 현실을 담담하게 인정하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사래가 잘못 생각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자신의 한계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가 들고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여자 나이가 75세가 되면 당연히 자기 몸으로 자녀를 낳는 것이 불가능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불가능하다고 하나님까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불가능하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여성의 몸으로 자녀를 낳을 수 없으나, 이제는 내가 자녀를 낳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나,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하늘의 뭇별을 만드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당연히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왜 기도합니까? 내가 다 하면 되지요. 기도하는 이유는 내가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래는 십 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내 힘으로는 자녀를 낳을 수가 없으니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하고,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셔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더 간절하게 하나님께 엎드리고 무릎 꿇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못하니까 하나님도 못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자신의 한계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불신입니다.
예수님 시절, 예수님께 병든 아들을 데리고 나온 한 아버지도 역시 그랬습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막 9:22)
병든 아들입니다. 문제가 있는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이 아들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다 해봐도 안 되는데, 예수님 뭐라도 할 수 있거든 한번 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은 이 아버지의 말에서 불신을 느꼈습니다. 포기를 느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나는 창조 때부터 함께 있었고, 너희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의 주로 이 자리에 왔는데,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도와달라고 한 아버지를 예수님은 책망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주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맞는 말씀 아닙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여기 사래와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한계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가두어 버렸습니다. 내가 못하니 하나님도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늙어서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하나님도 하실 수 없다고 단정 지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불신입니다. 우리가 내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고, 그것 때문에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전능한 인생들이 아닙니다. 모나고 부족하고 미련한 인생입니다. 앞날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엎드리고 구하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능력이 연약한 우리와 함께하셔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사래가 잘못한 것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 버린 것입니다. 사래의 목적은 자녀를 낳는 것입니다. 사래와 아브라함이 수단으로 삼은 것은 하갈입니다. 목적이 너무나 분명한 나머지, 그 수단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수단의 선악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 돈이 목적인 사람은 그 수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수단이 선하든 선하지 않든 그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을 압제합니다. 사기도 칩니다. 돈을 빌려 놓고 갚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됩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해 버렸습니다. 좋은 성적이 유일한 목적인 학생이 있습니다.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그 성적을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습니다. 시험 볼 때 옆 친구의 답안지를 베껴씁니다. 컨닝 페이퍼를 만들어서 들어갑니다. 그렇게 목적 때문에 수단을 정당화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아브라함과 사래를 통해서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래가 너무나 자녀를 가지고 싶은 나머지, 그 자리를 하갈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불신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결과를 이루실 것을 믿고 기대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선한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과정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 집중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칙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그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반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심각한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탄이 던져주는 미끼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동기와 과정을 성실하게 이루어 가야 합니다. 부디 이렇게 한 주간을 승리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순절 네 번째 주에, 삼월의 마지막 주일에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미끼를 던집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미끼를 물어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서도 우리는 이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준 것임을 깨달으면서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편해져서, 부자가 되어서, 권력을 가져서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적 회복을 위하여, 우리 믿음의 회복을 위하여 불편해도 처리하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에 아버지께 엎드립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붙잡습니다. 아버지, 우리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동기와 과정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주여,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