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강 / 동침하였더니 (16:4-6)

동침하였더니

본문: 창세기 16:4-6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웅을 겨루던 삼국시대, 그때의 전략적 요충지는 한강 유역이었습니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땅을 차지하는 나라가 삼국의 패권을 쥘 수 있다고 여겼기에, 여러 나라가 앞다투어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 분투했습니다. 가장 먼저 이 지역을 차지한 나라는 4세기의 백제였습니다. 백제는 강한 군사력과 안정된 국내 정치를 바탕으로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일본과 무역하며 그 위세를 떨쳐갔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도 채 백 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북쪽에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시대를 거친 강력한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며 계속해서 남진했습니다. 5세기는 고구려의 시대였습니다. 한편, 남쪽의 신라는 그 당시 가난한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4세기 백제가 발흥할 때 신라는 국가의 기틀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차근차근 하나하나 이루어가기 시작합니다.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의 시대를 거쳐 약 백 년 동안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백제와 동맹을 맺기도 했고, 바다 건너 당나라와 동맹을 맺으며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갔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백제는 타락했고,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입니다.

신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차례대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결국 삼국통일은 가장 먼저 시작한 백제도 아니었고,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고구려도 아닌, 가장 늦게 출발한 신라가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빨리 하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보다 한 걸음이라도 앞서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야 내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긴 인생에서 변수는 무수히 많습니다. 가장 앞섰다가 가장 먼저 망한 백제가 될 수도 있고, 늦게 출발했지만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에서도 우리 신앙인들은 주변 사람들이 앞서가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하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소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연스러움 뒤에 숨은 고통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 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임신했습니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까? 자연의 법칙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고 결혼하고 동침하면 자녀를 낳는 것,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연스러움을 바라보는 사래의 마음입니다. 하갈에게는 이토록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 왜 나에게는 자연스럽지 않고 쉽지 않은가? 왜 나에게는 이토록 힘겹고 어려운 일인가? 이것을 바라보는 사래의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사래는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란까지 오는 동안 줄곧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실 때 두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땅의 약속과 후손의 약속이었습니다. 땅의 약속에는 아브람이 사실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손의 약속에는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그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에 왔는데, 가나안 땅에 온 지 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자녀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갈에게는 그것이 그토록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동침하매 임신하였더라.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쉬운 일이 왜 나에게는 자연스럽지 않고, 왜 나에게는 쉽지 않은가?

우리 주변 사람들은 하는 것마다 잘되고 쉬운 일이 나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하는 것마다 꼬이고, 하는 것마다 넘어지고, 변변하게 무언가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사래가 사실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사래가 시작해서 아브람에게 말합니다. "내 여종 하갈을 당신에게 줄 테니 그를 통해서 자녀를 낳으라"고. 그런데 막상 그들이 바라고 소망했던 일이 현실이 되고 나니, 그것을 마음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갈등이 일어납니다. 사래는 이 갈등을 두 가지 방향으로 해소하려고 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16:5)

아마 아브람이 표정 관리를 제대로 못한 것 같습니다. 아브람이 눈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래가 먼저 시작한 일이고, 그 시작한 일대로 임신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래서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사래가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화를 냅니다. 불같이 화를 냅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그 화는 하갈에게로 향합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 16:6)

하갈도 사람이 변했습니다. 이전에 그렇게 말 잘 듣던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합니다. 그러자 사래가 견디지 못하고 하갈을 학대했고, 하갈은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아마 이렇게 된 이후에 사래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자기 연민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래에게는 이렇게 어려운 일이 하갈에게는 이토록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라니. 그것을 보고 사래는 견디지 못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습니다. "하나님, 제가 뭘 그리 잘못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란에서 떠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십 년 동안 붙들고 기도했는데, 롯도 아니라 하시고,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도 아니라 하시는데, 그럼 하나님 왜 저에게는 자녀를 주지 않으십니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쉬운 일이 왜 나에게는 이토록 어렵단 말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불평 대신 기다림을 선택하라

우리가 이런 경험을 할 때, 다른 사람은 참 쉬운 일이 나만 힘들고 나에게만 어려울 때, 다른 집 아이는 시험에 잘 합격하고 취직도 잘 되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데 나는 잘 안 되고, 내 사업은 손대는 것마다 잘 안 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말씀드립니까?

성경을 보면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이 이런 문제로 깊이 고민합니다. 특히 악인의 번성을 바라보는 선한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의 필생의 숙적은 사울이었습니다. 다윗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궁궐에서 쫓겨납니다. 다윗은 십수 년을 광야를 헤매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에게 기름 부어 "너는 왕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왕으로 세워주셔야 하는데, 기름 부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왕이 되지 않습니다.

사울을 폐하겠다고 하셨는데, 아직 사울은 권세가 등등합니다. 아직까지 사울은 모든 권한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사울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혈안이 되어서 다윗을 잡으려고 사막을 다 헤매고 다닙니다. 죽을 것만 같습니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십수 년을 지내니까 이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도대체 나는 언제까지 이런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겁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을 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록한 시편이 시편 37편 7절에서 9절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시 37:7-9)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두 가지를 권고하셨습니다. "참고 기다리라." 지금까지 견디느라 힘들었는데, 조금 더 참고 잘 견뎌보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부탁하십니다. "불평하지 말라." 두 번이나 불평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두 가지를 잘 지키면 약속을 하나 하셨습니다. "땅을 주겠다.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기다렸습니다. 그때가 언제까지인지 모르지만 참고 기다렸고 견뎠습니다. 원망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땅을 차지합니다. 넓은 땅, 큰 땅을 차지합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넓은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영토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 천국의 영토, 하늘나라가 다윗의 것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수많은 백성들이 하늘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차지하리라" 하신 그 말씀이 다윗의 현생에서는 실제 보이는 땅을 차지한 것으로, 다윗의 내세에서는 천국이 그의 땅이 된 것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견디고 또 견뎌서 귀한 은총과 축복을 얻은 믿음에 승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박국은 남유다 말기에 예언했습니다. 그 당시 유다가 악하고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서 바벨론을 들어서 유다를 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식이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어떻게 더 나쁜 악당 바벨론을 들어서 하나님 백성을 징계하십니까? 하나님, 이건 제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대듭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합 1:13)

여기서 악인은 바벨론입니다. 이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유다 백성들을 삼키는데 어찌하여 가만히 두고 보십니까? 이렇게 원망하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여기서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는 확신,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내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불합리해 보입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순조로운데 나는 하는 일마다 걸리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믿고 한번 기다려보라" 하십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불합리해 보일지라도, 나를 믿고 한번 기다려보면, 때가 이르면, 시간이 이르면, 바벨론이 유다를 심판하는 것도, 모든 일에 걸려 넘어지고 문제가 생기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런 큰 믿음을 가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래도 이 믿음을 가지는 데 실패했습니다.

기도라는 방향 전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 특히 신앙인의 인생길은 공식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수학 공식이 있습니다. 공식에 문제를 집어넣으면 당연히 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공식에 문제를 집어넣는데 답이 척척 떨어집니다. 내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꼬이고 얽히고 설키고 장벽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구덩이에 빠집니다. 그래서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래도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사래는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하갈에게 다 쏟아냈습니다. 사래는 생각보다 가정에서 권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살 만큼 살았으니 남편에게도 할 말 다 하지 않습니까? 하갈에게는 여주인이니까 함부로 학대해서, 임신한 채로 하갈이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만약 사래가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하갈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래와 똑같은 처지에 있었던 한 여인이 전혀 다른, 상반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나입니다. 한나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남편 엘가나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그 남편 엘가나에게는 또 다른 여인 브닌나가 있습니다. 브닌나는 자녀가 여럿 있습니다. 그것까지도 고통스럽고 힘에 겨운데, 더 그녀를 비참하게 하는 것은 엘가나가 한나를 불쌍히 여겨서 두 배의 분깃을 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고 나에게 두 배의 분깃을 주는 것, 이 자체가 더 고통스럽고 더 수치스럽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던 브닌나는 한나를 물어뜯습니다. 격동시킵니다.

만약 한나가 사래처럼 행동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엘가나를 향하여 자신의 분노를 다 쏟아냈을 것 아닙니까? 브닌나와는 진흙탕에서 뒹굴며 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삼상 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한 통찰을 발견해야 합니다. 기도는 곧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사래는 그 방향을 사람에게 향합니다. 자기 남편 아브람과 하갈에게, 사람에게 방향을 향하니까 문제가 해결됩니까? 가정에 더 문제가 생깁니다. 남편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임신한 채로 하갈은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가정이 풍비박산 났습니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심각해지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립니다. 한순간 내 속은 시원해질지 몰라도, 그러나 사탄이 내 마음속에 집을 짓습니다. 분노하고 불평하면 악을 만들 뿐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해결되지 않는 분노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분노가 집채만큼 큰 파도가 되어서 나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문제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방향을 돌려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통곡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이 수치와 모멸감을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서원하며 간구하고 기도했습니다. 방향은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사람을 향해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내 인생에 자꾸 꼬이고 문제가 생기고 장벽이 생기고 구덩이에 빠지는 수많은 문제들, 그 문제들 때문에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차서 사람을 향한다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엎드려 기도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주의 백성들은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부디 기도하여 방향을 하나님께 돌려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 가시기 바랍니다.

빠른 것이 선한 길인가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명제가 있습니다. "빠른 것이 선한 길인가?" 사람들은 빨리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일등 하는 것, 남들보다 한 발자국이라도 앞서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하갈과 이스마엘, 아브람과 사래, 이삭, 이 과정을 보면 빠른 것이 능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동침하매 임신했고, 시간이 지나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나중에 결국 사래를 통해서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 가정에 약속의 자녀와 불순종의 자녀가 함께 거할 수 있습니까? 때가 되자 하나님은 불순종의 자녀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수 년을 길렀는데, 이 집에서 함께 정이 들 만큼 들었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빨랐습니다. 동침하매 임신했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쫓겨났습니다. 가정에 불화가 생깁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는 결국 서로에게 상처가 남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로 마무리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결국 빠른 것이 선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빨리 가는 길을 선호합니다. 내 자녀들이 남들보다 공부 잘하고 일등 하기를 원하고, 시험 치면 항상 합격하기를 원하고, 우리가 사업을 하면 그 사업이 다 잘 되기를 원하고, 모든 일에 걸림돌 없이 잘 극복하고 넘어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것을 순조로움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순조롭게 다 잘 되어 갑니다." 기도 제목을 낼 때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걸림돌 없이 다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순조로움 이면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함정이 무엇입니까? 훈련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조로움이라고 좋은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훈련받기 싫은 것입니다. 열심히 훈련받아야 우리 속에 있는 불순물이 빠져나가고 정금같이 되어 나올 것 아닙니까? 곡식이 좋은 알곡이 되기 위해서는 뜨거운 한여름에 뙤약볕을 맞아야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뙤약볕을 맞아야 알곡이 됩니다. 고개를 숙입니다. 농부가 곡식을 보고 기뻐합니다.

과일이 당도가 높은 열매를 맺으려면 뜨거운 햇볕으로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달콤한 열매를 우리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훈련 없이, 고생 없이, 돌아가는 길 없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손에 쓰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훈련해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모세를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하셔서 하나님 손에 쓰기 좋게 만드시고 빚어가셨고, 다윗을 광야에서 십수 년을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손에 딱 맞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조로움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서 훈련받기를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사탄의 세 가지 시험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오늘 우리도 똑같은 시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시험을 이겨내셨는지를 통해서 우리도 살아가면서 겪는 이 똑같은 시험, 비슷한 종류의 시험을 이겨내라고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첫 번째 시험이 무엇입니까? "이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왜 거절하셨을까요? 우리가 먹고 사는 일용할 양식은 수고의 땀을 흘려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땀 흘리고 수고하고 노동하고 애쓰고 힘써야, 그래야 수고의 떡을 먹는 것이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일날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리시는데, 한 주간 일터에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때로는 땀이 흘러서 수고하고, 때로는 윗사람이나 동료들 때문에 자존심이 달아서 마음이 상해서 수고하고, 그렇게 열심히 수고하고 자존심 상하고 마음 다치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수고의 열매를 얻습니다. 그것으로 자녀들 공부시키고 먹고살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수고의 떡을 먹습니다. 이런 수고 없이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이 오늘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 돈 벌고, 애쓰지 않고 돈 벌려고 하고, 내가 노동하고 내가 노력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고, 그것을 순리라고 말하고, 그것을 순조로움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이 악한 세상에게 우리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과정이 필요합니다. 노동이 필요하고 땀 흘림이 필요하고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그 돈이 가치 있는 돈이 됩니다. 우리가 수고의 떡을 먹지 않으면, 땀 흘린 떡을 먹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서 할 말이 없습니다.

두 번째 시험이 무엇입니까?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갑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라. 천사가 너를 받들어 다치지 않게 할 것이다." 사탄의 말 속에 교묘한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고 선포하려면 간단하지 않느냐, 여기 성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높은 곳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천사가 너를 받들어 다치지 않게 하는 이 기적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다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것이다. 수고하지 말라, 기적 한 번으로 해결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는 것은 섬김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기적을 자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은 낮은 곳에 가서 섬기셨습니다. 연약한 자, 병든 자를 돌봐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삼 년을 먹고 마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가까이 하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들을 섬겨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시간은 오래 걸렸습니다. 비록 그 기간은 오래 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힘겨웠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섬겨주심으로 기적보다 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우리에게 그렇게 유혹합니다. 목사에게도 유혹합니다. "병 고치는 은사 한 번이면 교회가 부흥할 텐데, 말씀의 능력이 있어서 한 번 설교하고 수천 명이 회개하면 교회가 차고 넘칠 텐데." 혼자 신앙생활하는 가정의 외로운 신앙인들을 사탄도 유혹합니다. "기도해서 부자가 되면 믿지 않는 모든 식구들을 다 전도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때 우리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것처럼, 우리가 섬기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잘 섬기고, 오랫동안 섬겨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 과정 없이,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순조로움이라는 덫에 빠져서, 수고하지 않고 섬기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내겠습니까?

세 번째 시험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산꼭대기에 데려갑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너 나한테 한 번만 딱 절하면 이 천하만국의 영광을 너에게 다 주겠다." 우리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주님이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는 방법은 고난, 십자가 죽음, 그다음 부활의 영광입니다. 눈 딱 감고 사탄과 타협하는 것, 그것으로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고난 없이 어떻게 영광이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 없이 어떻게 부활의 영광이 가능하겠습니까?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유혹합니다. "눈만 한 번 딱 감으라"고.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는데, 왜 너는 그렇게 별나게 신앙생활 하느냐고. 눈 한 번 딱 감고 사탄과 손잡으면 천하만국의 영광이 너의 것인데, 한 번만 넘어가자고.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과정이 필요합니다. 고난의 과정이 필요하고 십자가도 져야 되고, 십자가 이후에 부활도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는 영광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갈의 길과 사래의 길이 있고, 사탄의 길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비록 고되고 어렵다 할지라도 사래의 길을 선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길 끝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수고했다, 참 수고했다" 맞아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항상 두 갈래 길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합니다. 동침하매 임신하였더라, 이 순조로운 하갈의 길과 오랫동안 투쟁하고 기도하여도 자식 하나 없는 사래의 길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합니다. 쉬운 길을 알려주는 사탄의 길과 그 길을 거부하시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때로 타협하기도 합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마음을 정하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 그 길 끝에 영광의 부활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사래의 길을 온전히 수용하게 하옵시고, 그 길 가운데 걷다가 힘들 때 사람에게 화풀이하지 않도록 도우시며, 하나님께 방향을 바꾸어 기도하고 우리의 마음이 위로받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온전히 순종하고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 길 끝에 계신 하나님께 큰 영광 받으시고, 우리도 칭찬받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