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강 /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16:1-6)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본문: 창세기 16:1-6

현대 사회를 정의하는 여러 표현 중 '초연결 사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터넷과 각종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여 우리 모두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집 밖에서도 집안의 가전제품을 통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일이 지금 현실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이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두 나라가 전쟁하고 있는데, 그 전쟁 때문에 우리까지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물가가 오르고, 기름값이 치솟고, 증시가 폭락합니다. 전 세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듯이 영적인 세계, 특히 죄의 문제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를 한 번 지으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죄가 우리 인격 속에 들어오면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 번 지은 죄가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어 계속해서 우리를 죄의 늪으로 빠뜨리며 인격 자체를 파괴해 버립니다. 한 인격이 파괴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가족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이 죄로 넘어지면 그 다음 사람, 또 그 다음 사람으로 이어져 결국 가정 전체가 죄로 파멸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집단이나 공동체가 죄로 물들면 시간이 지나면서 깨어 있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 전체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가정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가나안 땅에 데려다 놓았는데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 가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죄가 죄를 낳았습니다. 거짓말의 결과로 물질을 얻었고, 그 물질 때문에 롯을 잃었습니다. 물질과 함께 딸려 들어온 것들 때문에 아브람의 가정이 지금 심각한 국면에 처해 있습니다. 한 번의 죄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해답을 찾고 새로운 방향을 잡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너지는 가정, 함께 서야 할 믿음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2)

사래가 먼저 시작했고 아브람이 받아들였습니다. 사래가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 그 가정에 자녀를 생산하고자 했습니다. 만약 순서가 바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브람이 먼저 시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서 자녀를 낳아 봅시다"라고 말했다면, 이 일은 결코 성사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먼저 시작했다면 사래가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래가 시작했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사래가 이렇게 말하는데 아브람은 어떤 반대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여 버렸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잠깐 멈춰 봅시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런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 가정에 죄가 들어왔고, 아브람도 같이 넘어지면서 동시에 이 가정은 심각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기억나는 것은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올 때입니다. 하와를 통해서 아담이 함께 무너지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뱀이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편 아담에게 선악과를 줍니다. 아담도 저항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한번 걸러 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인데 왜 이걸 먹었습니까?"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내가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함께 죄를 지었습니다. 한 사람이 무너지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해서 동시에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간혹 우리 가정을 보면 영적인 주도권을 한 사람에게 완전히 일임해 놓은 가정이 있습니다. "내 남편이 목회자이기 때문에, 내 남편이 교회 장로이고 집사이기 때문에, 남편의 가정이 믿음 생활을 잘 아는 3대, 4대째 신앙생활 했던 가정이기 때문에 내 남편이 하는 말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고 남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무너지면 어떻게 됩니까?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아내가 성경을 십독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모든 봉사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 아내를 다 잘한다고 칭찬하기 때문에 신앙적인 부분은 당신이 다 알아서 책임지십시오. 저는 그냥 따라가겠습니다." 만약에 그 아내가 넘어지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래가 무너지고 이어서 아브람이 무너지고, 하와가 무너지고 이어서 아담도 무너지고. 만약에 아브람이 제대로 서 있었다면, 아담이 제대로 서 있었다면, 이 가정은 이런 식으로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무너지면 한 사람은 제대로 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이 무너지면 "그건 아니다"라고 말하고 세워 주고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냥 속절없이 온 가정이 한꺼번에 다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적 일치를 이룬 마노아의 가정

사사 시대에 단 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는 말기로 갈수록 타락해갑니다. 사사 시대 말기에 미덕은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해서 자녀를 많이 낳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첩을 두었습니다.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사사들까지도 그랬습니다. 자녀를 심지어 수십 명을 낳았습니다. 그래 놓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이것이 그 사회, 그 당시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 마노아는 결혼한 후에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회 분위기에 따르면 다시 장가들어서 자녀를 낳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이 자녀를 주시면 감사하고, 아니면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났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삿 13:3-4)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났습니다.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제는 잔치를 벌여도 좋을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노아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아내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가 나에게도 한번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내에게는 말씀하시고 왜 저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정말 우리 가정에 자녀를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하나님 저에게도 나타나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저에게 깨닫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 구했고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삿 13:8)

마노아가 이렇게 하나님께 구합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 달라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사자에게 구하는 장면입니다.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삿 13:12)

마노아가 왜 이렇게 했을까요? 자기 부인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이 자녀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믿으면 되지 왜 자기도 하나님의 계시를 구하는 것일까요? 그 가정의 영적 일치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가정의 영적 일치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자녀를 주신다는 것, 기쁘고 좋은 일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은 부인에게도 함께 임하시고, 남편에게도 임하시고, 자녀에게도 임하시는 법입니다. 가정을 갈라놓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가정을 일치되게 하고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제대로 믿음으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능력은 당연히 마노아에게도 여호와의 사자로 임하시고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마노아는 이것을 하나님께 간구했고 구한 것입니다.

건강한 가정입니다. 한 사람의 영적 지도력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 세대주'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 세대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 그가 바로 신앙 세대주입니다. 아브람 가정의 신앙 세대주는 아브람이요, 아담 가정의 신앙 세대주는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아담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 세대주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니까 그 가정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신앙 세대주 한 사람만 붙들고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노아 가정의 신앙 세대주는 마노아 자신이고 동시에 아내였습니다.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각 사람 각 사람이 모두가 다 신앙 세대주였습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 믿음의 가정이 진실로 건강한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면 남편이나 부인이나 사랑하는 자녀들 모두가 다 신앙 세대주로서 영적인 부분을 건강하게 가지고 계셔야 됩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정말 이 방법을 원하실까요? 우리가 한번 기도해 봅시다. 금식하고 기도해 보고, 진실로 하나님이 이 방법을 원하시는지 한번 물어 봅시다"라고 기도했더라면, 사래가 정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고 기도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그거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아담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알고 하와의 손목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했더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음을 눈물로 회개했더라면, 정말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을까요?

한 사람이 무너지고 또 한 사람이 같이 무너지니까 가정이 그냥 넘어지고 파괴되는 것 아닙니까? 사탄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탄 입장에서 보면 그 가정의 한 사람만 넘어뜨리면 그 가정을 한꺼번에 다 씹고 삼킬 수 있습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사탄이 어려워하는 가정은 모든 가정 식구들이 제대로 믿음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렵습니다. 한 사람을 넘어뜨려도 또 다른 사람이 제대로 서 있습니다. 사탄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한 사람을 무너뜨리면 도미노 현상으로 동시에 다 넘어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사람만 공격합니다. 그 사람을 공격해서 가정 전체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사탄은 그렇게 믿음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눈으로 드러난 좋은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예배가 뜨겁고, 재정이 풍성하고, 건물이 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관점에서,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좋은 교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으로 제대로 서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건강하지 않은 교회는 목회자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해서 끌려가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건강하지 않습니다. 잘 되는 것 같지만, 사탄이 겨냥해서 한 사람을 넘어뜨리면 교회 전체를 사탄이 접수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건강한 교회라면 목회자 한 사람이 무너지더라도 성도들이 그 무너진 분을 다시 일으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치 않는 것이라고" 건강하게 비판하고 건강하게 책망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너진 그분을 새롭게 일으켜 세워 함께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교회,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 옛날 사도 바울은 카리스마가 넘쳐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혼자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를 길렀습니다. 디모데를 길러서 에베소 교회에 파송했습니다. 디도를 길러서 그레데 교회에 파송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두 제자를 길러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함께하는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고 함께 믿음으로 건강한 공동체, 그런 공동체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부디 우리 가정과 우리 속한 모든 공동체와 교회까지 하나님 뜻대로 건강하게 세워져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 16:4)

하갈이 원래 이랬습니까? 원래부터 여주인을 멸시했을까요? 만약 처음부터 이랬다면 사래가 남편에게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순종적이고 사근사근하고 말을 잘 듣고 어떤 말이든지 그대로 "네" 하고 잘 순종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지켜보고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생각해서 남편에게 여종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변했습니다.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여주인을 멸시합니다.

사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이성을 잃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16:5)

남편을 붙잡고 괴롭힙니다. 이제 아브람 역시 똑같이 자기에게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 16:6)

우리는 이 상황을 통해서 두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 번째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까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아브람 가정에서 가장 원했던 소망이 무엇입니까? 자녀를 낳는 것 아닙니까? 하갈이 임신을 했습니다.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자녀를 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가정의 부부 관계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서로 돌아갈 수 없는 지경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임신한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짓눌렀습니다. 하갈이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첫 단추를 믿음으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동기를 중요하게 보시고 과정을 상세하게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첫 시작의 동기와 과정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수단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수단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결과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 가정에 심각한 불화가 일어나는 이유, 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인생에 생각치 않았던, 자꾸만 불행한 일들과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 그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그 첫 시작을 다시 살펴봐야 됩니다.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잠 12:12)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한다고 했습니다. 나무의 열매가 가지에 맺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잠언 기자는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한다고 합니다. 이 말이 진실이요 정답입니다. 뿌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땅속에 깊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뿌리가 상해 있으면, 뿌리가 썩어 있으면, 아무리 거름을 주고 아무리 나무를 잘 가꿔도 열매를 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뿌리가 튼튼하면, 뿌리가 건강하면, 시간이 지나면 그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진리입니다.

첫 시작의 첫 단추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첫 단추를 꿰고, 그 뿌리가 잘 내려가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 우리 인생의 나무에는 좋은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해지고, 우리가 원하는 기도제목이 응답받고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첫 시작이 너무 급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첫 단추를 믿음의 방법이 아닌 세상의 방법으로, 사람의 방법으로 시작하면 엉망진창이 됩니다. 결국은 나무의 뿌리가 썩어 버렸기 때문에 나무를 뽑아 버리는 것 밖에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이 어떻습니까? 돌아보면 그 첫 시작이 잘못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의 방식대로 시작해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된 여러 가지 문제들. 인생의 열매는커녕 이제는 어떤 일도 손 쓸 수 없게 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지금부터라도 어떤 일을 시작하든 하나님의 방식대로 첫 시작의 첫 단추를 믿음으로 시작하셔야 됩니다. 그래야 열매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부디 그 믿음대로, 그 말씀대로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멸시와 존중 사이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두 번째 교훈은 멸시에 대한 교훈입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 16:4)

여기 '멸시하다'는 히브리어 '칼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가볍게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하갈이 여주인 사래의 말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전에 자기가 종일 때는 무겁게 여겼습니다. 여주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말을 그대로 행동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볍게 여깁니다.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보냅니다.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사래는 화가 납니다. 모멸감을 느낍니다. 모욕감을 느끼고 수치감을 느꼈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녀를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학대하다'는 히브리어 '아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은 출애굽기에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였을 때 사용된 단어와 같습니다. '짓누르다'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괴롭혔는지, 얼마나 짓눌렀는지, 하갈이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만약 이것을 우리가 드라마로 만든다면,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 시청자들, 오늘 우리가 보는 많은 사람들은 전처와 후처의 관계에서 대부분 사래 편을 들어 줄 것입니다. "어떻게 하갈이 자기 옛날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임신했다고 여주인의 말을 무시해?"라면서 하갈을 근본도 없는 종이라고 탓할 것이고 사래의 편을 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사래를 보시고 "적반하장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래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래가 펄쩍 뛸 것입니다. "제가 언제 하나님을 멸시한 적이 있습니까?" 멸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에게 땅과 자손의 약속을 여러 번 하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약속하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났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서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의 뭇별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 하늘의 별들처럼 네 자손을 많아지게 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짐승을 잡으라 하시고 짐승을 반으로 쪼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타는 횃불이 되셔서 쪼개어진 짐승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저주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만약 내가 땅과 자손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 짐승들처럼 쪼개어져도 좋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나님은 시간만 있으면, 때만 되면, 어떤 상황만 있으면, 아브람과 사래에게 땅과 자손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아브람과 사래에게 내 말이 무시당했습니다. 내 말을 가볍게 여김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멸감을 느끼고, 하나님은 모욕감을 느끼고, 하나님은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래가 다른 점은 하나님은 학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짓누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사래는 자기가 한 행동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기의 행동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자기 스스로 멸시당했다고 하갈을 학대하고 짓누르고 쫓아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이 말씀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이 말씀을 무겁게 받아야 됩니다.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면, 하나님이 느끼신 그 기분을 우리도 한번 느껴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느끼고 멸시당하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나는지, 얼마나 부끄러운지,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제대로 살아 내면 세상 사람들에게 존중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지키려고 애를 쓰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세상 열방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높여 주고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귀하게 대접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꼭 기억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소중히 여기고 무겁게 여겨서, 우리도 하나님께 그리고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가정의 모든 식구들이 믿음 안에서 바로 서게 하소서. 한 사람이 무너져도 또 다른 사람이 바로 서 있어서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함께 믿음 안에서 걸어가는 믿음 좋은 가정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도 한 사람이 넘어져도 또 다른 사람이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로 서게 하옵소서.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멸시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어 우리도 하나님께 존중받고, 하나님의 사랑받고, 세상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게 하옵소서.

첫 시작의 첫 단추를 믿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시작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대로 시작한 것이 있다면 아버지 용서하여 주시고, 이제 지금부터 시작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방법대로 하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