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강 / 이스마엘 (16:10-16)

이스마엘

본문: 창세기 16:10-16

조선의 많은 왕들 중에 가장 성군이 누구냐는 질문을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종대왕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이 성군인 이유는 그분 자체가 위대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분 주변에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분이 바로 황희 정승입니다. 그는 18년 동안 세종의 곁에서 정승으로 일했습니다. 황희는 집현전 학사들처럼 특정 분야의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장점은 공정하고 공평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만약 18년 동안 그가 어느 정파의 편에, 어느 집단의 편에, 어느 한 개인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세종이 성군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세종은 황희의 눈을 통해서 정사를 보고 세상을 보고 정치를 했을 텐데, 그랬다면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잠잠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희는 항상 공정했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모두의 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력을 확장하려면 내 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편을 만드는 데 골몰합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지도자가 네 편 내 편을 나누기 시작하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바로 적이 됩니다. 그러면 공동체는 그때부터 힘겨워집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통합의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시고 반대로 모두의 편이 되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이방 여인 하갈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갈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그녀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간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사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하갈은 집을 나갑니다. 집을 나간 하갈에게는 갈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과거의 삶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수하에 돌아가서 복종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두 가지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 16:11)

하나님께서 두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지금 임신한 아이가 아들이 될 것이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하갈의 고통을 다 들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것은 하갈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르짖었기 때문에, 간구했기 때문에, "하나님 저 힘들어요, 저 살려주세요"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고통을 들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갈이 이방 여인이라는 점입니다. 고향이 애굽입니다. 기도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고 경험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갈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집에 살면서 아브라함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만나는지,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어깨너머로 보면서 배웠습니다. 318명의 군사를 데리고 조카 롯을 구원하기 위해 집을 떠났을 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함께하셨고, 롯을 구출하고 아브라함도 안전하게 집에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녀 때문에 걱정할 때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반으로 쪼개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횃불이 되어서 그 가운데를 지나가셨습니다. 이른바 저주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갈은 그때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구나,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응답하시는구나. 그래서 자신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힘겨울 때, 눈물 날 때, 갈 곳이 없을 때 하나님께 간구했고,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배웁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간구하는 모든 자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평범한 것 같지만 대단히 중요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여인 하갈의 기도조차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왜 사래는 10년 이상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사래의 기도는 응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사래가 가나안 땅에 온 이후 10년 이상을 자녀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는데, 하나님은 사래의 기도는 응답하지 않으시고 하갈의 기도는 즉각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것과 이루어 주시는 것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드리는 모든 기도를 우선 다 들어주십니다. 듣고 난 후에 그것을 응답하고 이루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때와 시기,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 응답해 주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고 즉각적으로 반응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래의 기도는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고 판단하셨습니다. 10년을 기다렸는데도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림이 너에게도 유익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리면 즉각 응답하시기도 하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다른 방법으로 인도하시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거절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미련해서 무조건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시기에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차라리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시면 하나님은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아니라 10년 뒤에, 혹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하나님은 기다림을 요구하실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하면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기도가 끝나자마자 응답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와 시기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간구하고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시기와 때는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감히 우리가 어떻게 전능자요 주권자 되신 하나님께 그 시기와 때를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합당한 시기에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기도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기도도 일일이 다 듣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은 이방인이요 아람 장군입니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었지만 나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서 그의 나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요나서에 보면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백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악이 관영해서 그대로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요나를 보냅니다. 그 백성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한 번만 살려달라고, 우리를 심판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은지라 ...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3:5, 10)

사람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알 일은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백성들의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이 말씀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는데 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에 차별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래도 그랬습니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하갈을 차별했기 때문에, 하갈이 자신의 몸종이고 애굽에서 딸려온 종이기 때문에 그녀를 학대했습니다. 심하게 학대했습니다. 그래서 하갈이 집을 나온 것입니다.

나중에 사래도 이 사실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간구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하갈이 애통하고 고통 가운데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들어주셨다는 사실을 사래도 들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이름 지어준 것도 사래는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학대한 하갈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사실을 사래가 알았을 때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하나님을 독점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멸시하고 내가 학대하고 내가 차별한 저 여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순간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때부터는 사래도 하갈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함부로 학대할 수가 없습니다. 만에 하나 하갈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사래가 저를 자꾸 학대합니다" 하고 하나님께 울며 탄원하고 하나님께 눈물 흘리면, 하나님이 사래를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아마 그때부터 사래는 하갈을 향한 학대를 멈출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착각 중에 대단히 위험한 착각은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기도 하시고 내가 미워하는 자의 하나님이 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하나님이기도 하고 나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하나님이기도 하고 다른 민족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서방 세계의 많은 뜻있는 사람들은 일말의 기대를 가졌습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이 역할을 감당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푸틴이 러시아 정교회의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동방 정교의 가장 큰 교단인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대주교가 한마디 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키릴 대주교는 이 전쟁이 성전이라고 선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푸틴과 함께하신다고 망언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만의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과거 히틀러의 나치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때 독일 교회가 히틀러를 옹호했습니다. 독일 교회가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다"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 폐해가 얼마나 심각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약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의 하나님인 동시에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절대로 차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그가 전한 메시지는 일관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할례 받지 않아도 괜찮다, 할례가 곧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그 복음에 열광했습니다. 할례 받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들은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예루살렘이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렇게 가르쳐도 되느냐고, 어떻게 할례 받지 않았는데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그들은 바울을 힐난합니다. 바울을 비난합니다.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모인 자리에서 성토가 일어났습니다. 오랜 대화가 오간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상황을 정리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행 15:9-10)

하나님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고 베드로가 말하지 않습니까?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신 분 아닙니까? 성령 받은 분 아닙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누구도 차별하시는 법이 없다고 말하고 나서야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끝납니다.

사도 바울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증거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1-22)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차별이 없고, 모든 믿는 자는 복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인 자리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는 차별 없는 공동체입니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적어도 말씀에 근거한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복음적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복음주의자라는 말은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진실로 차별이란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자부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40년 넘게 신분과 이제 곧 교회에 오신 분들, 오랫동안 이 교회를 다녀서 자기도 모르게 기득권을 가지고 계신 분들, 이제 막 교회에 오신 분들을 우리가 선입견을 가지고 차별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의 재력을 보고, 그 사람이 하고 다니는 모든 모습을 보고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에게는 절대로 차별이 없다고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 앞에,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복음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지금도 여태껏 복음을 외쳤지만 현실의 우리는 복음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혹시 우리 속에 사람을 차별하고, 내가 등급을 나누어서 더 잘해 줘야 될 사람 아니면 무시해도 될 사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될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차별도 용납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상호 작용하는 신앙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창 16:13-14)

가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분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올려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이런저런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드립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여호와 이레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바치라. 아브라함 얼마나 고민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꼭대기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어린 양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감동스러워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여호와의 산에서 미리 준비되었도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셨도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러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여호와 이레가 창세기 22장인데, 그보다 훨씬 이전인 창세기 16장 오늘 본문에서 이방 여인 하갈이 하나님을 경험한 이후에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신앙고백입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녀가 서 있던 우물가를 브엘라해로이, 곧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분의 우물"이라고 이름 지어서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대단한 은혜를 줍니다. 하갈은 하나님과 상호 작용하고 소통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겪었습니다.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고통, 심적 고통. 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고통이 있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과 상호 작용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지어 주십니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듣고 있다고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과 하갈의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장면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갈은 다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을 올려 드립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대단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을 겪습니다. 말할 수 없는 외적인, 심적인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이 고통을 잊기 위해서 술을 찾습니다. 술 친구를 찾아갑니다. 나를 위로해 줄 세상의 친구를 찾아갑니다. 한순간이라도 이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는 오락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잊고 끝내 버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상호 작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 찾아갔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상호 작용이 일어나겠습니까?

기쁜 일이 있어도 사람들은 친구를 찾아갑니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내 자랑을 늘어놓기 위해서, 내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즐거운 일, 행복한 일, 기쁜 일이 있으면 시를 지어서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를 받으시고 다시 다윗을 축복하셨습니다. 긍정적인 상호 작용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고통이 있을 때, 혹은 즐거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과 상호 작용하셔야 합니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찬양 올려 드리고, 고통과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아버지께 기도하고, 그래서 선순환의 상승 구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믿음의 깊이가 깊이 있게 뿌리 내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믿음은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갈은 대단히 훌륭하고 민감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반응하지 않는 자를 향하여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 11:16-17)

반응하지 않는 세대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습니다. 슬픈 일이 있어도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일이나 고통받는 일이나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부디 우리 모든 주의 백성들, 우리의 희로애락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상호 작용하고 소통해서 우리 믿음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시기와 하나님의 방법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어떤 기도는 하갈처럼 즉각 응답하시고, 어떤 기도는 사래처럼 오랫동안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기 원합니다. 주여, 우리가 기도를 쉬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하셨는데,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는 사람을 차별하는 못된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차별하는 공동체에서 떠나게 하시고, 차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차별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갈처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고 하나님과 상호 작용하기를 원합니다. 즐거운 일이 있어도, 아픈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 상호 작용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