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강 / 그 수하에 복종하라 (16:7-10)

그 수하에 복종하라

본문: 창세기 16:7-10

2014년,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우리나라에서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출간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구입했고 지금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쳐 읽어본 사람들은 이내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조차 만만치 않습니다. 철학적 바탕이 있어야 하고,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까지 두루 섭렵해야 비로소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어려운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어떻게 그토록 많이 팔린 것일까요? 사람들이 읽어보면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소문도 났을 텐데 어떻게 그토록 많이 팔리는 것일까요? 이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정의에 목말라 하고 정의를 갈망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람들은 정의로운 세상을 원합니다. 정의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정의인지, 나는 정의롭게 살고 있는지, 그것조차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제목을 보고 한번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즘 정의에 대한 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했습니다. 언론과 매체들을 보면 '절차적 정의'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절차적 정의'는 언론이 만들어낸 단어가 아닙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제시한 개념입니다. 과정과 절차가 정의로우면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과도 정의롭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유아를 둔 가정에 국가가 양육비를 지급한다고 합시다. 그 발표를 들은 부모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국가가 자녀를 키우는 데 양육비를 지급한다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재원 확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국가가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거나, 장애인에게 지급해야 할 예산을 함부로 삭감하거나, 국방 예산을 무리하게 줄여서 재원을 만든다면, 이미 절차적 정의는 훼손된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도 정의롭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절차적 정의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성품과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기와 과정을 중요하게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이 일을 시작할 때 우리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하나님은 주목하여 살피십니다. 만약 절차가 잘못되었다면 고치라고 하십니다. 과정이 잘못되었다면 다시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과정에 충실할 것을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하갈의 과정이 잘못되었음을, 그 절차가 틀렸음을 지적하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과정 가운데 있는지, 혹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자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가정에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사래는 격분했고 남편에게 따졌습니다. 남편은 "당신 수하에 있는 여인이니 당신 뜻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하갈은 그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사래가 아이를 얼마나 기다려 왔습니까? 자녀 낳기를 그토록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하갈도 원래 애굽 여인인데, 아브라함의 가정에 들어와서 주인의 아이까지 가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집을 나간 하갈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고향은 애굽인데, 막상 나와 보니 광야와 사막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샘 곁을 하나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창 16:7)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하갈에게 보내지 않았다면 하갈은 그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도 가도 사막인데, 끝간데 없는 광야 한복판에서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일단 하갈을 보호하고 지키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하갈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그 중요한 말씀을 건네주셨습니다.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창 16:8)

질문이 오가고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질문을 했느냐, 어떤 대답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왜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잊어버린 정체성의 회복

이렇게 부르시는 것은 하갈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고, 깨닫게 하고,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갈이 자기 정체성이 '사래의 여종'인데, 임신하고 나서 자기 정체성을 망각했기 때문에 이 일이 벌어진 것 아닙니까? 그녀는 임신하기 전에도 사래의 여종이었고 임신한 후에도 사래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교만해졌습니다. 주인의 아이를 가졌다고 여주인을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런 하갈에게 "너는 사래의 여종 하갈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갈을 비하하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너는 사래의 여종 하갈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사실 하갈이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의 종이 되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래에게 바로가 선물을 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은금과 패물과 각종 가축과 노비까지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노비들 중에 한 여인이 바로 하갈이었습니다. 원래 고향은 애굽인데, 먼 가나안 땅까지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래는 하갈을 아껴 주었습니다. 열심히 일하기도 했고, 사래는 하갈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오랫동안 지켜보고 살펴본 결과, 괜찮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에게 주어서 아이를 갖게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변했습니다. 참 성실하고 괜찮았는데,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 여주인을 멸시합니다.

사람이 변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변질된 사람, 변한 사람을 많이 봐 왔을 것입니다. 가난할 때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돈 없는 것 빼고는 사람 자체는 진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일확천금을 하고, 갑자기 돈을 벌게 되고, 벼락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나니 사람이 변했습니다. 말투도 변하고, 거만해지고, 눈빛도 변하고, 모든 것이 다 변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다시는 저 사람과 상종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도 변하고 집단도 변합니다. 20세기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20세기 중반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를 지냈고, 20세기 중반 한국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 후에는 잿더미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루 세 끼 먹는 것은 그야말로 사치였습니다. 하루 한 끼 겨우 먹을까 말까, 불과 한 세대 전에 그랬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특유의 근면함으로 우리는 부유해졌습니다. 고속도로가 깔리고, 공장이 세워지고, 집을 짓고, 경제 개발이 이루어지고,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OECD 국가 가운데서도 어느 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지금의 대한민국입니다. 그랬더니 사람이 변합니다. 나라가 변했습니다. 이제는 아끼지 않습니다. 음식 쓰레기가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펑펑 쓰기 시작합니다. 에너지도 아끼지 않습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얼마나 많이 쓰는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가 변하고 사람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나라를 보시고 "나는 너희와 상종하지 않겠다" 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믿음은 어떻습니까? 우리 부모님 세대는 마룻바닥에 무릎 꿇고 예배드리고 기도했는데, 그 마룻바닥이 눈물로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눈물 콧물로 기도하며 예배를 드리고, 간절하게 부르짖고 엎드렸습니다. 가난하니까, 자식 공부시킬 수 없으니까, 간절하고 절실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붙들고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집에 가면 쌀도 좋은 쌀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먹고살 만하지 않습니까?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절실하지도 않고, 간절하지도 않고, 더 이상 애통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변했습니다. 사람도 변하고, 나라도 변하고, 우리의 믿음도 퇴색되고 변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변질된 모습입니다.

변질된 사람, 기드온

성경을 보면 앞과 뒤가 변한 사람, 변질되고 타락한 사람이 여럿 나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사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압제 때문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이제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모습을 보니 작고 연약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우리 민족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삿 6:15)

그가 자기 정체성을 고백합니다. "약하고 작은 자입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기드온은 "나는 약하고 작은 자입니다." 원래 그는 이렇게 겸손하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괜찮다, 내가 너와 함께할 테니 너는 걱정 말고 나만 따라오라" 하셔서 전쟁하러 갔습니다. 군인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삼만 이천 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은 다 필요 없다" 하시고 돌려보내셨습니다. 삼백 명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변변한 무기조차 주지 않으셨습니다. 항아리, 횃불, 나팔, 이 세 가지뿐이었습니다. 칼도 없고 창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미디안의 대군과 싸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미디안을 철저하게 물리쳤습니다.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기드온은 그 전쟁에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다 하셨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을 뿐, 그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기드온, 당신이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큰 안정을 얻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가 상으로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드리고 싶습니다." 몇 번 사양하다가 기드온이 금을 요구합니다.

"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옷과 또 그 외에 그들의 낙타 목에 걸렸던 사슬이 있었더라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삿 8:26-27)

상당한 양의 금이 모였습니다. 금을 요구했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저기서 금을 가져왔습니다. 그 금으로 기드온은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제사장이 입는 조끼가 바로 에봇인데,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 고향 집에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온 이스라엘이 야단이 났습니다. 그 에봇에 무슨 신통력이 있는 줄 알고, 그 에봇을 가서 한번 만지면 병이 나을 줄 알고, 그 에봇을 만지면 가정의 문제가 다 해결될 줄 알고, 사람들이 마치 성지순례 하듯이 기드온의 고향 집에 가서 에봇에게 엎드려 절하고 만지며 야단이 났습니다.

기드온이 타락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약하고 작은 자"라고 자신을 낮추었는데, 그 약하고 작은 자가 어찌 금을 요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많은 금을 요구해서 자신의 치적과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에봇을 만들어 거기에 걸어두고, 이스라엘도 타락시키고, 기드온 자신도 타락하고, 자신의 집안도 타락했습니다. 이제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에서 완전히 타락하고 몰락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정체성, "약하고 작은 자입니다"라는 이 정체성을 지키지 못했을 때 그는 타락하고 몰락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갈에게 "너는 사래의 여종 하갈이다"라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고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정체성을 잊은 이스라엘, 기억하게 하신 다윗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습니까? 그 사람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 가운데 지냈습니다. 벽돌 구우면서 힘들게 살았습니다. 심지어 아들을 낳아도 그 아들을 기를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의 명령에 따라 아들을 나일강에 던져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부르짖고 눈물로 호소해서 그들이 출애굽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그들이 출애굽 했습니다.

광야 40년 여정 동안 그들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원망했습니까? 먹을 것 때문에 원망하고, 마시는 물 때문에 원망하고, 길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에 지쳐서 출애굽 1세대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렇게 간절했으니까 애굽에서 출애굽 했는데, 광야 길을 겪으면서 그들이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후부터 사랑하는 자들에게 "네가 어떤 존재였는지, 너는 과거에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자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삼하 7:8)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이미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왕궁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말씀을 전달하십니다.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지금 네가 비록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왕좌에 앉아 있지만, 너는 과거에 양들을 목양하는 목자였다. 양들의 배설물을 치우고 양들을 이끌고 다니던 들판의 목자였다. 그런데 내가 너를 데려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지 않느냐? 그러니 원래 너의 정체성이 목자였음을 기억하고 교만하지 말라. 다윗아, 네가 잘나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데려다가 여기에 왕으로 세웠으니 너는 결단코 교만하지 말라."

하나님은 원래 그의 정체성을 가끔씩 이렇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교만하지 말라고, 타락하지 말라고, 사람이 변질되지 말라고 하나님은 그렇게 자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서 멀쩡하게 나와서 예배드립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나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격적으로 영접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를 진실로 '아버지'라고 고백하기 전에, 성령께서 내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기 전에, 그때 나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지 않으셨다면, 성령께서 내 마음을 만져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 가운데 방황하다가 죄악의 백성으로 살다가 죽어서 지옥의 백성이 될 수밖에 없었지 않겠습니까? 흉악한 죄인 가운데 괴수였던 나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셔서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도 감사한데, 일터도 주시고, 가정도 주시고, 자녀도 주시고, 건강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요, 축복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 정체성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자주 기억해야 합니다. 자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만하지 않고, 그래야 죄짓지 않고,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부르시는 하나님, 하갈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시고 "네가 잘못했으니 다시 돌아가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도 함께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율법을 통과한 복음, 고난을 통과한 영광

이제 그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방향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창 16:9)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기서 '복종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동사 '아나'를 씁니다. '아나'는 '찍어 누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는 6절 말씀에 한 번 쓰였던 말입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다" 할 때 그 동사입니다. '찍어 눌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단어를 왜 이렇게 다시 사용할까요? 그것은 하갈이 이제 사래의 수하에 들어가서 모진 고난과 고통을 다 감내하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사래와 하갈 사이를 중재해 주실 수는 없었을까요? 학대하는 사래를 하나님께서 나무라고 책망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될 텐데, 하나님은 왜 하갈에게 "들어가서 그것을 견디라"고 하셨을까요?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갈이 이것을 온전히 견디는 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칙, 하나님의 원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적용하고 누구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율법을 통과한 복음', '고난을 통과한 영광'입니다. 율법 없이 복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난 없이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율법은 귀찮은 것이고, 그저 복음만 가지고 끝내려고 합니다. 고난은 힘겹기 때문에 고난받기를 꺼려합니다. 영광만 취하고 싶어합니다. 여기에 하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래의 수하에 복종하기는 싫습니다. 율법에 얽매이기는 싫습니다. 고난당하기는 귀찮습니다. 그런데 자녀를 임신했습니다. 영광을 누리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상속과 영광을 얻고 싶습니다. 거기에서 은혜를 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는 절차가 잘못됐다. 너는 순서가 잘못됐으니 다시 돌아가서 율법부터 다시 시작하라. 다시 돌아가서 고난받는 것부터 시작하라. 그래야 너에게 영광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키를 다시 한번 일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절차적 정의가 하갈에게서 다시 회복되기를 하나님은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붙이고 종교개혁을 완성합니다. 가톨릭교회가 타락해 있지 않았습니까? 그 타락한 가톨릭교회에 저항하면서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은 칭의론이고, 칭의론의 핵심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루터를 오해했습니다. 루터가 은혜를 강조하니까 은혜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은혜만 강조하면서 복음도 빼버리고, 율법도 빼버리고, 고난도 다 빼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루터를 제대로 공부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두 가지 선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는 국가이고 하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국가는 율법이 다스리는 곳이고, 교회는 복음이 통치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 땅에 있고, 교회가 다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은 우리 모든 성도들은 율법 안에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복음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누구도 율법을 건너뛰고 복음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것을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는 아니셨지만, 그렇다고 율법 파괴자는 더더욱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케 하고 율법을 세우시는 분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런 말씀이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스가랴 선지자가 "나귀 새끼를 탄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시편 22편에 메시아 수난의 모습 그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건너뛰고 은혜만 강조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건너뛰고 "영광만 받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다 당하시고 그 다음에 부활의 영광에 이르신 분입니다. 하갈의 문제는 고난을 건너뛰고, 율법을 건너뛰고, 복음과 은혜, 그리고 영광만 취하려 한 것입니다.

결론

오늘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를 우리는 흔히 '은혜 공동체'라고 합니다. '사랑이 충만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은혜의 공동체이지만 율법 없는 은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질서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말씀은 내가 순종하고 싶고, 어떤 말씀은 내가 버리고 싶고, 그렇게 해서는 우리는 온전한 은혜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고난은 싫고, 교회 봉사하는 것이 싫고, 충성하는 것이 싫고, 영광만 얻으려 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방법이 아닙니다.

훈련받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이 함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귀한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그 수하에, 그 말씀에 복종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정의로우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시지만 그 안에 율법을 가지고 계시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부르신 하나님, 하갈의 정체성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다시 한번 밝히시는 하나님, 우리가 과거에 예수 믿기 전에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교만하지 않게 하옵소서. 들뜨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변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그 성실과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